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민당·민국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1) 의회와 행정부의 갈등
① 초대 내각 구성을 둘러싼 갈등
개헌 관련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49년부터였다. 헌법 제정 당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은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구상하였지만, 이승만의 압력으로 대통령중심제로 수정하는 데 합의했다. 원래 헌법초안은 내각책임제로 준비되었으나 국무총리를 두는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되었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이 탄생했다.
註01 그리하여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내각책임제의 내용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승만대통령과 한민당이 주도권을 두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개헌 논의가 시작되었다.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면서도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원(내각)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국무원은 대통령 및 국무총리, 각 부 장관으로 조직되는 합의체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 국책을 결의하는 기관이자 행정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 하의 내각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국무원 구성은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부의장으로 하며, 국무원의 의장인 대통령이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회와 정부 간에도 밀접한 관계가 아니다. 또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면서도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미국에는 내각에 해당하는 조직체가 없으며, 각부 장관들이 회의를 하는 경우는 있으나 이것이 헌법상의 기관이나 합의체는 아니었다.
註02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통치구조(대통령제·의원내각제)를 기계적으로 접목시킨 결과 정부 위기가 항상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정사와 유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註03 대통령제는 권력분립을 기본원리로 삼고 있고, 의원내각제는 권력융화를 기본원리로 삼고 있는데, 하나의 권력구조 안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를 기계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결국 정부기능의 마비만을 가져올 따름이라는 것이다.
제헌헌법에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면서도, 의회와 대통령 간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간선으로 임명되는 대통령의 권력기반을 국회에 두고 임기 4년·중임의 체제를 갖추면서도 대통령에게 내각(국무원) 임명권을 일임하고, 법률안거부권 및 법률안제출권을 부여하는 한편, 국회를 단원제로 하였다. 따라서 국회와 행정부가 대립할 때 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중간적 장치-예컨대 양원제, 또는 내각불신임권·국회해산권 등-가 결여되어 있었다.
註04
특히 대통령중심제의 정부형태를 취하면서도 국무원을 심의기관이 아닌 의결기관(의원내각제적 요소)으로 하였고(제68조), 대통령 및 부통령을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써 간접선출하며(제53조), 국회의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게 하여(제39조) 의원내각제적인 요소를 절충하고 있다. 이는 결국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도 고전적 대통령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註05
제헌국회는 2년의 임기를 가진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무소속이었고, 한민당이 하나의 정당으로서는 다수의석을 가졌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국민회)가 총 198석 중 55석으로 전체 비율의 27.5%를, 한민당이 29석으로 14.5%를 점하였으며, 대동청년단이 12석으로 6%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무소속이 총 85석을 얻어 전체의 42.5%에 달했다.
註06
그리하여 제헌국회의 주요정치세력은 한민당계와 이승만계로 대표되는 핵심 정치세력과 중도성향의 무소속, 그 외 유동적인 무소속으로 구성되었다. 여러 정치세력들은 대통령제와 내각제라는 두 가지 정부형태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나뉘어 있었다. 제헌의회의 세력 분포를 정부형태 구상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면, 한민당과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은 내각책임제를, 독촉계와 친이승만계 의원들은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가장 강력하게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하여 관철시켰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반면에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상징적 존재로 놓고 실질적으로는 국무총리 이하 각 부의 장·차관들이 정부를 운영해나가는 체제를 구상했다.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의 경우, 정치이념상 원칙적으로 한민당과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우위라는 기본적 권력구도에는 한민당과 의견을 같이했다.
