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삼국사기 > 백제본기 제6 > 의자왕(義慈王) >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 660년 (음) )

髙宗詔, 左武校勘 015015 정덕본에는 없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닫기衛大將軍蘇定方神丘道行軍大揔管, 率左驍校勘 016016 정덕본에는 없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닫기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校勘 017017 정덕본에는 오각(誤刻)되어 있다. 주자본에 의거하여 驍로 표기함이 옳다.닫기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嵎夷道行軍揔管, 將其國兵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㑹羣臣問戰守之冝, 佐平義直進曰, “兵逺渉溟海, 不習水者在舩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人失利, 則必疑懼而不敢銳進. 故知先與人决戰, 可也.” 逹率常永等曰, “不然. 兵逺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冝塞人之路, 以待其師老先, 使偏師擊羅軍,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而保國矣.” 王猶䂊, 不知所從. 時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兵旣衆, 師律嚴明. 况與新羅共謀掎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 或云伎伐浦.·炭峴 或云沉峴., 我國之要路地也, 一夫單槍萬人莫當. 冝簡勇士往守之, 使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縲紲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兵入白江, 㳂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並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雞·離網之魚也.” 王然之. 又聞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校勘 018018 《삼국사절요》에는 階로 되어 있다.닫기, 帥死士五千出黄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堦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乗山校勘 019019 《삼국사절요》에는 高로 되어 있다.닫기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乗潮, 舳艫銜尾進鼓而譟, 定方將歩騎, 直趍眞校勘 020020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에는 其로 되어 있다.닫기都城, 一舎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兵乗勝薄城. 王知不免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 縋而出, 民皆從之, 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旗幟, 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王子··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國夲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析校勘 021021 《구당서(舊唐書)》 권199상 백제전(百濟傳) 및 《삼국사절요》에는 分으로 되어 있다.닫기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櫂校勘 022022 《삼국사절요》 및 주자본에는 擢으로 되어 있다.닫기渠長爲都督·刺史·縣令以理校勘 023023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百濟傳)에는 治로 되어 있다. 고려 성종의 이름 治의 피휘(避諱)이다.닫기之, 命郎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郎將王文度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俘見, 上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禄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寳墓側, 并爲竪碑. 授司稼卿. 文度濟海卒, 以劉仁軌代之.

校勘 015
정덕본에는 없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校勘 016
정덕본에는 없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校勘 017
정덕본에는 오각(誤刻)되어 있다. 주자본에 의거하여 驍로 표기함이 옳다.
校勘 018
《삼국사절요》에는 階로 되어 있다.
校勘 019
《삼국사절요》에는 高로 되어 있다.
校勘 020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에는 其로 되어 있다.
校勘 021
《구당서(舊唐書)》 권199상 백제전(百濟傳) 및 《삼국사절요》에는 分으로 되어 있다.
校勘 022
《삼국사절요》 및 주자본에는 擢으로 되어 있다.
校勘 023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百濟傳)에는 治로 되어 있다. 고려 성종의 이름 治의 피휘(避諱)이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 660년 (음) )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001001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 좌무위(左武衛)는 중국 唐나라의 16위 중의 하나이며, 궁궐의 숙위(宿衛)와 오부(五府) 및 외부(外府)를 통괄하였다. 좌무위에 설치된 무관(武官)으로는 상장군(上將軍) 1인(종2품), 대장군(大將軍) 1인(정3품), 장군(將軍) 2인(종3품)이 있었고, 그 아래에 장사(長史) 1인(종6품상) 등이 있었다. 『新唐書』 권49 백관4 16衛조 참조. 한편,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총사령관 소정방(蘇定方)의 관직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199 百濟傳『新唐書』 권220 百濟傳에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적혀 있으며,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新唐書』 권3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으로 나온다. 본서는 후자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닫기 소정방(蘇定方)002002 소정방(蘇定方) : 중국 당나라 때의 장군으로서 생몰연대는 592~667년이다. 중국 기주(冀州) 무읍(武邑) 출신이며 이름은 열(烈), 자(字)는 정방(定方)이다. 그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도적 무리에 맞서 싸워 신망을 얻었으며, 이후 唐 太宗 貞觀 초에 광도부절충(匡道府折衝)이 되었고, 高宗 때에는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정지절(程知節)을 따라 하로(賀魯)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뒤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이 되고 형국공(邢國公)에 봉해졌다. 얼마 후 돌궐지역 정벌에 참여한 공으로 형주(邢州)거록진읍(鉅鹿眞邑) 5백호의 식읍을 더하여 받았다. 660년 3월에는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3만의 당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山東半島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으며, 의자왕과 태자 융(隆)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661년 5월 다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 되어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그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현존하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의 1층 탑신부에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를 새겼는데, 백제를 공격할 당시의 소정방의 직함이 “사지절신구우이마한웅진등14도행군대총관·좌무위대장군·상주국·형국공(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左武衛大將軍上柱國邢國公)”으로 적혀 있다. 소정방의 행적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83 蘇定方傳『新唐書』 권11 蘇定方傳 및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58~60쪽 참조.닫기을 신구도(神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003003 신구도(神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받은 직함으로서,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도 같은 관명이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소정방의 직함이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 『新唐書』 권3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에는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사지절신구우이마한웅진등14도행군대총관(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7월조에 인용된 고려사문(高麗沙門) 도현(道顯)의 『日本世記』에는 ‘大將軍蘇定方’으로만 나온다. 신구도(神丘道)는 唐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정한 공격로의 하나이다. 신구(神丘)는 연연산(燕然山)을 높여 말한 것인데(『文選』 권56 封燕然山名條), 연연산(燕然山)은 외몽골 삼음약안부(三音若顔部) 항애산(杭愛山)의 옛 이름으로서 後漢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永元 원년(89)에 흉노를 정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後漢書』 권23 竇融傳附 竇憲傳). 따라서 신구도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정벌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길을 수식하고자 붙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 사비도성의 서쪽지역을 神丘라고 불렀다고 보기도 한다(尹善泰, 2006, 「百濟 泗沘都城과 '嵎夷' - 木簡으로 본 泗沘都城의 안과 밖 -」, 『東亞考古論壇』 2, 충청문화재연구원).닫기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004004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 당나라에서 좌효위에 설치된 종3품 장군직이다. 효위는 원래 효기(驍騎)로 불리다가 수나라 때 효위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당나라도 그에 따라 효위부(驍衛部)를 두었다. 좌효위는 16衛의 하나로서 궁궐 숙위를 담당하였으며, 장군은 2명이었고, 관장 업무와 인적 구성은 좌무위(左武衛)와 같았다. 『舊唐書』 권44 직관3 左右驍衛 및 『新唐書』 권48 백관4 상 16衛 참조.닫기 유백영(劉伯英)005005 유백영(劉伯英) :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장군으로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유백영의 직함에 대해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좌위장군(左衛將軍),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부대총관·관군대장군·△△△위장군·상주국·하박공(副大摠管冠軍大將軍△△△衛將軍上柱國下博公)’,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조와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 적혀 있다. 이때 백제를 공격한 당나라 장수에 대해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소정방만 적혀 있으나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소정방뿐만 아니라 유백영, 풍사귀, 방효태(방효공) 등이 더 기록되어 있다.닫기・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006006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 당나라에서 우무위(右武衛)에 설치된 종3품 장군직으로서, 궁궐 숙위를 담당하였다. 우무위는 16위의 하나였으며, 장군은 2명이었다.닫기 풍사귀(馮士貴)007007 풍사귀(馮士貴) :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로서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지휘하였다.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도 풍사귀의 직함이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나온다.닫기・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008008 효공(龐孝公) :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로서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전쟁에 참여하였다.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로 적혀 있다.닫기을 거느리고 군사 130,000명009009 군사 130,000명 : 백제를 공격해 온 당나라 군사의 숫자인데,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조에도 “水陸13萬△△伐百濟”로 적혀 있다. 그러나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는 “신라 기록에는 군사 122,711, 배 1,900척이라고 하였는데, 당나라 역사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라고 하여 조금 다르지만 더 구체적인 숫자가 적혀 있다.닫기을 통솔하며 〔백제로〕 와서 정벌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摠管)010010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摠管) :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가 신라 태종무열왕에게 준 지위이다. 동일한 관명이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 『新唐書』 권3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조에도 실려 있다. 우이도(嵎夷道)는 당나라 군대의 진격로 중 하나인데, ‘우이(嵎夷)’라는 명칭은 『尙書』 요전(堯典)의 “宅嵎夷曰暘谷”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본서 권37 지리4 都督府一十三縣條에는 우이현(嵎夷縣)이 나온다. 「예군 묘지명(禰軍 墓誌銘)」에는 예군이 웅진 우이인(熊津嵎夷人)으로 적혀 있다. 2001년 부여 관북리유적 연지에서 출토된 286번 목간에 ‘嵎夷’라는 붓글씨가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백제 때 사비도성의 동쪽 구역의 지명이 우이였다고 보기도 한다(尹善泰, 2006, 「百濟 泗沘都城과 '嵎夷' - 木簡으로 본 泗沘都城의 안과 밖 -」, 『東亞考古論壇』 2, 충청문화재연구원).닫기으로 삼아 그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011011 성산(城山) :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서 지금도 성산각(城山角)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가 배를 타고 출발한 지점이 본서 권5 신라본기5에는 萊州로 적혀있으나, 본서 권28 백제본기6 및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舊唐書』 권83 蘇定方傳·『新唐書』 권111 蘇定方傳권220 百濟傳『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조 등에는 모두 성산(城山)으로 적혀 있다. 이에 성산(城山)을 萊州에 속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萊州는 수당시대 이래로 주요한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598년 수나라 文帝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할 때 주라후(周羅候)가 이끄는 수군(水軍)이 평양성으로 가기 위해 출발한 곳이었고, 612년과 614년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는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水軍)의 전진기지였다. 645년 장양(張亮)이 거느린 당나라 수군이 500척의 전선(戰船)에 4만여 명을 싣고 고구려 공격에 나선 곳이었으며, 647년 우진달(牛進達)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당나라 수군이 출발한 곳이었고, 648년 설만철(薛萬徹)이 이끄는 3만여 명의 수군이 출발한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백제 원정에서도 13만 대군이 萊州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발해(渤海) 연안에 위치한 萊州에 당나라의 대규모 조선(造船)기지가 있었고, 대규모 수군 전단을 정박시키기에 적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萊州의 관할구역은 山東半島 동쪽 끝까지 이르렀으며, 山東半島 중단 발해만 연안의 덩저우[登州, 산둥성[山東省] 펑라이시[蓬萊市])에는 수군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나라 수군은 고구려로 출정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산동성 등주에 전선(戰船)을 집결시켜 출정을 준비한 후 山東半島 동쪽 끝의 성산(城山)을 거쳐 바다를 건넌 것으로 볼 수 있다(김영관, 2007,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235~237쪽).닫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德物島)012012 덕물도(德物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비정된다. 덕적군도는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와 같은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당나라 수군은 덕적도 남쪽 소야도에 주둔하였으며, 소야도라는 섬이름은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라는 전설이 현지에 전한다(김영관, 1999,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68쪽).닫기에 이르니013013 소정방이 … 덕물도에 이르니 : 이 부분이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 『新唐書』 권220 百濟傳『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웅진(熊津) 하구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7월조의 주(注)에는 당나라 수군이 미자진(尾資津)에 이른 것으로 적혀 있는데, 미자진을 금강하구 즉 기벌포로 보는 견해도 있고, 충남 보령군 웅천면의 미조포로 보는 견해도 있다(坂本太郞 외, 1967, 『日本書紀(下)』, 岩波書店, 東京, 345쪽의 頭注30).닫기,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0,000명을 거느리고014014 정예 군사 50,000명을 거느리고: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6월조에는 진주(眞珠)・천존(天存)・품일(品日)・흠춘(欽春) 등 김유신과 함께 출정한 장군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닫기 나아가게 하였다.015015 (당나라) 고종이 … 나아가게 하였다 :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계속 실패하자 신라의 주장을 받아들여 백제를 먼저 멸망시킨 뒤 고구려를 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던 중 659년 4월 신라가 김인문을 보내 백제로 출병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나라가 출병을 결정한 것은 황산전투에서 전사한 장춘과 파랑의 영혼이 나타나 당의 파병 소식을 알려주었다고 한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6년(659) 겨울10월조에 의거해 볼 때 659년 10월로 추정된다(김영관, 2007, 230쪽). 당의 출병 소식은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곧바로 신라에 알려지지 않다가 이듬해 660년 3월에 공식적으로 신라에 통보한 것으로 보인다(李昊榮, 1997, 184쪽). 659년 4월 청병사로 당에 건너간 신라의 사절단은 당의 출병 결정 소식과 출격 명령을 받아 당의 장안에서 660년 3월에 출발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신라로 돌아왔다. 또,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5년(659) 7월조에는 659년에 왜의 遣唐使로서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이키노무라지하카토코(伊吉連博德)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견당사 일행이 7월 3일 難波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윤10월 29일 천자가 머물던 東京(洛陽)에 이르니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벌하므로 왜 사신단은 동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하며 西京 특별한 곳에 가두어서 여러 해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李昊榮, 1997, 『新羅三國統合과 麗·濟 敗亡原因硏究』, 서경문화사.
