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이 을파소를 초빙하다 ( 191년 04월(음) )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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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이 을파소를 초빙하다 ( 191년 04월(음) ) 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겸손한 말로 예의를 다하여 을파소를 초빙하였다. 〔을파소를〕 중외대부(中畏大夫)註 020020 중외대부(中畏大夫): 고구려 초기의 관직명이다. ‘중외(中畏)’는 후기의 중리소형(中裏小兄)·중리대형(中裏大兄)·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등에 나오는 ‘중리’와 같은 의미로 본래 왕궁 가운데 국왕이 거주하는 안쪽 구역인 ‘내리(內裏)’의 다른 표현이다(武田幸男, 1978, 46쪽). 또한 ‘대부(大夫)’는 중국의 선진(先秦) 시기에는 경(卿)보다 아래의 관작이었는데, 진·한 이후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처럼 관부의 장관직으로 칭해지거나 태중대부(太中大夫)처럼 황제에 대한 간의(諫議)나 고문(顧問)을 담당하는 근시직으로 여겨졌다. 이로 보아 중외대부는 국왕의 측근에서 간의나 자문을 수행하던 근시직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중외대부에 임명된 인물들은 차대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비류나부의 우태 양신(陽神), 고국천왕대의 척신인 연나부의 패자 어비류(於畀留), 고국천왕이 국정개혁을 위하여 등용한 을파소(乙巴素) 등으로 모두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중외대부는 국왕 측근에서 근무하면서 왕권을 뒷받침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이종욱, 1982, 20~21쪽; 임기환, 1996, 156쪽). 이에 대해 중외대부의 직능을 진·한의 어사대부에 비기며 백관에 대한 규찰을 담당했다고 보기도 한다(손영종, 1990, 254쪽; 김광수, 1991, 6~8쪽). 또한 중외대부가 국왕 측근의 관직이라는 성격을 내포하였다고 보면서도 그 임무와 역할은 당시의 수상직인 국상(國相)과 큰 차이가 없는 하위직(이문기, 2003, 81~85쪽) 또는 국상 다음가는 관직(이종욱, 1982, 20쪽; 금경숙, 2004, 96~97쪽) 등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武田幸男, 1978,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学報』 99·100 이종욱, 1982, 「고구려 초기의 중앙정부조직」, 『동방학지』 33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김광수, 1991, 「고구려의 ‘국상’직」, 『이원순교수정년기념역사학논총』, 교학사 임기환, 1996, 「지방·군사제도」, 『신편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이문기, 2003, 「고구려 중리제의 구조와 그 변화」, 『대구사학』 71 금경숙, 2004, 『고구려 전기 정치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닫기에 임명하고 관작을 더하여 우태(于台)註 021021 우태(于台): 고구려 초기의 관등 명칭이다. 『삼국지』 권제30 위서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우태(優台)’로 나오며, 10개 관명 가운데 여섯 번째로 기술되어 있다. 우태를 왕의 직속 관료로 보기도 하지만(武田幸男, 1978: 1989, 373~374쪽; 이종욱, 1982, 45~46쪽), 일반적으로는 원래 연장자나 친족집단의 장(長), 수장층 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여러 족장 세력을 통합하여 지배체제를 마련하면서 관명으로 수용되었다가 형계(兄系) 관등(官等)으로 분화되었다고 이해한다(김철준, 1975, 128쪽; 노중국, 1979, 19쪽; 김광수, 1983, 114쪽). 특히 우태는 본래 연장자라는 의미로 ‘웃치’로 읽었는데, 중·후기 형계 관등의 ‘형(兄)’이라는 단어는 ‘우태’의 본래 의미를 한역(漢譯)한 것이고,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태대형의 일명)나 힐지(襭支: 대형의 일명)의 ‘지(支)’는 ‘우태’의 발음인 ‘웃치’의 잔존 형태로 파악된다(김철준, 1956: 1975, 130쪽). 우태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15 고구려본기제3 태조대왕 16년 8월조 참조. 〈참고문헌〉 김철준, 1956,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김철준, 1975,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武田幸男, 1978,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 『朝鮮学報』 86 노중국, 1979, 「고구려국상고(상) -초기의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한국학보』 5-3 이종욱, 1982, 「고구려 초기의 중앙정부조직」, 『동방학지』 33 김광수, 1983, 「고구려 고대 집권국가의 성립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닫기로 삼으며 말하기를, “나는 외람되게도 왕위(先業)를 받아 신민(臣民)의 윗자리에 있지만, 덕이 없고 재주가 부족하여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있소.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註 022022 능력을 감추고: 장용(藏用)은 공용(功用)을 숨겨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의 “顯諸仁藏諸用”에 그 용례가 보인다. 회명(晦明)은 ‘夜晦日明’의 준말로 주야를 의미한다. 즉 주야로(언제나) 자기의 공용을 숨겨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44쪽).닫기 외진 곳에 계신지 오래되었소. 지금 나를 버리지 마시고 바로 와주시니, 비단 나만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직(社稷)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公)은 그 마음을 다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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