註07
의회와 정부의 관계에서 첫 대립은 초대 내각 조직문제를 두고 일어났다.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독촉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자 시도한 반면, 한민당은 미군정기부터 장악해왔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다. 중도파인 무소속구락부는 반(反)한민당의 위치에서 견제역을 담당했다. 한민당은 임정세력이 행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도파를 견제했으며, 김구나 조소앙을 입각시키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이승만세력과 한민당이 연합하여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중도파와 한민당의 대립 갈등을 이용하여 두 계열을 모두 배제하고 자파 인물을 내각에 기용하고자 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국회의 인준이 필요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앞장서 지지했던 한민당은 국무총리와 내각 인선에서 자신들이 등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의외의 인물인 이윤영을 국무총리에 지명하였고, 국회에서 재석의원 193명 중 가 59, 부 132, 기권 2로 부결되었다. 1차 지명이 부결되자 이승만은 2차로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8월 2일 열린 국회 제37차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가 110, 부 84로 가결되었다. 당시 국회 내 조직력을 가진 세력은 한민당,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족청) 등으로, 이승만이 족청단장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한민당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비록 임명동의안이 통과는 되었지만, 반대표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초대 내각은 이승만의 개인적인 신임을 기초로 선정되었다. 족청단장 이범석 외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이승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친정체제적 성격이 강했다.
註08 이러한 조각은 의회 내 세력분포를 무시한 것으로, 이승만정부와 의회와의 관계에서 대립과 파란을 불러왔다. 또한 이승만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형식적으로 각계 인사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자기 의사대로 결정했다. 각료를 임명하면서 이승만은 국무총리 이범석이나 부통령 이시영과 상의 한번 없이 거의 단독으로 진행하여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실권이 없는 자리로 만들어 버렸다. 내각 임면권을 대통령만의 고유한 권한으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註09
② 각종 개혁법안을 둘러싼 행정부와 의회의 대립
1949년 국회에서 핵심적 안건들이 상정되어 심의·처리되는 과정에서 의회와 행정부 간에 상당한 마찰이 야기되었다. 이 시기 원내에는 여당 역할을 하는 이정회, 야당 역할을 하는 한민당과 소장파가 있었다.
註10 이승만세력은 원내에서 열세였고, 의회가 행정부에 대해 우위를 보였다. 지방자치법 제정과정에 이러한 구도가 반영되었다. 지방자치문제는 국가의 권력구조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자 기존 행정 관료조직의 대대적 개혁을 의미했다. 제헌헌법 제96조와 제97조는 지방자치제와 지방의회 설치를 규정하였다.
국회에서 기초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1948년 9월 13일 정부에서 ‘지방행정조직법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군수와 도지사는 임명제로 하며, 미군정기 중앙집권적 경찰제를 존속하는 등 사실상 지방자치제 실시를 부정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 내무치안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던 소장파세력은 ‘지방자치에 의한 분권적 행정구조로의 개편’을 요구하였고, 이후 행정부와 의회 간에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지방자치제 시행시기로, 정부는 제2회 국회가 폐기된 후 5월 12일 일방적으로 지방자치법의 폐기를 국회에 통고했다. 소장파세력이 입법을 적극 주장한 반면, 의회 내에서도 여당격인 대한국민당과 야당을 자처한 민국당은 정부 요구대로 지방자치제 실시 연기를 주장했다. 지방행정권력을 둘러싸고 보수와 개혁세력의 대립구도를 보인 것이었다.
註11
개헌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6월부터였다. 이 시기에 터진 농촌에 대한 각종 기부금 강제 징수, 국군의 월북사건, 민중계몽대의 국회의원 체포 구타사건 등을 계기로 국회는 국무총리 이하 각 장관의 총 퇴진과 함께 각 도지사의 파면을 결의했다. 개헌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국회와 정부의 대립이 심화된 것은 대통령책임제의 결함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내각총사직과 함께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다.
국회에서 각파교섭위원회가 꾸려져 개헌문제를 논의했는데, 민국당을 비롯한 동성회, 신정회, 이정회, 무소속 등 대다수 의원들이 개헌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 최초의 야당통합이라는 민주국민당(민국당) 창당도 개헌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민당이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문제를 제기하자 대한국민당 내에서 개헌 지지파인 신익희, 이청천 등이 자파 세력과 함께 한민당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이 창당되었다.
註12
이승만대통령은 이러한 국회의 개헌 논의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친이승만계인 일민구락부조차 하나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일민주의를 표방하였고, 1948년 12월 20일부터 시작된 제2회 국회에서 여당적 성향이 두드러진 의원들이 일민구락부를 구성하였는데, 상당기간 50여 명의 의원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註13 의회를 장악하지 못한 이승만정권은 반의회 전략을 펼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6월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이었다.