김영관, 2007,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닫기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신하들을 모아 〔나가서〕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깊은 바다를 건너 왔으니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배에서 분명 피곤할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땅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회복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공격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해서 감히 재빠르게 나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을 벌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常永)016016 상영(常永) : 백제 의자왕대의 고위 관료이다.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때 백제의 대책회의에서 속전속결을 반대하였는데 그때 그의 관등은 달솔이었다. 그 뒤 660년 7월 계백이 거느린 결사대와 함께 황산(黃山)에서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때 그의 관등은 좌평으로 나온다. 이에 그가 출전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했다고 보기도 한다.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 따르면, 그는 신라군에 항복한 뒤 660년 11월에 신라 무열왕으로부터 7등급 일길찬의 관등과 총관(摠管)의 관직을 제수받았다.닫기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칼끝을 당할 수 없으며, 신라 사람은 예전에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이제 우리 군대의 기세를 보면 겁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사람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신라 군대를 쳐서 그 날카로운 기운을 꺾은 뒤에 그 형편을 보아 전투를 벌이면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주저하면서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017017 흥수(興首) : 백제 의자왕 때의 좌평으로서 귀양살이 중에도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충신으로 꼽힌다. 성충과 함께 의자왕의 즉위 초 왕권 강화를 위해 적극 노력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金壽泰, 1992,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變動」, 『韓國古代史硏究』 5, 66쪽). 충남 부여군이 세운 삼충사(三忠祠)에 성충・계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닫기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의 현(古馬彌知縣)018018 고마미지의 현(古馬彌知縣) : 본서 권36 지리3 무주 寶城郡條에 “마읍현(馬邑縣)은 본래 백제 고마지현(古馬知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었으며 지금의 수령현(遂寧縣)이다”라고 한 기사가 있고, 『新增東國輿地勝覽』 長興都護府조에는 遂寧廢縣이 있으므로 장흥군 장흥읍 일원에 비정한다. 장흥읍 외에 부산면・안량면・유치면 지역도 포함되는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마읍현으로 고쳐 보성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이와는 달리 충남 서천군 화양면 고마리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洪思俊, 1970, 「百濟地名考-大王浦와 古馬彌知縣-」, 『百濟硏究』 창간호).닫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서 물어 말하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고 군사의 규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앞뒤에서 치려고 하니 만약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019019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 하구를 가리킨다.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웅진구(熊津口)”,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는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663)조에는 白村江 등으로 달리 기재되어 있다. 이에 당군이 진입한 백강 즉 기벌포에 대해 종래 백강과 웅진강을 별개의 곳으로 보고, 백강을 안성천 하구의 백석포로 보는 견해(金在鵬, 1981), 부안 줄포(茁浦)로 보는 견해(盧道陽, 1980), 부안 동진강(東津江)으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24; 全榮來, 1976; 李鍾學, 2004), 대천만으로 보는 견해(이재준, 2019)도 있다. 그러나 백강과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를 가리키며 웅진강구와 같은 곳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김영관, 2007; 이효원, 2020). 흔히 백강은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웅진강은 당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이해한다(沈正輔, 1988; 서정석, 2004). 또한 웅진강은 지금의 공주 부근을 흐르는 금강에 대한 명칭이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으로 보기도 한다(淺川伯敎, 1930). 당군이 상륙한 곳은 금강 하구로서 기벌포, 지화포(只火浦), 백강(白江), 장암 등으로 불리었으며, 지금의 충남 서천지역에 해당한다. 금강 하구는 물길을 따라 사비도성으로 바로 진군할 수 있는 곳이므로 당나라 수군이 상륙하기에 군사전략상 가장 합리적인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김영관, 2007).
〈참고문헌〉
小田省吾, 1924, 「朝鮮上世史」 『朝鮮史講座』 1, 朝鮮總督府.
淺川伯敎, 1930, 「夫餘白馬江」 『日本地理大系』 12 朝鮮篇, 改造社.
全榮來, 1976, 『周留城・白江 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 扶安郡.
盧道陽, 1980, 「百濟周留城考」 『明知大論文集』 12, 明知大學.
金在鵬, 1981, 「全義 周留城 考證」, 『燕岐地區古蹟硏究調査報告書 -全義篇-』.
沈正輔, 1988, 「中國側史料를 통해 본 白江의 位置問題」, 『震檀學報』 66.
沈正輔, 1989, 「「白江」의 位置에 대하여」, 『韓國上古史學報』 2.
서정석, 2004, 「백제 白江의 위치」, 『白山學報』 69.
李鍾學, 2004, 「周留城・白江의 位置比定에 관하여」, 『軍史』 52.
김영관, 2007,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이재준, 2019, 「군사적 관점에서 본 주류성과 백강의 위치」, 『韓國古代史探究』 31.
이효원, 2020, 「백제 부흥운동기 주류성 위치 비정 연구」, 『백제학회 제39회 정기학술회의』.
닫기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과 탄현(炭峴)020020 탄현(炭峴) : 침현(沈峴) 또는 진현(眞峴)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3년(501)조 각주 참조.닫기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 있어도 10,000명이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가려내어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이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 성문을 굳게 닫고 단단하게 지키며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이길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물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를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 때문에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럴 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닭장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階伯)021021 계백(階伯) : 백제 의자왕대의 장군으로서 결사대 5천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본서 권47 열전7 階伯傳과 官昌傳에는 계백(階伯)으로,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는 해백(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의 관등은 달솔(達率)이었다. 한편 김정호의 『大東地志』 부여 寺院條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이라 하여 계백(階伯)은 성(姓)이고 이름은 승(升)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계백이 왕족 부여씨에서 분지되어 나온 성씨라는 견해(金周成, 1990), 이에 동의하며 한성도읍기에 개백현(皆伯縣)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분지되었으나 성씨는 사비도읍기에 형성되었다는 견해(盧重國, 1994; 강종원, 2000; 지원구, 2010) 등이 있다.
〈참고문헌〉
金周成, 1990, 「百濟 泗沘時代 政治史 硏究」,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盧重國,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木劦(木)氏를 중심으로-」, 『大丘史學』 48.
강종원, 2000, 「百濟 階伯의 身分과 政治的 性格」, 『湖西史學』 28, 호서사학회.
지원구, 2010, 「百濟 滅亡期 方領의 性格과 王姓의 分枝化」, 『百濟學報』 4, 백제학회.
닫기
을 보내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022022 황산(黃山) :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비정된다. 본서 권36 지리3 웅주 黃山郡條에는 “황산군은 본래 백제 황등야산군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의 연산현이다(黃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라고 적혀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7월조의 注에는 “어떤 책에는… 신라왕 춘추지가 병마를 거트리고 노수리의 산에서 주둔하였는데…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이다(或本云…新羅王春秋智率兵馬 軍于怒受利之山…怒受利山 百濟之東堺也)”라고 하여 신라군이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진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노수리산은 본서의 황산(黃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차지하는 넓은 들로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등을 포함한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三營을 설치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기다렸다. 계백이 3영을 설치한 곳은 산직리산성(장골산성), 웅치산성(곰치산성), 황령산성이라는 견해(洪思俊, 1967 77~78쪽), 연산리 배후의 매봉(청동리산성)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남쪽 3곳에 방어진영을 편성했다는 견해(이상훈, 2021, 85~114쪽) 등이 있다.
〈참고문헌〉
洪思俊, 1967, 「炭峴考」, 『歷史學報』 35・36, 역사학회.
이상훈, 2021,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서강인문논총』 60, 인문과학연구소.
닫기
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023023 또 당나라와 신라군사가 … 계백이 사망하였다 : 백제는 국경 부근에 위치한 탄현에 일차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였고, 그 배후에 해당되는 연산 일원의 황령산성, 깃대봉보루, 산직리산성, 국사봉보루, 모촌리산성, 외성리산성 등 1열 횡대로 늘어선 산성으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들 산성들을 통솔하기 위하여 함지산 밑에 황산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이 능선에 배치된 성곽이 뚫리면 수도 부여까지 거의 평지를 통해 일사천리로 밀리게 되기 때문에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成周鐸, 1974, 「大田地域 古代城址硏究」, 『百濟硏究』 5, 166~167쪽).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47 열전7 官昌傳과 階伯傳 참고.닫기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정방이 왼쪽 강변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쳤는데, 맞붙어 싸워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024024 정방이 왼쪽 강변으로 …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백제가 熊津江 어귀에 근거지를 두고 막았으나 定方이 진격하여 깨뜨리니 백제의 죽은 자가 수천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지러이 도망갔다”라고 하여 이 싸움에서 백제군사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적혀 있다.닫기 당나라 군사가 밀물을 타고 배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025025 곧장 도성 : 본 기사는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의 “直趨眞都城”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본서 권37 지리4에는 진도성(眞都城)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으로 나온다.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直趨眞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直趨其都城”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조에는 “直趨都城一舍止”라고 적혀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熊津江 어귀에서 백제 저항군을 격파한 당나라 군대가 곧 바로 그 도성으로 진격해 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감교본(勘校本)에서는 『資治通鑑』의 “其都城”에 따라 중종임신간본(中宗壬申刊本)의 ‘直趨眞都城’을 ‘直趨其都城’으로 고쳤다. 사료를 신빙하여 사비도성을 진도성(眞都城), 금마(익산)를 가도성(假都城)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주성, 2014, 「문헌사료로 살펴본 금마지역의 백제 왕궁리와 미륵사」, 『歷史敎育論集』 53, 역사교육학회.).닫기으로 달려가 30리[一舍]026026 30리[一舍] : 30리를 一舍라고 하는데, 군대가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425쪽).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未至二十餘里”로 나온다. 이때 당나라 군대와 신라 군대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사비도성에서 一舍 가량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의 충남 논산시 강경 부근에 해당한다(田中俊明, 2000, 「百濟後期 王都泗沘의 防禦體系」, 『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서경문화사, 140쪽).닫기 밖에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가 모두 막았으나 또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에 다가서니 왕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후회스럽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태자 효(孝)027027 태자 효(孝) : 의자왕의 아들이다. 효가 태자로 나오는 것은 본 기사뿐이고, 다른 자료에는 모두 융(隆)이 태자로 나온다. 한편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外王餘孝”,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小王孝”라고 적혀 있다. 의자왕대 태자에 대해서는 융(隆) 한명만 태자였다는 견해(李丙燾, 1977, 421쪽; 梁起錫, 1992, 140~153쪽), 효가 첫 번째 태자였다가 이후 왕비 은고(恩古)의 아들 융으로 교체되었다는 견해(金壽泰, 1992), 융이 원래 태자였으나 은고의 아들 효로 교체되었다는 견해(李道學, 2004, 95~107쪽; 노중국, 2003, 32쪽; 장인성, 2005, 217~219쪽) 등이 있다. 본서 기록에 따르면 융은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겨울 10월조의 注에는 “백제왕 의자, 그의 처 恩古, 아들 융”이라는 대목이 있으며, 그에 앞선 가을 7월조의 注에는 “태자 융”이라는 대목이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金壽泰, 1992,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變動」, 『韓國古代史硏究』 5, 한국고대사학회.