註14 이에 국회는 내각 총퇴진을 결의하고 반민특위 무장해제 책임자 파면을 실행할 때까지 정부의 법안 심의를 거부한다는 결의를 하고 4일간 휴회에 들어갔다. 이 휴회기를 계기로 개헌론이 표면화되었다.
註15
- 註14
-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해 특위 요원들을 연행하고, 특경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속적인 방해공작으로 그 힘을 잃었다(한인섭, 2019, 「제1공화국에서 사법과 정치」, 『강원법학』 58, 452~453쪽); 소장파·반민특위와 이승만·경찰의 대립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중석, 199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104~143쪽 참조.
개헌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시점에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국가보안법이 제헌국회에서 통과된 지 6개월만인 1949년 5월 18일, 6월 19일, 7월 30일 3차에 걸쳐 김약수, 이문원, 노일환 등 좌파계열 소장파 의원 1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구속되었다.
註16 특히 6월 17일 국회부의장 김약수 외 6명이 외국군 철수와 미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진언서를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1950년 3월 14일 이들 모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국회 소장파의원들과 정부의 힘겨루기의 일면을 지닌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註17
제1공화국 시기에 이승만 행정부를 견제하면서 자율적인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제헌국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제헌국회 전반기에는 이른바 ‘소장파’의원들이 집권세력을 활발히 견제하였는데, 이들은 이승만 지지세력과 보수세력 모두에 대항하는 소수자 세력이었다.
註18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을 겪으며 국회와 정부 간 세력이 역전되었다. 1949년 7월 초 국회는 정부와의 협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국회 내에서 일민구락부의 세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되자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한 국회부의장 선거에서 일민구락부의 윤치영이 당선되었다. 일민구락부는 조직 초기에는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제2의 국회프락치사건 재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더불어 민국당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여 무소속 소장파의원들이 대거 참여함에 따라 45명까지 늘어났다.
국회에서 통과시켰던 ‘내각총사퇴 및 정부제출법안 심의거부’ 결의는 번복되었고, 각종 개혁적인 법안들도 결국 행정부의 의도대로 수정되었다. 국회는 이승만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시키는 데 동의했다. 지방자치법 역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시·읍·면장은 지방의회에서 선출하되 도지사 및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에 의한 임명제’로 하였고, 시행시기도 정부 의도대로 사실상 유보시키는 데 동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내 진보세력이 제거되면서 국회 내 보수적 색채가 강해졌다. 민국당계와 혁신그룹인 소장파 간에는 국가보안법, 귀속재산처리법, 농지개혁법 등의 제정을 중심으로 대립이 극심했는데, 진보세력이 제거되면서 민국당이 원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2) 민국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제출
① 원내 세력분포 변화와 개헌 논의
1949년 7월 7일 국회법이 개정되어 ‘교섭단체제도’가 공식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원내 각파의 세력 분할이 보다 제도화되고 공고화되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습격사건, 김구암살사건 등을 거치면서 소장파세력은 원내에서 힘을 잃었다. 신분상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소장파 의원들 다수가 대한국민당으로 이적하는 등
註19 정치세력의 통합과 분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국회는 1949년 9월 제5회 회기부터 단체교섭회를 설치하였다.
1949년 2월 10일 한민당과 대한국민당 이탈파인 신익희·지청천 등이 합동하여 발당한 민국당은 소장파세력이 해체됨으로써 원내 제1세력이 되었다. 민국당은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김동원을 중심으로 원내에서 독자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1949년 6월 내각에서 민국당원이 12부 중 7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註20
민국당은 원내외에서 독점적 지위를 장악한 데 자신감을 가지고 일부 무소속의원과 제휴하여 개헌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정감사로 행정부의 실정이 드러나고, 쌀값 앙등으로 인한 식량문제 및 인플레이션 문제로 반정부 여론이 형성되었다. 민국당은 이러한 문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리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국당이 개헌을 통해 차기 정권 획득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註21 민국당은 1950년 1월 27일 무소속을 포함한 79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註22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원내에서는 여당으로 재결성된 국민당을 중심으로 개헌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번에는 민국당의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대한국민당으로 총집결하면서 원내 세력분포가 변화했다. 대한국민당은 1948년 12월 독촉국민회를 중심으로 창당되어 여당조직운동을 전개했지만 이승만의 후원을 얻지 못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949년 2월 신익희·지청천 등이 이탈하여 민국당을 발당한 이후에는 일부 잔류파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소장파 해체 이후 원내에서 민국당의 독주를 막고 개헌을 반대하는 일민구락부·신정회·노농당 일부의원들이 대한국민당으로 통합함으로써 총 71명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이러한 원내 세력 분포가 개헌안 표결에 반영되었다.