梁起錫, 1995, 「百濟 扶餘隆 墓誌銘에 대한 檢討」, 『國史館論叢』 62, 국사편찬위원회.
李道學, 2004,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 變動에 대한 檢討」, 『東國史學』 40, 동국사학회.
장인성, 2005, 「해동증자 백제 의자왕」, 『한국인물사연구』 4, 한국인물사연구소.
닫기
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028028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의자가 태자 융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義慈挾太子隆 走北鄙)”라고 적혀 있다. 의자왕은 백제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상좌평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거절하였으며, 의자왕의 여러 왕자들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나당연합군의 진영으로 가서 사죄를 청한 것도 거부되었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부여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하여 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의 웅진성으로 피난을 떠난 것이다.닫기 정방이 성을 둘러싸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029029 둘째 아들 태(泰) : 기록상 확인되는 의자왕의 아들은 효(孝)・태(泰)・융(隆)・연(演)・강신(康信) 등이다. 그 중 태는 의자왕의 둘째 아들이다. 의자왕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기록에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융과 태, 효와 연 형제가 서로 모계가 달랐다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92, 「7世紀 中葉의 東아시아」, 『百濟硏究』 22).닫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030030 태자의 아들 문사 : 문사(文思)는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嫡孫文思’, 『新唐書』 권220 百濟傳같은 책 권111 蘇定方傳에는 ‘義慈孫’,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융의 아들 문사(隆子文思)’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사(文思)의 아버지가 본 기사에는 효(孝), 『資治通鑑』에는 융(隆)으로 다르게 기재된 것은 의자왕의 태자를 본서는 효(孝), 『資治通鑑』은 융(隆)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2004년에 중국 산시성[陝西省] 푸핑현[富平縣]의 도굴당한 무덤에서 출토된 「부여씨부인 묘지명(扶餘氏夫人 墓誌銘)」에는 의자왕-扶餘隆-扶餘德璋-?(太妃)로 이어지는 가계가 적혀 있었으며, 이에 부여융에게 文思, 文宣, 德璋 등의 아들이 있었다고 추론한 견해가 있다(김영관, 2009, 「百濟 義慈王 曾孫女 太妃 扶餘氏 墓誌」, 『百濟學報』 1, 백제학회).닫기가 왕자 융031031 왕자 융 : 본서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4년(644)조에는 융을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있다.닫기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은 태자와 함께 나갔고, 숙부가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되었는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뒤따랐지만 태는 말리지 못하였다. 정방이 군사들에게 성가퀴를 넘어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히[窘迫] 성문을 열고 명령을 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032032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태자 융과 나머지 여러 성주가 모두 함께 보내졌다.(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餘諸城主皆同送款)“이라는 기록이 있고,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에는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其將禰植與義慈降)“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대장(大將) 예식(禰植)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항복 당시 대장 예식(禰植)은 달솔급의 웅진 방령(方領)이었다(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 그런데 2006년에 중국에서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禰植進 墓誌銘)」에는 예식이 옛 왕도 웅천(熊川) 출신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왕대에 좌평을 역임하였다는 대목이 있어 예식을 달솔급 웅진방령이 아니라 좌평급 대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李道學, 2007). 또 함께 발견된 「예군 묘지명(禰軍 墓誌銘)」의 ‘지난 현경 5년 관군이 본번을 평정한 날에 기미를 보고 변화를 알아서 칼을 차고 귀의할 곳을 알았다(去顯慶五年 官軍平本藩日 見機識變 杖劒知歸)’는 구절과 「예인수 묘지명(禰仁秀 墓誌銘)」의 ‘아들 식진은 벼슬을 물려받은 어진 사람이었다. 당이 하늘의 명을 받아 동쪽으로 조회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할 때 그 왕을 인도하여 고종황제에게 귀의하였다(子寔進世官象賢也 有唐受命東討不庭 卽引其王 歸義于高宗皇帝)’라는 구정이 있다. 이에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 의거하여 웅진 방령 예식이 웅진성으로 피난 온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군대에게 항복한 것으로 보는가 하면(盧重國, 1995, 57쪽; 김영관, 2001, 58~64쪽). 당나라군과 의자왕 사이에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견해(李道學, 2007, 79~80쪽), 의자왕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상황판단 하에 항복했다는 견해(양종국, 2018, 143쪽)와 더불어 상황 중심에 웅진방령인 예식진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박초롱, 2019, 20쪽) 등이 있다. 예씨 일족의 묘지명 및 연구 현황에 대해서는 최상기, 2014, 「「禰軍 墓誌」 연구 동향과 전망 –한중일 학계의 논의사항을 중심으로-」, 『木簡과 文字』 12 참조.
〈참고문헌〉
盧重國, 1995, 「百濟復興軍의 復興運動 硏究」, 『歷史의 再照明』, 소화.
김영관, 2001, 「滅亡 直後 百濟 遺民의 動向」, 『典農史論』 7, 서울市立大學校 國史學科.
김영관, 2007, 「百濟遺民 禰寔進 墓誌 소개」, 『新羅史學報』 10, 신라사학회.
李道學, 2007, 「「禰植進묘지명」을 통해 본 백제 禰氏 가문」, 『전통문화논총』 5, 한국전통문화학교.
양종국, 2018,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재검토의 필요성-」, 『先史와 古代』 55, 한국고대학회; 2018,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 –재검토의 필요성-」, 『한국고대사와 백제고고학』, 한국고대학회.
박초롱, 2019, 「禰氏 일족의 백제 이주와 성장」, 『木簡과 文字』 23, 한국목간학회.
닫기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033033 연(演) : 의자왕의 아들로서, 백제가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京師]034034 (당나라) 수도[京師] :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지금의 중국 섬서성 西安이다. 장안은 기원전 202년 한(漢) 고조가 처음 도읍으로 삼았으며, 그 뒤를 이은 惠帝(B.C.194~188)때 도성을 축조하였고, 이후 前趙・前秦・後秦・西魏・北周・隋・唐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 되었다.닫기로 보냈다.035035 정방이 … 12,807명을 수도로 보냈다 : 인원수에 대한 기사는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와 일치한다. 그러나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포로로 잡아간 숫자는 각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의자 및 태자 융, 소왕(小王) 효와 연 및 위장(僞將) 58인”,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의자와 융 및 소왕(小王) 효・연과 추장(酋長) 58인”,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는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2,000명”, 본서 권42 열전2 金庾信傳 中에는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20,000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조에는 “11월 1일에 장군 소정방 등에게 잡힌 백제의 왕 이하 태자 융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국변성(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십여 명을 조정에 바쳤다”,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그 왕 부여의자(扶餘義慈) 및 태자 융과 외왕(外王) 여효(餘孝)를 비롯한 13인, 그리고 대수령(大首領) 대좌평 사타천복(沙吒千福), 국변성 이하 7백여 인” 등으로 적혀 있다.닫기
나라는 본래 5부(部)036036 5부(部) : 전국을 5개 구역으로 나눈 사비시대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중부(中部)를 가리킨다. 여기의 부는 방(方)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5부는 5방과 같은 것이다. 이 部(方)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군관구(軍管區)로서 6~10개의 군(郡)을 포괄하였고, 또 소성(小城)으로 표현되는 현(縣)들을 통괄하였다. 部(方)의 장은 방령(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5부(五部)의 중심 치소는 방성(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百濟傳, 『北史』 권94 百濟傳『翰苑』 百濟傳에 인용된 『括地志』에 의해 방(方)과 방성(方城)의 명칭은 중방(中方)-고사성(古沙城), 동방(東方)-득안성(得安城), 남방(南方)-구지하성(久知下城; 卞城), 서방(西方)-도선성(刀先城; 力先城), 북방(北方)-웅진성(熊津城)이다. 방성은 대개 산성이며 1,200~7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5방제에 대한 학계의 견해 차이는 심하지 않지만, 5방제의 성립 시기와 위치, 방-군-성 사이의 통속 관계, 군장․도사와 같은 지방관의 성격 문제 등에서 아직 해명되지 않았거나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5방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서는 담로제와 5방제를 계기적 관계로 설정하고 웅진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견해(金英心, 1997a), 사비천도 전후로 보는 견해(盧重國, 1988; 金周成, 1992; 鄭載潤, 1992), 위덕왕대로 보는 견해(朴賢淑, 1997) 등이 제기되었다. 그 중 대체적으로 사비천도를 전후로 한 시기에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사비시대에는 일관되게 시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16관등제, 22부제, 왕도 5부제 등의 중앙통치체제의 정비와 군사적 측면에서의 지방의 통제력 강화와 수취 기반의 확대를 도모하는 목적에서 상위의 행정구획으로 5방제를 설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5방제의 운영체계에 대해서는 방-군-성 사이에 통솔관계가 설정되어 있었다는 견해(金周成, 1992; 鄭載潤, 1992), 이를 이원화하여 군정 부문에서는 비교적 철저히 통솔하였으나 민정부문에는 방이 군을 직접적으로 통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盧重國, 1988; 金英心, 1997b) 등이 있다. 그리고 방-군-성의 지방관을 방령(方領)-군장(郡長; 군령(郡令))-성주(城主; 도사(道使))로 설정하고 있는데, 지방관의 성격과 업무, 방좌(方佐)와 군장(郡長)의 정원, 도사(道使)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한편, 최근에는 『구당서』․『신당서』의 6부(部), 6방(方) 기사를 근거로 640년대 이후 백제가 새로이 확보한 가야고지 일대를 또 하나의 방으로 편제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박종욱, 2019, 75~80쪽).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今西龍, 1934, 「百濟五方五部考」,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金周成, 1992, 「백제 지방통치조직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재편」, 『國史館論叢』 35, 국사편찬위원회.
鄭載潤, 1992, 「熊津・泗沘 時代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韓國上古史學報』 10, 한국상고사학회.
朴賢淑, 1996, 「宮南池 출토 百濟 木簡과 王都 5部制」, 『韓國史硏究』 92, 한국사연구회.
朴賢淑,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英心, 1997a, 「6~7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 地方官을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1, 한국고대사학회.
金英心, 1997b,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상고사학회 편, 1998, 『百濟의 地方統治』, 學硏文化社.
박현숙, 2007, 「방-군-성 체제로의 정비」, 『백제문화사대계연구총서8-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박종욱, 2019, 「660년 백제의 영역과 加耶故地」, 『百濟學報』 29, 백제학회.
닫기
37군(郡)037037 37군(郡) :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의 하나로서 方(部) 아래의 조직단위이며 성(城)으로 표현되는 몇 개의 현(縣)을 통솔하였다. 군제(郡制)는 사비천도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2년(551)조에 보이는 ‘6군(郡)’은 성왕 때 군제(郡制)를 실시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군(郡)을 다스리는 관리가 『周書』 권49 百濟傳에는 군장(郡將),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543)조에는 군령(郡令)으로 적혀 있다. 군장(郡將)의 경우, 3명이 임명된 것이 특징인데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군장이 모든 군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방(方)에 소속된 6・7~10개의 군 중 중심이 되는 3개의 군에만 군장이 1인씩 존재하였고 나머지는 도사가 있었다는 견해(이근우, 1994), 각 군마다 군장 3인이 있었다는 견해(김영심, 1997) 등이 있다. 군장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군정・민정・사법 등 고유한 업무를 분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군장(郡將)은 덕솔이 맡는 것이 원칙이지만, 백제 말기에는 달솔이 맡는 경우도 생겨났다.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달솔로서 풍달군장(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본서 권44 열전4 黑齒常之傳). 한편,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군좌(郡佐)라는 묵서가 확인된 4호 목간이 있어 방령(方領) 아래의 방좌(方佐)처럼 군장(郡將) 아래에 군좌(郡佐)가 있었다는 추론이 제기되었다(金聖範, 2010; 尹善泰, 2012). 2012년경 새롭게 알려진 「진법자 묘지명(陳法子 墓誌銘)」에는 마련대군장(麻連大郡將), 마도군참사군(馬徒郡參司軍), 기모군좌관(旣母郡佐官), 품달군장(稟達郡將) 등의 군 이름과 관직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김영관, 2014, 92~94쪽; 정동준, 2014, 188~200쪽; 박지현, 2014, 97~102쪽), 대군장은 달솔, 참사군은 덕솔 관등을 지니고 있었고, 진법자는 좌관과 군장을 거쳐 사군(司軍)으로 옮겼는데 은솔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지방통치에서 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으며 다양한 직제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金英心,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聖範, 2010, 「羅州 伏岩里 木簡의 判讀과 釋讀」, 『木簡과 文字』 5, 한국목간학회.
尹善泰, 2012, 「羅州 伏岩里 出土 百濟木簡의 判讀과 用途 分析-7세기초 백제의 지방지배와 관련하여-」, 『百濟硏究』 56,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김영심, 2014, 「遺民墓誌로 본 고구려, 백제의 官制」, 『韓國古代史硏究』 75, 한국고대사학회.
김영관, 2014, 「백제 유민 진법자 묘지명 연구」, 『백제문화』 50,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정동준, 2014, 「「陳法子 墓誌銘」의 검토와 백제 관제」, 『韓國古代史硏究』 74, 한국고대사학회.
박지현, 2014, 「〈陳法子墓誌銘〉의 소개와 연구현황 검토」, 『木簡과 文字』 12, 한국목간학회.
닫기
200성(城)038038 200성(城) : 백제의 지방통치조직 중 군(郡) 아래의 하부기간조직으로서 현(縣)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翰苑』 百濟傳에는 “郡縣置道使”라고 하여 군(郡) 아래에 현(縣)이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어 성과 현이 서로 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현)을 다스린 사람을 성주(城主)(『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543)) 또는 도사(道使)(『翰苑』 百濟傳)라고 하였는데, 도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군이나 현 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80; 李根雨, 1997), 군 아래의 현에 파견된 지방관이라는 견해(金周成, 1992; 金英心, 1997), 군과 현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는 군현에 도사가 파견되었다가 점차 현으로 축소・분화되어갔다는 견해(金壽泰, 1997) 등이 있다. 그런데 지방관이 파견된 성의 수에 대해 본 기사는 200성이라 하였지만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250현으로 새겨져 있고 본서 권36 지리3에는 104현으로 적혀 있어 숫자가 조금씩 다르다.
〈참고문헌〉
武田幸男, 1980, 「六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4, 學生社.
金周成, 1992, 「백제 지방통치조직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재편」, 『國史館論叢』 35.
金壽泰, 1997, 「百濟의 地方統治와 道使」,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金英心,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李根雨, 1997, 「百濟의 方郡城制 관련사료에 대한 재검토」, 『韓國 古代의 考古와 歷史』, 學硏文化社.
닫기
760,000호(戶)039039 760,000호(戶) : 백제 멸망 당시의 호수(戶數)이다. 『舊唐書』 권199 百濟傳, 『新唐書』 권220 百濟傳, 『通典』 권185 百濟條에도 ‘七十六萬’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으로 새겨져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1 弁韓・百濟條에는 “백제의 전성기에 152,300호”라는 대목이 있다.닫기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5도독부040040 5도독부 :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5개의 도독부로서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를 가리킨다. 당나라가 도독부를 설치한 뒤 곧바로 백제부흥군이 크게 일어나서 웅진도독부를 제외하고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본서 권37 잡지 지리6에는 5도독부가 보이지 않고 대신 1도독부-7주(州)만 적혀 있다. 이에 기록에 따라 660년부터 1도호부 5도독부체제였다고 보기도 하지만(方香淑, 1994), 기록과 달리 처음에는 웅진도독부만 설치되었으며, 그것조차 662년에야 실질적으로 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김수미, 2006). 5도독부 가운데 위치가 분명한 곳은 웅진도독부(지금의 충남 공주시)와 덕안도독부(지금의 충남 논산군 은진면) 정도이고 나머지는 불분명하다(鄭載潤, 2002). 1도독부체제에서 웅진도독부의 치소는 사비에 있었으며, 672년 신라가 사비에 소부리주를 설치하면서 웅진도독부의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견해도 있다(박지현, 2013). 한편,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백제를 모두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6주(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근거가 불확실하여 믿기 어렵다.
〈참고문헌〉
方香淑, 1994, 「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鄭載潤, 2002, 「新羅의 百濟故地 점령 정책」, 『國史館論叢』 98.
김수미, 2006, 「百濟府城의 실체와 熊津都督府 체제로의 전환」, 『歷史學硏究』 28, 湖南史學會.
박지현, 2013, 「熊津都督府의 성립과 운영」, 『韓國史論』 59,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닫기
로 나누어 두어 각각 주(州)・현(縣)을 다스리게 하고041041 5도독부를 … 다스리게 하고 : 같은 내용이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 나온다. 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5도독부 37주(州) 250현(縣)을 두었다”고 하여 주와 현의 수가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한편, 5도독부제가 폐지된 후 웅진도독부 아래에 두어진 주(州)・현(縣)의 수에 대해 본서 권37 지리4 도독부조에는 1도독부-7주-51현으로 되어 있다(方香淑, 1994; 김수미, 2008).
〈참고문헌〉
方香淑, 1994, 「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김수미, 2008, 「扶餘隆 도독 체제 웅진도독부의 통치구조」, 『歷史學硏究』 32, 湖南史學會.
닫기
,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042042 자사(刺史) : 주(州)의 장관을 가리킨다. 자사는 한(漢) 무제(武帝)가 부자사(部刺史)를 두고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군국(郡國)을 감찰하도록 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위진(魏晉)시대에는 요충지의 주(州)에 임명한 도독(都督)이 자사를 겸하게 하였다(和田淸, 1932,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65~67쪽 및 98~100쪽). 唐代의 지방 통치조직은 주현제(州縣制)였는데 주의 장관을 자사라고 하였다. 관품은 상주(上州)자사는 종3품, 중주(中州)자사는 정4품上, 하주(下州)자사는 정4품下이었다.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주현제(州縣制)를 백제고지에 시행하면서 주에 자사를 두었다. 본서 권37 지리4에 백제 멸망후 당이 백제고지에 1도독부-7주-51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닫기・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郎將)043043 낭장(郎將) :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유인원의 직함이 행좌효위낭장(行左驍衛郞將)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낭장은 좌효위낭장을 말한다. 좌효위에는 좌낭장(左郞將) 1명과 우낭장(右郞將) 1명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관품(官品)은 분명하지 않으나 5부(府) 낭장의 관품이 정5품上이어서 그에 준할 것으로 보인다(『新唐書』 권49 백관4 상 16위 및 『舊唐書』 권44 직관3 武官條 참조).닫기 유인원(劉仁願)044044 유인원(劉仁願) :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이다. 자(字)는 사원(士元)이며, 오늘날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위치한 雕陰 大斌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표기대장군의동삼사로서 개국공에 오르고, 아버지는 도독좌무위장군·우효위대장군·승하2주(都督左武衛將軍右驍衛大將軍勝夏二州)에 오를 정도로 혁혁한 가문 출신이다. 그는 이러한 가문의 훈업으로 홍문관 학생이 된 이후 고구려 정벌(645), 연타(延陀) 정벌(647), 요동 정벌(648), 철륵(鐵勒) 위무(651),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정벌(654), 토욕혼(吐谷渾)과 토번(吐藩) 위무(659)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어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그때의 직함이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우일군총관·선위장군·행좌효위낭장·상주국(右一軍摠管宣威將軍行左驍衛郞將上柱國)으로 적혀 있다. 유인원은 백제가 멸망한 뒤 소정방을 대신하여 사비도성의 도호(都護)로서 당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그 후 웅진도독부 체제로 개편하였을 때 웅진도독이 되어 다스리다가 663년에 귀국하였다. 664년 10월에 다시 웅진도독이 되었고, 665년 8월에 유인궤와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회맹하는 의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근대 이후 충남 부여군의 부소산성에서 유인원이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가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유인원의 행적은 『舊唐書』와 『新唐書』에 입전되지 않았다(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3~64쪽).닫기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한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045045 왕문도(王文度) : 당나라 사람으로서 660년 백제 공격에 참전하였다가 죽었다. 그의 행적은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책부원구』․『삼국사기』 등에 부분적으로 간단히 적혀 있으며,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그의 아버지 왕윤(王贇)의 묘지석을 통해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拜根興, 2008, 206~216쪽; 2021, 316~320쪽). 그는 수나라 때인 605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35세 무렵인 640년경 곽주자사(廓州刺史)에 임명되고 654년에는 종3품 우무후장군상주국진양현개국후(右武侯將軍上柱國晉陽縣開國侯)를 지냈다. 당 현경(顯慶) 초년(655~657)에 부대총관(副大摠管)이 되어 서돌궐 공격에 나섰다가 소정방 등 능력있는 자의 공로를 시기하고 황제 조칙을 고쳐서 속였으며 군대를 동원해 포로를 죽이고 재물을 약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관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660년 9월 당 고종이 그를 좌위중랑장웅진도독(左衛中郎將熊津都督)으로 삼아 백제에 파견하였는데, 바다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를 55~60세로 추정한다(拜根興(장원섭역), 2021, 319쪽).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는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태종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고 갑자기 죽었다고 적혀 있다. 왕문도의 직함에 대해서도 본 기사와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좌위낭장(左衛郞將),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우위낭장(右衛郞將), 『舊唐書』 권84 劉仁軌傳과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및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龍朔 원년(661) 3월조에는 좌위중낭장(左衛中郞將)으로 적혀 있는 등 기록마다 차이를 보인다(노중국, 2003, 64~65쪽).
〈참고문헌〉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拜根興, 2008, 「唐將王文度事迹考述-以與新羅關係爲中心-」, 『唐史論叢』 10, 三秦出版社.
拜根興, 2020, 「一人兩志:隋代將領王贇墓志考釋-兼論王贇之子初唐名將王文度-」, 『史學集刊』 2020-6,
拜根興(張元燮譯), 2021, 「一人兩誌: 隋代 王贇墓誌 연구-初唐 名將 王文度와 함께」, 『木簡과 文字』 26, 한국목간학회.
닫기
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남은 무리들을 달래게 하였다.
정방이 포로들을 바치니 고종이 꾸짖고는 용서해 주었으며,046046 고종이 꾸짖고는 용서해 주었으며 :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11월조에는 “11월 무술 초하루에 임금이 … 풀어주었다(十一月 戊戌朔 上御則天門樓 受百濟俘 自其王義慈以下 皆釋之)”라고 적혀 있다.닫기 왕이 병으로 죽자047047 왕이 병으로 죽자 : 의자왕은 644년 당나라에 반위(反胃)관련 전문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큰 병을 앓았으며(朴峻亨・徐榮敎, 2014),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리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져 국정을 왕후인 은고(恩古)에게 의지하였고,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먼 거리를 끌려가는 동안 병이 악화되어 금세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노중국, 2018 496쪽).
〈참고문헌〉
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
朴峻亨・徐榮敎, 2014, 「『文館詞林』에 보이는 蔣元昌과 蔣氏家門 醫官」, 『歷史學報』 222.