② 민국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의 주요 내용
민국당이 주축이 되어 1950년 1월 27일 서상일 외 78인이 제출한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로 되어 있는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정하여 대통령을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로 두고 정치 실권을 자신들이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즉, “대통령은 국가원수로 모시고 국회에서 선거한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이 되고 그의 제청으로 국무원을 조직하고 국회는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의결권을 가지는 동시에 정부에는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내각책임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특별법원의 관할과 조직, 국회 임기 연기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상일이 제출한 ‘대한민국 헌법개정안 제출설명서’에서 내각책임제를 찬성하는 이유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註23
첫째 일 년 동안 실정이 허다한데 책임을 물을 길 없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책임 있는 제도로 고쳐서 민심을 수습하고 혁신정치를 하자.
둘째 정변은 민주정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며, 정변이 없는 나라는 망하고 너무 잦으면 쇠약한다.
셋째 내각책임제하의 국회는 명실 그래도 국가 최고기관으로서 정강 정책을 내걸고 정당적으로 합법적인 의회투쟁을 할 수 있는데, 대통령중심제는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려고 파당을 꾸며서 모략중상을 일삼으려 정당은 관당화 된다.
넷째 대통령은 정신적 존앙(尊仰)의 집결 하에 권력의 집결을 가해서 군주제에 가깝게 되지만, 내각책임제 하에 다수당이 정권을 잡는 것은 민주정치의 원칙이며 일당독재는 세계 민주진영을 이탈하는 결과가 되니 있을 수 없다,
다섯째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은 양원제와 내각책임제였는데, 정부수립이 긴급의 급무이어서 번안한 것이니 조만간 내각책임제로 될 것은 숙명적인 것이며 제헌의 잘못을 발견하였을 때는 개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여섯째 임기연장이 아니고 선거가 불가능할 때 국회의 중단을 없애기 위하여 헌법의 불비를 보강한 데 불과하며 38선에서의 소규모적인 충돌사건의 빈발과 5월 위기설이 전해지는 현 정세 하에 필요하다는 등이었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내각책임제 개헌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중심으로 책임정치가 되어야 하므로 거국일치의 내각이든지, 각 정당의 연합내각이든지, 국회에서 최선으로 생각하는 내각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개헌 논의 시작 단계부터 반대 입장을 담은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서상일 등이 개헌안을 제출하기 3일 전인 1950년 1월 24일, 내각책임제 개헌 공작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2월 6일 개헌안을 공고하는 동시에 개헌에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함께 공고하였다.
註24 3월 3일에도 개헌반대 담화를 발표하면서 국민이 국회의 결정에 대해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헌안 통과 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데 이어 3월 10일에는 개헌은 민의를 존중하라는 개헌반대 담화를 발표했다.
국민당과 일민구락부도 적극적으로 개헌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국민총궐기대회를 열고 개헌을 추진하는 자들은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라고 규탄했다. 이들이 개헌 반대이유로 내세운 것은, 첫째 개헌은 치안이 확립되고 국토가 통일된 후에 논의할 것으로 시기상조이고, 둘째 정변이 빈발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정권야욕을 조장하여 붕당의 폐해가 생기고, 셋째 일당독재를 초래하며, 넷째 제헌의원의 임기 중 개헌은 부당하니 선거구 국민의 의사를 물어서 해야 하고, 다섯째 의원의 임기연장을 획책하여 불순하다는 등이었다.