닫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048048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당나라의 문산계(文散階)에 속하는 벼슬이다. 당의 문산계(文散階)는 29등급으로 되어 있는데, 금자광록대부는 정3품이다.닫기 위위경(衛尉卿)049049 위위경(衛尉卿) : 당나라 위위시(衛尉寺)의 장관으로서 관품은 종3품이다. 위위시는 기계문물(器械文物)과 궁문위둔병(宮門衛屯兵) 등을 관장하였다.닫기을 내려주고 옛 신하들이 문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050050 손호(孫皓) :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마지막 황제(재위 264~280)로서 자는 원종(元宗)・호종(皓宗)이며 별명은 팽조(彭祖)이다.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정후(烏程侯)에 책봉되었으며, 제3대 황제인 손휴(孫休)의 뒤를 이어 264년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진(晋)왕조가 개창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에서 우창[武昌]으로 잠시 이전하였다.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고 주색에 빠져 폭정을 하였으며,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쳐들어온 晋나라 군대에게 항복하였다(280년). 오나라는 4대 58년으로 멸망하였고, 손호는 항복한 뒤 귀명후(歸命侯)의 작위를 받았으며 나중에 서진(西晋)의 수도 뤄양[洛陽]에서 죽었다.닫기와 진숙보(陳叔寶)051051 진숙보(陳叔寶) : 중국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재위 582~589)로서. 高宗의 적장자(嫡長子)이며 자는 원수(元秀)이다. 陳나라 大建 원년(569)에 황태자가 되었고, 대건 14년(582)에 高宗이 죽자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589년 隋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됨으로써 陳은 멸망하였다. 흔히 陳의 후주(後主)라고 불리며,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닫기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고 아울러 비석을 세우게 하였으며, 융에게 사가경(司稼卿)052052 사가경(司稼卿) : 사가시(司稼寺)의 장관으로서 관품은 종3품이다. 사가시는 창고의 일을 관장한 사농시(司農寺)를 唐 高宗 龍朔 2년(662)에 개칭한 것이다.닫기을 제수하였다.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인궤(劉仁軌)053053 유인궤(劉仁軌) : 중국 당나라 太宗~高宗代의 장군으로서 생몰연대는 603∼686년이다. 자는 정칙(正則)이며, 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속한 변주(汴州) 웨이스[尉氏]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해 독학으로 두루 통달하게 되었으며, 하남도안무대사(河南道按撫大使) 임괴(任瓌)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 貞觀 15년(641)에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으며, 660년 당 고종이 백제를 공격할 때 수군을 감독 통솔하여 군량을 운송하는 일을 맡았다가 풍랑을 만나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에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곧 실각당하고 백의종군하였다. 그 후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사비성을 진수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가 위험에 처하자 고종은 유인궤를 발탁해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아 왕문도를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유인궤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뒤 검교웅진도독(檢校熊津都督)으로서 당나라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665년 8월에 유인원과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맹세하도록 만든 뒤 당나라로 돌아갔다. 『舊唐書』 권84 劉仁軌傳에는 그가 665년 신라·백제·탐라·왜의 추장을 거느리고 태산 봉선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麟德二年 封泰山 仁軌領新羅及百濟·耽羅·倭四國酋長赴會). 668년에는 웅진도안무대사겸패강도총관(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이 되어 이적(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에 주둔하며 옛 고구려 땅을 다스렸다. 669년 당나라로 돌아간 뒤 670년에 농주자사, 674년에 계림도총관으로서 신라에 파견되었고, 이후 토번(吐藩)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舊唐書』 권84 劉仁軌傳, 『新唐書』 권108 劉仁軌傳 등 그의 열전이 전한다(瀧川政次郞, 1984; 노중국, 2003, 60~62쪽).
〈참고문헌〉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瀧川政次郞, 1984, 「劉仁軌傳」上・中・下, 『古代文化』 36・37・38.
닫기
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註 001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 좌무위(左武衛)는 중국 唐나라의 16위 중의 하나이며, 궁궐의 숙위(宿衛)와 오부(五府) 및 외부(外府)를 통괄하였다. 좌무위에 설치된 무관(武官)으로는 상장군(上將軍) 1인(종2품), 대장군(大將軍) 1인(정3품), 장군(將軍) 2인(종3품)이 있었고, 그 아래에 장사(長史) 1인(종6품상) 등이 있었다. 『新唐書』 권49 백관4 16衛조 참조. 한편,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총사령관 소정방(蘇定方)의 관직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199 百濟傳『新唐書』 권220 百濟傳에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적혀 있으며,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新唐書』 권3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으로 나온다. 본서는 후자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
註 002
소정방(蘇定方) : 중국 당나라 때의 장군으로서 생몰연대는 592~667년이다. 중국 기주(冀州) 무읍(武邑) 출신이며 이름은 열(烈), 자(字)는 정방(定方)이다. 그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도적 무리에 맞서 싸워 신망을 얻었으며, 이후 唐 太宗 貞觀 초에 광도부절충(匡道府折衝)이 되었고, 高宗 때에는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정지절(程知節)을 따라 하로(賀魯)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뒤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이 되고 형국공(邢國公)에 봉해졌다. 얼마 후 돌궐지역 정벌에 참여한 공으로 형주(邢州)거록진읍(鉅鹿眞邑) 5백호의 식읍을 더하여 받았다. 660년 3월에는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3만의 당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山東半島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으며, 의자왕과 태자 융(隆)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661년 5월 다시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 되어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그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현존하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의 1층 탑신부에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를 새겼는데, 백제를 공격할 당시의 소정방의 직함이 “사지절신구우이마한웅진등14도행군대총관·좌무위대장군·상주국·형국공(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左武衛大將軍上柱國邢國公)”으로 적혀 있다. 소정방의 행적에 대해서는 『舊唐書』 권83 蘇定方傳『新唐書』 권11 蘇定方傳 및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58~60쪽 참조.
註 003
신구도(神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받은 직함으로서,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도 같은 관명이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소정방의 직함이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 『新唐書』 권3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에는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사지절신구우이마한웅진등14도행군대총관(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7월조에 인용된 고려사문(高麗沙門) 도현(道顯)의 『日本世記』에는 ‘大將軍蘇定方’으로만 나온다. 신구도(神丘道)는 唐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정한 공격로의 하나이다. 신구(神丘)는 연연산(燕然山)을 높여 말한 것인데(『文選』 권56 封燕然山名條), 연연산(燕然山)은 외몽골 삼음약안부(三音若顔部) 항애산(杭愛山)의 옛 이름으로서 後漢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永元 원년(89)에 흉노를 정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後漢書』 권23 竇融傳附 竇憲傳). 따라서 신구도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정벌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길을 수식하고자 붙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 사비도성의 서쪽지역을 神丘라고 불렀다고 보기도 한다(尹善泰, 2006, 「百濟 泗沘都城과 '嵎夷' - 木簡으로 본 泗沘都城의 안과 밖 -」, 『東亞考古論壇』 2, 충청문화재연구원).
註 004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 당나라에서 좌효위에 설치된 종3품 장군직이다. 효위는 원래 효기(驍騎)로 불리다가 수나라 때 효위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당나라도 그에 따라 효위부(驍衛部)를 두었다. 좌효위는 16衛의 하나로서 궁궐 숙위를 담당하였으며, 장군은 2명이었고, 관장 업무와 인적 구성은 좌무위(左武衛)와 같았다. 『舊唐書』 권44 직관3 左右驍衛 및 『新唐書』 권48 백관4 상 16衛 참조.
註 005
유백영(劉伯英) :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장군으로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유백영의 직함에 대해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좌위장군(左衛將軍),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부대총관·관군대장군·△△△위장군·상주국·하박공(副大摠管冠軍大將軍△△△衛將軍上柱國下博公)’,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조와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 적혀 있다. 이때 백제를 공격한 당나라 장수에 대해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소정방만 적혀 있으나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소정방뿐만 아니라 유백영, 풍사귀, 방효태(방효공) 등이 더 기록되어 있다.
註 006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 당나라에서 우무위(右武衛)에 설치된 종3품 장군직으로서, 궁궐 숙위를 담당하였다. 우무위는 16위의 하나였으며, 장군은 2명이었다.
註 007
풍사귀(馮士貴) :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로서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지휘하였다.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도 풍사귀의 직함이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나온다.
註 008
효공(龐孝公) :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로서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전쟁에 참여하였다.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로 적혀 있다.
註 009
군사 130,000명 : 백제를 공격해 온 당나라 군사의 숫자인데,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조에도 “水陸13萬△△伐百濟”로 적혀 있다. 그러나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는 “신라 기록에는 군사 122,711, 배 1,900척이라고 하였는데, 당나라 역사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라고 하여 조금 다르지만 더 구체적인 숫자가 적혀 있다.
註 010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摠管) :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가 신라 태종무열왕에게 준 지위이다. 동일한 관명이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 『新唐書』 권3 高宗 顯慶 5년(660) 3월조,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조에도 실려 있다. 우이도(嵎夷道)는 당나라 군대의 진격로 중 하나인데, ‘우이(嵎夷)’라는 명칭은 『尙書』 요전(堯典)의 “宅嵎夷曰暘谷”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본서 권37 지리4 都督府一十三縣條에는 우이현(嵎夷縣)이 나온다. 「예군 묘지명(禰軍 墓誌銘)」에는 예군이 웅진 우이인(熊津嵎夷人)으로 적혀 있다. 2001년 부여 관북리유적 연지에서 출토된 286번 목간에 ‘嵎夷’라는 붓글씨가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백제 때 사비도성의 동쪽 구역의 지명이 우이였다고 보기도 한다(尹善泰, 2006, 「百濟 泗沘都城과 '嵎夷' - 木簡으로 본 泗沘都城의 안과 밖 -」, 『東亞考古論壇』 2, 충청문화재연구원).
註 011
성산(城山) :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서 지금도 성산각(城山角)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가 배를 타고 출발한 지점이 본서 권5 신라본기5에는 萊州로 적혀있으나, 본서 권28 백제본기6 및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舊唐書』 권83 蘇定方傳·『新唐書』 권111 蘇定方傳권220 百濟傳『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조 등에는 모두 성산(城山)으로 적혀 있다. 이에 성산(城山)을 萊州에 속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萊州는 수당시대 이래로 주요한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598년 수나라 文帝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할 때 주라후(周羅候)가 이끄는 수군(水軍)이 평양성으로 가기 위해 출발한 곳이었고, 612년과 614년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는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水軍)의 전진기지였다. 645년 장양(張亮)이 거느린 당나라 수군이 500척의 전선(戰船)에 4만여 명을 싣고 고구려 공격에 나선 곳이었으며, 647년 우진달(牛進達)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당나라 수군이 출발한 곳이었고, 648년 설만철(薛萬徹)이 이끄는 3만여 명의 수군이 출발한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백제 원정에서도 13만 대군이 萊州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발해(渤海) 연안에 위치한 萊州에 당나라의 대규모 조선(造船)기지가 있었고, 대규모 수군 전단을 정박시키기에 적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萊州의 관할구역은 山東半島 동쪽 끝까지 이르렀으며, 山東半島 중단 발해만 연안의 덩저우[登州, 산둥성[山東省] 펑라이시[蓬萊市])에는 수군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나라 수군은 고구려로 출정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산동성 등주에 전선(戰船)을 집결시켜 출정을 준비한 후 山東半島 동쪽 끝의 성산(城山)을 거쳐 바다를 건넌 것으로 볼 수 있다(김영관, 2007,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235~237쪽).
註 012
덕물도(德物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비정된다. 덕적군도는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와 같은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당나라 수군은 덕적도 남쪽 소야도에 주둔하였으며, 소야도라는 섬이름은 소정방이 상륙한 곳이라는 전설이 현지에 전한다(김영관, 1999,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68쪽).
註 013
소정방이 … 덕물도에 이르니 : 이 부분이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 『新唐書』 권220 百濟傳『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웅진(熊津) 하구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7월조의 주(注)에는 당나라 수군이 미자진(尾資津)에 이른 것으로 적혀 있는데, 미자진을 금강하구 즉 기벌포로 보는 견해도 있고, 충남 보령군 웅천면의 미조포로 보는 견해도 있다(坂本太郞 외, 1967, 『日本書紀(下)』, 岩波書店, 東京, 345쪽의 頭注30).
註 014
정예 군사 50,000명을 거느리고: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6월조에는 진주(眞珠)・천존(天存)・품일(品日)・흠춘(欽春) 등 김유신과 함께 출정한 장군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註 015
(당나라) 고종이 … 나아가게 하였다 :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계속 실패하자 신라의 주장을 받아들여 백제를 먼저 멸망시킨 뒤 고구려를 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던 중 659년 4월 신라가 김인문을 보내 백제로 출병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나라가 출병을 결정한 것은 황산전투에서 전사한 장춘과 파랑의 영혼이 나타나 당의 파병 소식을 알려주었다고 한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6년(659) 겨울10월조에 의거해 볼 때 659년 10월로 추정된다(김영관, 2007, 230쪽). 당의 출병 소식은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곧바로 신라에 알려지지 않다가 이듬해 660년 3월에 공식적으로 신라에 통보한 것으로 보인다(李昊榮, 1997, 184쪽). 659년 4월 청병사로 당에 건너간 신라의 사절단은 당의 출병 결정 소식과 출격 명령을 받아 당의 장안에서 660년 3월에 출발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신라로 돌아왔다. 또,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5년(659) 7월조에는 659년에 왜의 遣唐使로서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이키노무라지하카토코(伊吉連博德)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견당사 일행이 7월 3일 難波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윤10월 29일 천자가 머물던 東京(洛陽)에 이르니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벌하므로 왜 사신단은 동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하며 西京 특별한 곳에 가두어서 여러 해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李昊榮, 1997, 『新羅三國統合과 麗·濟 敗亡原因硏究』, 서경문화사.
김영관, 2007,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註 016
상영(常永) : 백제 의자왕대의 고위 관료이다.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때 백제의 대책회의에서 속전속결을 반대하였는데 그때 그의 관등은 달솔이었다. 그 뒤 660년 7월 계백이 거느린 결사대와 함께 황산(黃山)에서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때 그의 관등은 좌평으로 나온다. 이에 그가 출전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했다고 보기도 한다.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 따르면, 그는 신라군에 항복한 뒤 660년 11월에 신라 무열왕으로부터 7등급 일길찬의 관등과 총관(摠管)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註 017
흥수(興首) : 백제 의자왕 때의 좌평으로서 귀양살이 중에도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충신으로 꼽힌다. 성충과 함께 의자왕의 즉위 초 왕권 강화를 위해 적극 노력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金壽泰, 1992,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變動」, 『韓國古代史硏究』 5, 66쪽). 충남 부여군이 세운 삼충사(三忠祠)에 성충・계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註 018
고마미지의 현(古馬彌知縣) : 본서 권36 지리3 무주 寶城郡條에 “마읍현(馬邑縣)은 본래 백제 고마지현(古馬知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었으며 지금의 수령현(遂寧縣)이다”라고 한 기사가 있고, 『新增東國輿地勝覽』 長興都護府조에는 遂寧廢縣이 있으므로 장흥군 장흥읍 일원에 비정한다. 장흥읍 외에 부산면・안량면・유치면 지역도 포함되는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마읍현으로 고쳐 보성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이와는 달리 충남 서천군 화양면 고마리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洪思俊, 1970, 「百濟地名考-大王浦와 古馬彌知縣-」, 『百濟硏究』 창간호).
註 019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 하구를 가리킨다.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웅진구(熊津口)”,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는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 『日本書紀』 권27 天智紀 2년(663)조에는 白村江 등으로 달리 기재되어 있다. 이에 당군이 진입한 백강 즉 기벌포에 대해 종래 백강과 웅진강을 별개의 곳으로 보고, 백강을 안성천 하구의 백석포로 보는 견해(金在鵬, 1981), 부안 줄포(茁浦)로 보는 견해(盧道陽, 1980), 부안 동진강(東津江)으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24; 全榮來, 1976; 李鍾學, 2004), 대천만으로 보는 견해(이재준, 2019)도 있다. 그러나 백강과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를 가리키며 웅진강구와 같은 곳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김영관, 2007; 이효원, 2020). 흔히 백강은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웅진강은 당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이해한다(沈正輔, 1988; 서정석, 2004). 또한 웅진강은 지금의 공주 부근을 흐르는 금강에 대한 명칭이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으로 보기도 한다(淺川伯敎, 1930). 당군이 상륙한 곳은 금강 하구로서 기벌포, 지화포(只火浦), 백강(白江), 장암 등으로 불리었으며, 지금의 충남 서천지역에 해당한다. 금강 하구는 물길을 따라 사비도성으로 바로 진군할 수 있는 곳이므로 당나라 수군이 상륙하기에 군사전략상 가장 합리적인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김영관, 2007).
〈참고문헌〉
小田省吾, 1924, 「朝鮮上世史」 『朝鮮史講座』 1, 朝鮮總督府.
淺川伯敎, 1930, 「夫餘白馬江」 『日本地理大系』 12 朝鮮篇, 改造社.
全榮來, 1976, 『周留城・白江 位置比定에 관한 新硏究』, 扶安郡.
盧道陽, 1980, 「百濟周留城考」 『明知大論文集』 12, 明知大學.
金在鵬, 1981, 「全義 周留城 考證」, 『燕岐地區古蹟硏究調査報告書 -全義篇-』.
沈正輔, 1988, 「中國側史料를 통해 본 白江의 位置問題」, 『震檀學報』 66.
沈正輔, 1989, 「「白江」의 位置에 대하여」, 『韓國上古史學報』 2.
서정석, 2004, 「백제 白江의 위치」, 『白山學報』 69.
李鍾學, 2004, 「周留城・白江의 位置比定에 관하여」, 『軍史』 52.
김영관, 2007,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로와 금강」, 『백제와 금강』, 서경문화사.
이재준, 2019, 「군사적 관점에서 본 주류성과 백강의 위치」, 『韓國古代史探究』 31.
이효원, 2020, 「백제 부흥운동기 주류성 위치 비정 연구」, 『백제학회 제39회 정기학술회의』.
註 020
탄현(炭峴) : 침현(沈峴) 또는 진현(眞峴)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3년(501)조 각주 참조.
註 021
계백(階伯) : 백제 의자왕대의 장군으로서 결사대 5천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본서 권47 열전7 階伯傳과 官昌傳에는 계백(階伯)으로,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에는 해백(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의 관등은 달솔(達率)이었다. 한편 김정호의 『大東地志』 부여 寺院條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이라 하여 계백(階伯)은 성(姓)이고 이름은 승(升)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계백이 왕족 부여씨에서 분지되어 나온 성씨라는 견해(金周成, 1990), 이에 동의하며 한성도읍기에 개백현(皆伯縣)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분지되었으나 성씨는 사비도읍기에 형성되었다는 견해(盧重國, 1994; 강종원, 2000; 지원구, 2010) 등이 있다.
〈참고문헌〉
金周成, 1990, 「百濟 泗沘時代 政治史 硏究」,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盧重國,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木劦(木)氏를 중심으로-」, 『大丘史學』 48.
강종원, 2000, 「百濟 階伯의 身分과 政治的 性格」, 『湖西史學』 28, 호서사학회.
지원구, 2010, 「百濟 滅亡期 方領의 性格과 王姓의 分枝化」, 『百濟學報』 4, 백제학회.
註 022
황산(黃山) :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비정된다. 본서 권36 지리3 웅주 黃山郡條에는 “황산군은 본래 백제 황등야산군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의 연산현이다(黃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라고 적혀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7월조의 注에는 “어떤 책에는… 신라왕 춘추지가 병마를 거트리고 노수리의 산에서 주둔하였는데…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이다(或本云…新羅王春秋智率兵馬 軍于怒受利之山…怒受利山 百濟之東堺也)”라고 하여 신라군이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진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노수리산은 본서의 황산(黃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차지하는 넓은 들로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등을 포함한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三營을 설치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기다렸다. 계백이 3영을 설치한 곳은 산직리산성(장골산성), 웅치산성(곰치산성), 황령산성이라는 견해(洪思俊, 1967 77~78쪽), 연산리 배후의 매봉(청동리산성)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남쪽 3곳에 방어진영을 편성했다는 견해(이상훈, 2021, 85~114쪽) 등이 있다.
〈참고문헌〉
洪思俊, 1967, 「炭峴考」, 『歷史學報』 35・36, 역사학회.
이상훈, 2021,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서강인문논총』 60, 인문과학연구소.
註 023
또 당나라와 신라군사가 … 계백이 사망하였다 : 백제는 국경 부근에 위치한 탄현에 일차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였고, 그 배후에 해당되는 연산 일원의 황령산성, 깃대봉보루, 산직리산성, 국사봉보루, 모촌리산성, 외성리산성 등 1열 횡대로 늘어선 산성으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들 산성들을 통솔하기 위하여 함지산 밑에 황산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이 능선에 배치된 성곽이 뚫리면 수도 부여까지 거의 평지를 통해 일사천리로 밀리게 되기 때문에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成周鐸, 1974, 「大田地域 古代城址硏究」, 『百濟硏究』 5, 166~167쪽).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47 열전7 官昌傳과 階伯傳 참고.
註 024
정방이 왼쪽 강변으로 …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백제가 熊津江 어귀에 근거지를 두고 막았으나 定方이 진격하여 깨뜨리니 백제의 죽은 자가 수천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지러이 도망갔다”라고 하여 이 싸움에서 백제군사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적혀 있다.
註 025
곧장 도성 : 본 기사는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의 “直趨眞都城”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본서 권37 지리4에는 진도성(眞都城)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으로 나온다.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直趨眞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直趨其都城”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조에는 “直趨都城一舍止”라고 적혀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熊津江 어귀에서 백제 저항군을 격파한 당나라 군대가 곧 바로 그 도성으로 진격해 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감교본(勘校本)에서는 『資治通鑑』의 “其都城”에 따라 중종임신간본(中宗壬申刊本)의 ‘直趨眞都城’을 ‘直趨其都城’으로 고쳤다. 사료를 신빙하여 사비도성을 진도성(眞都城), 금마(익산)를 가도성(假都城)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주성, 2014, 「문헌사료로 살펴본 금마지역의 백제 왕궁리와 미륵사」, 『歷史敎育論集』 53, 역사교육학회.).
註 026
30리[一舍] : 30리를 一舍라고 하는데, 군대가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425쪽).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未至二十餘里”로 나온다. 이때 당나라 군대와 신라 군대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사비도성에서 一舍 가량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의 충남 논산시 강경 부근에 해당한다(田中俊明, 2000, 「百濟後期 王都泗沘의 防禦體系」, 『사비도성과 백제의 성곽』, 서경문화사, 140쪽).
註 027
태자 효(孝) : 의자왕의 아들이다. 효가 태자로 나오는 것은 본 기사뿐이고, 다른 자료에는 모두 융(隆)이 태자로 나온다. 한편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外王餘孝”,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小王孝”라고 적혀 있다. 의자왕대 태자에 대해서는 융(隆) 한명만 태자였다는 견해(李丙燾, 1977, 421쪽; 梁起錫, 1992, 140~153쪽), 효가 첫 번째 태자였다가 이후 왕비 은고(恩古)의 아들 융으로 교체되었다는 견해(金壽泰, 1992), 융이 원래 태자였으나 은고의 아들 효로 교체되었다는 견해(李道學, 2004, 95~107쪽; 노중국, 2003, 32쪽; 장인성, 2005, 217~219쪽) 등이 있다. 본서 기록에 따르면 융은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 겨울 10월조의 注에는 “백제왕 의자, 그의 처 恩古, 아들 융”이라는 대목이 있으며, 그에 앞선 가을 7월조의 注에는 “태자 융”이라는 대목이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金壽泰, 1992,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變動」, 『韓國古代史硏究』 5, 한국고대사학회.
梁起錫, 1995, 「百濟 扶餘隆 墓誌銘에 대한 檢討」, 『國史館論叢』 62, 국사편찬위원회.
李道學, 2004, 「百濟 義慈王代의 政治 變動에 대한 檢討」, 『東國史學』 40, 동국사학회.
장인성, 2005, 「해동증자 백제 의자왕」, 『한국인물사연구』 4, 한국인물사연구소.
註 028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의자가 태자 융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義慈挾太子隆 走北鄙)”라고 적혀 있다. 의자왕은 백제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상좌평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거절하였으며, 의자왕의 여러 왕자들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나당연합군의 진영으로 가서 사죄를 청한 것도 거부되었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부여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하여 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의 웅진성으로 피난을 떠난 것이다.
註 029
둘째 아들 태(泰) : 기록상 확인되는 의자왕의 아들은 효(孝)・태(泰)・융(隆)・연(演)・강신(康信) 등이다. 그 중 태는 의자왕의 둘째 아들이다. 의자왕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기록에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융과 태, 효와 연 형제가 서로 모계가 달랐다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92, 「7世紀 中葉의 東아시아」, 『百濟硏究』 22).
註 030
태자의 아들 문사 : 문사(文思)는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嫡孫文思’, 『新唐書』 권220 百濟傳같은 책 권111 蘇定方傳에는 ‘義慈孫’,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8월조에는 ‘융의 아들 문사(隆子文思)’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사(文思)의 아버지가 본 기사에는 효(孝), 『資治通鑑』에는 융(隆)으로 다르게 기재된 것은 의자왕의 태자를 본서는 효(孝), 『資治通鑑』은 융(隆)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2004년에 중국 산시성[陝西省] 푸핑현[富平縣]의 도굴당한 무덤에서 출토된 「부여씨부인 묘지명(扶餘氏夫人 墓誌銘)」에는 의자왕-扶餘隆-扶餘德璋-?(太妃)로 이어지는 가계가 적혀 있었으며, 이에 부여융에게 文思, 文宣, 德璋 등의 아들이 있었다고 추론한 견해가 있다(김영관, 2009, 「百濟 義慈王 曾孫女 太妃 扶餘氏 墓誌」, 『百濟學報』 1, 백제학회).