註25
③ 의원내각제 개헌안 국회 부결과 그 의미
1950년 1월 27일 서상일 외 78인이 제출한 개헌안은 1950년 3월 9일 대한국민당의 긴급동의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국회에서 세력이 약했던 이승만은 대한국민회 및 대중단체를 동원하여 개헌반대운동을 펼쳤다. 그에 따라 전국적 규모로 개헌반대국민대회가 열렸다. 1950년 2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애국단체연합회 주최로 개헌반대총궐기국민대회가 개최되었고, 1950년 2~3월 전국 각지에서 국민회 주최로 개헌반대총궐기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개헌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 직전인 1950년 3월 8일에도 명동시공관에서 전국애국단체연합회 주체로 내각책임제 개헌안 절대반대 및 총선거촉진국민대회가 열렸다.
1950년 3월 초 공보처 여론조사 결과 개헌 반대 의견이 72%로 나오자, 이에 힘입어 대한국민당이 나서서 기습적으로 국회 표결을 시도하였다. 그 후 7일간의 격렬한 찬반 토론을 거쳐 1950년 3월 14일 제52차 본회의에서 무기명 비밀투표로 표결에 부쳐졌다. 그 결과 재석 179명 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로 부결되었다. 투표과정에서 개헌반대파인 대한국민당은 소속의원의 이탈을 막기 위해 백지투표로 기권을 종용했는데, 민국당이 이를 문제 삼으면서 이날의 표결은 무효 처리되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인 3월 15일 재투표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로 66표의 기권표가 나왔다. 대한국민당은 당론이 통일되지 않아 백지투표라는 편법을 사용하여 내각제개헌안을 저지하고자 할 만큼 불안정했지만, 결과적으로 부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내각제 개헌안이 부결된 요인은, 첫째 국회 내외에 이승만 지지세력이 개헌안을 제기한 민국당 세력보다 강했다는 점, 둘째, 정부의 개헌반대 압력이 성공적이었다는 점, 셋째 민국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註26 민국당에 대한 불신은, 민국당의 권력 독점 가능성, 과거 한민당부터 이어진 친일파 지주정당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점과 제헌의원의 임기연장 조항에 대한 여론의 비판 등을 꼽을 수 있다.
註27 국민들은 설사 개헌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제헌의회에서 개헌을 논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개헌안은 부결되었지만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도한 민국당은 결집력을 보여줌으로써 나름의 성과를 거둔 측면도 있었다. 내각제 개헌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민국당은 국회를 무대로 맹렬한 공세를 펼쳤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규탄하면서 사임한 이시영 부통령 후임으로 민국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김성수를 선출했다. 국회의장 선거에서도 민국당의 신익희가 선출됨으로써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註28 이승만은 1950년 3월 14일, 국회를 양원제로 고치로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을 시사하는 담화를 발표하여,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개헌 문제가 또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2. 1950년 5.30선거와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1) 1950년 5.30선거 : 제2대 총선거
① 1950년 5.30선거 결과와 의미
1950년 4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이 제정·공포되었다. 그에 따라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의 숫자는 2,209명으로, 제헌국회 입후보자 948명보다 2.3배가 더 많았다. 정당·단체의 숫자는 39개, 단 1명의 후보만을 내세운 정당·단체의 숫자는 18개로 제헌국회보다 다소 줄었지만, 무소속 후보자는 1,513명으로 제헌국회 417명보다 3.6배가 늘었다.
註29
대한국민당이나 민국당이 보수적인 이념적 색채를 가졌으나 사회당과 민족자주연맹 등 혁신적인 성격의 정당도 선거에 참여하여 이념이나 정책 면에서 정당 간에 차이가 컸다. 정부수립 후 2년 동안의 시정결과를 비판하여 새로운 민의를 묻는 선거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선거 결과 민주국민당이 9.8% 득표로 24석을 차지하였고, 대한국민당도 역시 9.8%로 24석, 국민회가 6.8%를 얻어 14석을 차지하였다. 그 외에 대한청년단이 3.3%를 얻어 10석, 대한노총이 1.7%로 3석, 사회당이 1.3%로 2석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없었다. 제헌의원 선거와 같이 무소속이 압도적이어서 62.9%의 득표로 국회 총의석 210석 중 126석을 차지했다.