註 031
왕자 융 : 본서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4년(644)조에는 융을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있다.
註 032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태자 융과 나머지 여러 성주가 모두 함께 보내졌다.(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餘諸城主皆同送款)“이라는 기록이 있고,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에는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其將禰植與義慈降)“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대장(大將) 예식(禰植)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항복 당시 대장 예식(禰植)은 달솔급의 웅진 방령(方領)이었다(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 그런데 2006년에 중국에서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禰植進 墓誌銘)」에는 예식이 옛 왕도 웅천(熊川) 출신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왕대에 좌평을 역임하였다는 대목이 있어 예식을 달솔급 웅진방령이 아니라 좌평급 대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李道學, 2007). 또 함께 발견된 「예군 묘지명(禰軍 墓誌銘)」의 ‘지난 현경 5년 관군이 본번을 평정한 날에 기미를 보고 변화를 알아서 칼을 차고 귀의할 곳을 알았다(去顯慶五年 官軍平本藩日 見機識變 杖劒知歸)’는 구절과 「예인수 묘지명(禰仁秀 墓誌銘)」의 ‘아들 식진은 벼슬을 물려받은 어진 사람이었다. 당이 하늘의 명을 받아 동쪽으로 조회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할 때 그 왕을 인도하여 고종황제에게 귀의하였다(子寔進世官象賢也 有唐受命東討不庭 卽引其王 歸義于高宗皇帝)’라는 구정이 있다. 이에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 의거하여 웅진 방령 예식이 웅진성으로 피난 온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군대에게 항복한 것으로 보는가 하면(盧重國, 1995, 57쪽; 김영관, 2001, 58~64쪽). 당나라군과 의자왕 사이에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견해(李道學, 2007, 79~80쪽), 의자왕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상황판단 하에 항복했다는 견해(양종국, 2018, 143쪽)와 더불어 상황 중심에 웅진방령인 예식진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박초롱, 2019, 20쪽) 등이 있다. 예씨 일족의 묘지명 및 연구 현황에 대해서는 최상기, 2014, 「「禰軍 墓誌」 연구 동향과 전망 –한중일 학계의 논의사항을 중심으로-」, 『木簡과 文字』 12 참조.
〈참고문헌〉
盧重國, 1995, 「百濟復興軍의 復興運動 硏究」, 『歷史의 再照明』, 소화.
김영관, 2001, 「滅亡 直後 百濟 遺民의 動向」, 『典農史論』 7, 서울市立大學校 國史學科.
김영관, 2007, 「百濟遺民 禰寔進 墓誌 소개」, 『新羅史學報』 10, 신라사학회.
李道學, 2007, 「「禰植進묘지명」을 통해 본 백제 禰氏 가문」, 『전통문화논총』 5, 한국전통문화학교.
양종국, 2018,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재검토의 필요성-」, 『先史와 古代』 55, 한국고대학회; 2018,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 –재검토의 필요성-」, 『한국고대사와 백제고고학』, 한국고대학회.
박초롱, 2019, 「禰氏 일족의 백제 이주와 성장」, 『木簡과 文字』 23, 한국목간학회.
註 033
연(演) : 의자왕의 아들로서, 백제가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34
(당나라) 수도[京師] :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지금의 중국 섬서성 西安이다. 장안은 기원전 202년 한(漢) 고조가 처음 도읍으로 삼았으며, 그 뒤를 이은 惠帝(B.C.194~188)때 도성을 축조하였고, 이후 前趙・前秦・後秦・西魏・北周・隋・唐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 되었다.
註 035
정방이 … 12,807명을 수도로 보냈다 : 인원수에 대한 기사는 『三國遺事』 권1 紀異1 太宗春秋公條와 일치한다. 그러나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포로로 잡아간 숫자는 각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의자 및 태자 융, 소왕(小王) 효와 연 및 위장(僞將) 58인”,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의자와 융 및 소왕(小王) 효・연과 추장(酋長) 58인”,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는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2,000명”, 본서 권42 열전2 金庾信傳 中에는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20,000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조에는 “11월 1일에 장군 소정방 등에게 잡힌 백제의 왕 이하 태자 융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국변성(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십여 명을 조정에 바쳤다”,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그 왕 부여의자(扶餘義慈) 및 태자 융과 외왕(外王) 여효(餘孝)를 비롯한 13인, 그리고 대수령(大首領) 대좌평 사타천복(沙吒千福), 국변성 이하 7백여 인” 등으로 적혀 있다.
註 036
5부(部) : 전국을 5개 구역으로 나눈 사비시대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중부(中部)를 가리킨다. 여기의 부는 방(方)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5부는 5방과 같은 것이다. 이 部(方)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군관구(軍管區)로서 6~10개의 군(郡)을 포괄하였고, 또 소성(小城)으로 표현되는 현(縣)들을 통괄하였다. 部(方)의 장은 방령(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5부(五部)의 중심 치소는 방성(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百濟傳, 『北史』 권94 百濟傳『翰苑』 百濟傳에 인용된 『括地志』에 의해 방(方)과 방성(方城)의 명칭은 중방(中方)-고사성(古沙城), 동방(東方)-득안성(得安城), 남방(南方)-구지하성(久知下城; 卞城), 서방(西方)-도선성(刀先城; 力先城), 북방(北方)-웅진성(熊津城)이다. 방성은 대개 산성이며 1,200~7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5방제에 대한 학계의 견해 차이는 심하지 않지만, 5방제의 성립 시기와 위치, 방-군-성 사이의 통속 관계, 군장․도사와 같은 지방관의 성격 문제 등에서 아직 해명되지 않았거나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5방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서는 담로제와 5방제를 계기적 관계로 설정하고 웅진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견해(金英心, 1997a), 사비천도 전후로 보는 견해(盧重國, 1988; 金周成, 1992; 鄭載潤, 1992), 위덕왕대로 보는 견해(朴賢淑, 1997) 등이 제기되었다. 그 중 대체적으로 사비천도를 전후로 한 시기에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사비시대에는 일관되게 시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16관등제, 22부제, 왕도 5부제 등의 중앙통치체제의 정비와 군사적 측면에서의 지방의 통제력 강화와 수취 기반의 확대를 도모하는 목적에서 상위의 행정구획으로 5방제를 설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5방제의 운영체계에 대해서는 방-군-성 사이에 통솔관계가 설정되어 있었다는 견해(金周成, 1992; 鄭載潤, 1992), 이를 이원화하여 군정 부문에서는 비교적 철저히 통솔하였으나 민정부문에는 방이 군을 직접적으로 통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盧重國, 1988; 金英心, 1997b) 등이 있다. 그리고 방-군-성의 지방관을 방령(方領)-군장(郡長; 군령(郡令))-성주(城主; 도사(道使))로 설정하고 있는데, 지방관의 성격과 업무, 방좌(方佐)와 군장(郡長)의 정원, 도사(道使)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한편, 최근에는 『구당서』․『신당서』의 6부(部), 6방(方) 기사를 근거로 640년대 이후 백제가 새로이 확보한 가야고지 일대를 또 하나의 방으로 편제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박종욱, 2019, 75~80쪽).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今西龍, 1934, 「百濟五方五部考」,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金周成, 1992, 「백제 지방통치조직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재편」, 『國史館論叢』 35, 국사편찬위원회.
鄭載潤, 1992, 「熊津・泗沘 時代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韓國上古史學報』 10, 한국상고사학회.
朴賢淑, 1996, 「宮南池 출토 百濟 木簡과 王都 5部制」, 『韓國史硏究』 92, 한국사연구회.
朴賢淑,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英心, 1997a, 「6~7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 地方官을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1, 한국고대사학회.
金英心, 1997b,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상고사학회 편, 1998, 『百濟의 地方統治』, 學硏文化社.
박현숙, 2007, 「방-군-성 체제로의 정비」, 『백제문화사대계연구총서8-백제의 정치제도와 군사-』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박종욱, 2019, 「660년 백제의 영역과 加耶故地」, 『百濟學報』 29, 백제학회.
註 037
37군(郡) :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의 하나로서 方(部) 아래의 조직단위이며 성(城)으로 표현되는 몇 개의 현(縣)을 통솔하였다. 군제(郡制)는 사비천도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2년(551)조에 보이는 ‘6군(郡)’은 성왕 때 군제(郡制)를 실시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군(郡)을 다스리는 관리가 『周書』 권49 百濟傳에는 군장(郡將),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543)조에는 군령(郡令)으로 적혀 있다. 군장(郡將)의 경우, 3명이 임명된 것이 특징인데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군장이 모든 군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방(方)에 소속된 6・7~10개의 군 중 중심이 되는 3개의 군에만 군장이 1인씩 존재하였고 나머지는 도사가 있었다는 견해(이근우, 1994), 각 군마다 군장 3인이 있었다는 견해(김영심, 1997) 등이 있다. 군장 3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군정・민정・사법 등 고유한 업무를 분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군장(郡將)은 덕솔이 맡는 것이 원칙이지만, 백제 말기에는 달솔이 맡는 경우도 생겨났다.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달솔로서 풍달군장(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본서 권44 열전4 黑齒常之傳). 한편,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군좌(郡佐)라는 묵서가 확인된 4호 목간이 있어 방령(方領) 아래의 방좌(方佐)처럼 군장(郡將) 아래에 군좌(郡佐)가 있었다는 추론이 제기되었다(金聖範, 2010; 尹善泰, 2012). 2012년경 새롭게 알려진 「진법자 묘지명(陳法子 墓誌銘)」에는 마련대군장(麻連大郡將), 마도군참사군(馬徒郡參司軍), 기모군좌관(旣母郡佐官), 품달군장(稟達郡將) 등의 군 이름과 관직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김영관, 2014, 92~94쪽; 정동준, 2014, 188~200쪽; 박지현, 2014, 97~102쪽), 대군장은 달솔, 참사군은 덕솔 관등을 지니고 있었고, 진법자는 좌관과 군장을 거쳐 사군(司軍)으로 옮겼는데 은솔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지방통치에서 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으며 다양한 직제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金英心,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聖範, 2010, 「羅州 伏岩里 木簡의 判讀과 釋讀」, 『木簡과 文字』 5, 한국목간학회.
尹善泰, 2012, 「羅州 伏岩里 出土 百濟木簡의 判讀과 用途 分析-7세기초 백제의 지방지배와 관련하여-」, 『百濟硏究』 56,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김영심, 2014, 「遺民墓誌로 본 고구려, 백제의 官制」, 『韓國古代史硏究』 75, 한국고대사학회.
김영관, 2014, 「백제 유민 진법자 묘지명 연구」, 『백제문화』 50,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정동준, 2014, 「「陳法子 墓誌銘」의 검토와 백제 관제」, 『韓國古代史硏究』 74, 한국고대사학회.
박지현, 2014, 「〈陳法子墓誌銘〉의 소개와 연구현황 검토」, 『木簡과 文字』 12, 한국목간학회.
註 038
200성(城) : 백제의 지방통치조직 중 군(郡) 아래의 하부기간조직으로서 현(縣)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翰苑』 百濟傳에는 “郡縣置道使”라고 하여 군(郡) 아래에 현(縣)이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어 성과 현이 서로 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현)을 다스린 사람을 성주(城主)(『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543)) 또는 도사(道使)(『翰苑』 百濟傳)라고 하였는데, 도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군이나 현 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80; 李根雨, 1997), 군 아래의 현에 파견된 지방관이라는 견해(金周成, 1992; 金英心, 1997), 군과 현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는 군현에 도사가 파견되었다가 점차 현으로 축소・분화되어갔다는 견해(金壽泰, 1997) 등이 있다. 그런데 지방관이 파견된 성의 수에 대해 본 기사는 200성이라 하였지만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250현으로 새겨져 있고 본서 권36 지리3에는 104현으로 적혀 있어 숫자가 조금씩 다르다.
〈참고문헌〉
武田幸男, 1980, 「六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4, 學生社.