선거 결과는 미군정 및 그에 협력한 민국당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자 여당인 대한국민당에 대한 불신임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러나 대한국민당의 약화가 곧 이승만 지지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공식적인 여당이 확립되지 않았고,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총연맹, 일민구락부, 대한부인회, 중앙불교위원회, 대한여자국민당 등은 친이승만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60석에 근접하는 이승만 지지세력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서민적 이미지가 강했던 민국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의원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반면 이전 국회에서 배제와 배척의 대상이었던 중도 진보세력이 무소속의 형태로 원내에 대거 진출, 최소한 원내 1/4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註30 사회당과 민족자주연맹, 무소속의 당선자 중 다수가 임정계열로, 126명의 무소속 의원 중 반정부적 성향이 절반 이상이었다.
註31
- 註30
- 한상희, 2000, 「전시체제에서의 헌법형성 1948~1954」, 『서울대학교 법학』 41(2), 62쪽. 이는 대통령 간선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정치구조를 감안할 때 국가자체의 정당성의 위기로까지 평가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6월 19일 제2대 국회 개회일 의장선거에서 나타난 투표상황을 통해 국회 내 세력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데, 제1차 투표결과 신익희(민주국민당) 96표, 조소앙(사회당) 48표, 오하영(무소속) 46표, 이갑성(국민회) 11표, 안재홍(무소속) 3표,윤기섭·장건상·지청천·김무용·장택상 각 1표를 얻었다. 정부에서 지지한 오하영은 46표를 획득하였을 뿐, 같은 계열을 합하여 57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야당계열이었다. 또한 제1대 국회에서 이승만의 내각에도 참여하고 후에는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이 국회부의장에 당선되었다는 점도 2대 국회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이 정부수립 직후부터 추진해온 독자적 정치세력 형성에 실패함으로서, 2대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재선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짐에 따라 정당 조직과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게 되었다.
② 6.25전쟁 발발 : 전시내각 구성과 비상조치
제2대 국회 개원 후 불과 일주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고 정부에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미리 피신하고 정부도 후퇴했다. 국회를 사수하기 위해 서울에 남아있던 국회의원들의 희생이 컸다. 전쟁 중 재석 210명 가운데 35명의 의원이 납치 및 행방불명되거나 사망했다.
註32 1951년 1.4후퇴 후 부산 임시수도에서 국회가 다시 열렸을 때 국회의 재적수는 175명으로 줄어들었다. 1950년 말 중국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다시 서을에서 후퇴한 후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 8월 15일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2대 국회는 부산임시수도에서 활동했다.
6.25전쟁은 한국정치에서 진보적 정치세력의 근본적 약화를 초래했다. 진보진영의 주요 인물인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등이 전쟁 중 납북되어 이들이 입지가 좁아졌으며, 전쟁 그 자체가 지닌 양자택일 강요적 상황이 그들의 입지를 좁힌 탓도 있었다. 좌우간의 계급투쟁이 전쟁으로까지 비화된 시점에서 중간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설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
註33
이승만대통령은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당일에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하였다.
註34 특별조치령이 과도하게 적용되면서 부당하고 불법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註35 전쟁으로 인해 집권세력은 1950년 5.30선거 결과 의석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리력을 재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전쟁 중이라는 핑계로 국민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신체의 자유도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다. 기본권은 긴급명령에 의해 제한되었고, 비상계엄의 선포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었다. 비상계엄에 따른 포고령에 의해 언론에 대한 검열이 행해졌고 영장 없는 체포 구속이 자행되었다.
註36
- 註35
-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는 특별조치령의 제9조인 단심재판 조항에 위헌선고를 내려 부당하고 불법한 재판을 바로잡고자 했다(한인섭, 2019, 「제1공화국에서 사법과 정치」, 『강원법학』 제58권, 460쪽).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정부는 강력한 비상조치를 강구했다. 국회는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행정부의 무책임과 실정을 비난하며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1950년 11월 국회는 국무위원 총사직 건의안을 제출했으나 전시상황인 것을 고려하여 국무위원 인책 총사직 권고 결의안은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대응하여 강력한 거국적 성격의 전시내각을 구성했다. 1950년 7월 15일 민국당의 중견인 조병옥을 내무장관에 임명하여 전쟁 발발 이후 정부가 보여준 무능에 대한 국회와 국민들의 비난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조병옥은 미군정기 경무부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경찰을 재편하고 경찰이 전투업무를 병행하도록 하며, 경찰관 15,000명을 유엔군에 배속시켜 준군사기구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내무부를 강화시켰다.