金周成, 1992, 「백제 지방통치조직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재편」, 『國史館論叢』 35.
金壽泰, 1997, 「百濟의 地方統治와 道使」,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金英心, 1997, 「百濟 地方統治體制 연구 : 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李根雨, 1997, 「百濟의 方郡城制 관련사료에 대한 재검토」, 『韓國 古代의 考古와 歷史』, 學硏文化社.
註 039
760,000호(戶) : 백제 멸망 당시의 호수(戶數)이다. 『舊唐書』 권199 百濟傳, 『新唐書』 권220 百濟傳, 『通典』 권185 百濟條에도 ‘七十六萬’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으로 새겨져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1 弁韓・百濟條에는 “백제의 전성기에 152,300호”라는 대목이 있다.
註 040
5도독부 :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5개의 도독부로서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도독부를 가리킨다. 당나라가 도독부를 설치한 뒤 곧바로 백제부흥군이 크게 일어나서 웅진도독부를 제외하고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본서 권37 잡지 지리6에는 5도독부가 보이지 않고 대신 1도독부-7주(州)만 적혀 있다. 이에 기록에 따라 660년부터 1도호부 5도독부체제였다고 보기도 하지만(方香淑, 1994), 기록과 달리 처음에는 웅진도독부만 설치되었으며, 그것조차 662년에야 실질적으로 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김수미, 2006). 5도독부 가운데 위치가 분명한 곳은 웅진도독부(지금의 충남 공주시)와 덕안도독부(지금의 충남 논산군 은진면) 정도이고 나머지는 불분명하다(鄭載潤, 2002). 1도독부체제에서 웅진도독부의 치소는 사비에 있었으며, 672년 신라가 사비에 소부리주를 설치하면서 웅진도독부의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견해도 있다(박지현, 2013). 한편, 『舊唐書』 권83 蘇定方傳에는 “백제를 모두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6주(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근거가 불확실하여 믿기 어렵다.
〈참고문헌〉
方香淑, 1994, 「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鄭載潤, 2002, 「新羅의 百濟故地 점령 정책」, 『國史館論叢』 98.
김수미, 2006, 「百濟府城의 실체와 熊津都督府 체제로의 전환」, 『歷史學硏究』 28, 湖南史學會.
박지현, 2013, 「熊津都督府의 성립과 운영」, 『韓國史論』 59,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註 041
5도독부를 … 다스리게 하고 : 같은 내용이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 나온다. 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5도독부 37주(州) 250현(縣)을 두었다”고 하여 주와 현의 수가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한편, 5도독부제가 폐지된 후 웅진도독부 아래에 두어진 주(州)・현(縣)의 수에 대해 본서 권37 지리4 도독부조에는 1도독부-7주-51현으로 되어 있다(方香淑, 1994; 김수미, 2008).
〈참고문헌〉
方香淑, 1994, 「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김수미, 2008, 「扶餘隆 도독 체제 웅진도독부의 통치구조」, 『歷史學硏究』 32, 湖南史學會.
註 042
자사(刺史) : 주(州)의 장관을 가리킨다. 자사는 한(漢) 무제(武帝)가 부자사(部刺史)를 두고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군국(郡國)을 감찰하도록 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위진(魏晉)시대에는 요충지의 주(州)에 임명한 도독(都督)이 자사를 겸하게 하였다(和田淸, 1932,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65~67쪽 및 98~100쪽). 唐代의 지방 통치조직은 주현제(州縣制)였는데 주의 장관을 자사라고 하였다. 관품은 상주(上州)자사는 종3품, 중주(中州)자사는 정4품上, 하주(下州)자사는 정4품下이었다.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주현제(州縣制)를 백제고지에 시행하면서 주에 자사를 두었다. 본서 권37 지리4에 백제 멸망후 당이 백제고지에 1도독부-7주-51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註 043
낭장(郎將) :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유인원의 직함이 행좌효위낭장(行左驍衛郞將)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낭장은 좌효위낭장을 말한다. 좌효위에는 좌낭장(左郞將) 1명과 우낭장(右郞將) 1명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관품(官品)은 분명하지 않으나 5부(府) 낭장의 관품이 정5품上이어서 그에 준할 것으로 보인다(『新唐書』 권49 백관4 상 16위 및 『舊唐書』 권44 직관3 武官條 참조).
註 044
유인원(劉仁願) :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이다. 자(字)는 사원(士元)이며, 오늘날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위치한 雕陰 大斌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표기대장군의동삼사로서 개국공에 오르고, 아버지는 도독좌무위장군·우효위대장군·승하2주(都督左武衛將軍右驍衛大將軍勝夏二州)에 오를 정도로 혁혁한 가문 출신이다. 그는 이러한 가문의 훈업으로 홍문관 학생이 된 이후 고구려 정벌(645), 연타(延陀) 정벌(647), 요동 정벌(648), 철륵(鐵勒) 위무(651),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정벌(654), 토욕혼(吐谷渾)과 토번(吐藩) 위무(659)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어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그때의 직함이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우일군총관·선위장군·행좌효위낭장·상주국(右一軍摠管宣威將軍行左驍衛郞將上柱國)으로 적혀 있다. 유인원은 백제가 멸망한 뒤 소정방을 대신하여 사비도성의 도호(都護)로서 당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그 후 웅진도독부 체제로 개편하였을 때 웅진도독이 되어 다스리다가 663년에 귀국하였다. 664년 10월에 다시 웅진도독이 되었고, 665년 8월에 유인궤와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회맹하는 의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근대 이후 충남 부여군의 부소산성에서 유인원이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가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유인원의 행적은 『舊唐書』와 『新唐書』에 입전되지 않았다(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63~64쪽).
註 045
왕문도(王文度) : 당나라 사람으로서 660년 백제 공격에 참전하였다가 죽었다. 그의 행적은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책부원구』․『삼국사기』 등에 부분적으로 간단히 적혀 있으며,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그의 아버지 왕윤(王贇)의 묘지석을 통해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拜根興, 2008, 206~216쪽; 2021, 316~320쪽). 그는 수나라 때인 605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35세 무렵인 640년경 곽주자사(廓州刺史)에 임명되고 654년에는 종3품 우무후장군상주국진양현개국후(右武侯將軍上柱國晉陽縣開國侯)를 지냈다. 당 현경(顯慶) 초년(655~657)에 부대총관(副大摠管)이 되어 서돌궐 공격에 나섰다가 소정방 등 능력있는 자의 공로를 시기하고 황제 조칙을 고쳐서 속였으며 군대를 동원해 포로를 죽이고 재물을 약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관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660년 9월 당 고종이 그를 좌위중랑장웅진도독(左衛中郎將熊津都督)으로 삼아 백제에 파견하였는데, 바다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를 55~60세로 추정한다(拜根興(장원섭역), 2021, 319쪽).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는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태종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고 갑자기 죽었다고 적혀 있다. 왕문도의 직함에 대해서도 본 기사와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는 좌위낭장(左衛郞將), 『舊唐書』 권199 百濟傳에는 우위낭장(右衛郞將), 『舊唐書』 권84 劉仁軌傳과 본서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및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龍朔 원년(661) 3월조에는 좌위중낭장(左衛中郞將)으로 적혀 있는 등 기록마다 차이를 보인다(노중국, 2003, 64~65쪽).
〈참고문헌〉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拜根興, 2008, 「唐將王文度事迹考述-以與新羅關係爲中心-」, 『唐史論叢』 10, 三秦出版社.
拜根興, 2020, 「一人兩志:隋代將領王贇墓志考釋-兼論王贇之子初唐名將王文度-」, 『史學集刊』 2020-6,
拜根興(張元燮譯), 2021, 「一人兩誌: 隋代 王贇墓誌 연구-初唐 名將 王文度와 함께」, 『木簡과 文字』 26, 한국목간학회.
註 046
고종이 꾸짖고는 용서해 주었으며 : 『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660) 11월조에는 “11월 무술 초하루에 임금이 … 풀어주었다(十一月 戊戌朔 上御則天門樓 受百濟俘 自其王義慈以下 皆釋之)”라고 적혀 있다.
註 047
왕이 병으로 죽자 : 의자왕은 644년 당나라에 반위(反胃)관련 전문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큰 병을 앓았으며(朴峻亨・徐榮敎, 2014),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리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져 국정을 왕후인 은고(恩古)에게 의지하였고,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먼 거리를 끌려가는 동안 병이 악화되어 금세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노중국, 2018 496쪽).
〈참고문헌〉
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
朴峻亨・徐榮敎, 2014, 「『文館詞林』에 보이는 蔣元昌과 蔣氏家門 醫官」, 『歷史學報』 222.
註 048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당나라의 문산계(文散階)에 속하는 벼슬이다. 당의 문산계(文散階)는 29등급으로 되어 있는데, 금자광록대부는 정3품이다.
註 049
위위경(衛尉卿) : 당나라 위위시(衛尉寺)의 장관으로서 관품은 종3품이다. 위위시는 기계문물(器械文物)과 궁문위둔병(宮門衛屯兵) 등을 관장하였다.
註 050
손호(孫皓) :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마지막 황제(재위 264~280)로서 자는 원종(元宗)・호종(皓宗)이며 별명은 팽조(彭祖)이다.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정후(烏程侯)에 책봉되었으며, 제3대 황제인 손휴(孫休)의 뒤를 이어 264년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진(晋)왕조가 개창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에서 우창[武昌]으로 잠시 이전하였다.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고 주색에 빠져 폭정을 하였으며,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쳐들어온 晋나라 군대에게 항복하였다(280년). 오나라는 4대 58년으로 멸망하였고, 손호는 항복한 뒤 귀명후(歸命侯)의 작위를 받았으며 나중에 서진(西晋)의 수도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註 051
진숙보(陳叔寶) : 중국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재위 582~589)로서. 高宗의 적장자(嫡長子)이며 자는 원수(元秀)이다. 陳나라 大建 원년(569)에 황태자가 되었고, 대건 14년(582)에 高宗이 죽자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589년 隋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됨으로써 陳은 멸망하였다. 흔히 陳의 후주(後主)라고 불리며,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註 052
사가경(司稼卿) : 사가시(司稼寺)의 장관으로서 관품은 종3품이다. 사가시는 창고의 일을 관장한 사농시(司農寺)를 唐 高宗 龍朔 2년(662)에 개칭한 것이다.
註 053
유인궤(劉仁軌) : 중국 당나라 太宗~高宗代의 장군으로서 생몰연대는 603∼686년이다. 자는 정칙(正則)이며, 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속한 변주(汴州) 웨이스[尉氏] 사람이다. 그는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해 독학으로 두루 통달하게 되었으며, 하남도안무대사(河南道按撫大使) 임괴(任瓌)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 貞觀 15년(641)에 급사중(給事中)에 임명되었으며, 660년 당 고종이 백제를 공격할 때 수군을 감독 통솔하여 군량을 운송하는 일을 맡았다가 풍랑을 만나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에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곧 실각당하고 백의종군하였다. 그 후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사비성을 진수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가 위험에 처하자 고종은 유인궤를 발탁해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아 왕문도를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유인궤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뒤 검교웅진도독(檢校熊津都督)으로서 당나라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665년 8월에 유인원과 함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이 취리산에서 맹세하도록 만든 뒤 당나라로 돌아갔다. 『舊唐書』 권84 劉仁軌傳에는 그가 665년 신라·백제·탐라·왜의 추장을 거느리고 태산 봉선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麟德二年 封泰山 仁軌領新羅及百濟·耽羅·倭四國酋長赴會). 668년에는 웅진도안무대사겸패강도총관(熊津道按撫大使兼浿江道摠管)이 되어 이적(李勣)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에 주둔하며 옛 고구려 땅을 다스렸다. 669년 당나라로 돌아간 뒤 670년에 농주자사, 674년에 계림도총관으로서 신라에 파견되었고, 이후 토번(吐藩)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舊唐書』 권84 劉仁軌傳, 『新唐書』 권108 劉仁軌傳 등 그의 열전이 전한다(瀧川政次郞, 1984; 노중국, 2003, 60~62쪽).
〈참고문헌〉
노중국, 2003,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瀧川政次郞, 1984, 「劉仁軌傳」上・中・下, 『古代文化』 36・37・38.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