註37
국회와 정부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승만대통령은 이범석 사임 이후 공석이었던 국무총리에 민국당의 장면을 추천하여, 1950년 11월 10일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국무총리 인선 과정에서 이승만과 국회 간에 힘겨루기 끝에 나온 결과였다. 1950년 4월 이범석이 국무총리에서 사임한 이후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회에 승인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신성모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그 후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준을 임명 승인 요청했으나 그것도 국회에서 부결된 후 결국 장면을 추천하여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註38 장면의 국무총리 인준에 대한 국회 표결은 재석의원 154명 중 가 148, 부 6으로 통과되었다. 그 외에도 조병옥, 김준연, 허정, 신성모 등 민국당 출신 각료들을 다수 입각시켜 정부에 대한 야당의 비난을 줄이고자 했다.
전쟁 중 발생한 정부의 실정은 의원들의 반정부적 태도를 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국회 내의 소수파인 민국당은 압도적 다수를 점하던 무소속의원들과 합세하여 반이승만 발언권을 강화했다. 부산임시수도에서 제2대 국회는 정부가 전쟁수행과정에서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들을 조사하였는데,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대표적이었다. 국회의 사건조사와 처리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추락했다.
③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의 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또다시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하하게 되었다. 전세가 불리해지던 11월 20일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대상은 만 17~40세까지의 청장년으로, 정규군 이외에 예비병으로 편성되어 훈련 받았으며 필요할 때 집단적으로 소집될 수 있도록 하였다. 소집된 방위군은 대부분 강제 징집되었고, 5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중국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게 됨에 따라 방위군을 집단적으로 후방으로 이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위군 간부들이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처분한 결과 방위 군인들이 물자와 식량, 보급 부족으로 천여 명 이상의 사망자와 병자가 발생했다.
註39
방위군 간부가 부정처분한 금품이 신정동지회 등에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註40 이에 국회에서도 3월 29일 국민방위군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활동을 벌였다. 각 정파에서 호선하여 15명을 선출되어 근 40일간에 걸쳐 부정행위를 파헤쳤다.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을 해체할 것을 결의하고
註41 이 사건을 일으킨 김윤근 이하 간부 몇 사람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 註40
- 국민방위군 문제는 피란 국회 개회 첫날부터 비화되어 결국은 정치적으로는 거창사건, 신정동지회의 와해, 서민호사건, 정치파동 등을 거쳐 정계 개편으로까지 몰고 갔다(중앙일보사 편, 1983, 『민족의 증언』4권, 114쪽).
1951년 2월 중순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공비 토벌 차 출동한 국군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주민 수백 명을 공비에게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불법 살해한 것이었다. 거창 사건은 전쟁 시기에 한국정부가 이른바 ‘용공분자’에 대한 무차별 투옥과 학살을 벌인 사건들 중 한 예에 불과했다. 그 밖에 산청·함양·합천·남원·순창 등 곳곳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註42 국회가 조사단을 거창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에 착수하였으나 경남지구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공비로 가장하여 국회의 현지답사를 방해하는 ‘조사단 피격사건’이 벌어졌다. 정부와 국회 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국회에서는 그 불법성을 지적하고 관계책임자를 처벌하기로 결의했다.
註43
그런데 이승만은 이 두 사건을 빌미로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면서 민국당계의 조병옥내무장관과 김준연법무장관을 동시에 인책 사직케 하고, 그 후임으로 내무에 이순용, 국방에 이기붕, 법무에 조진만, 농림에 임문항 등 자파세력을 등용했다. 전쟁이 나자 일종의 거국내각 형식으로 민국당계의 두 사람을 내각에 둔 것인데, 이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새 정치세력을 구축하려고 한 것이다.
註44 이승만은 행정부 내 민국당 세력의 성장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개각을 단행한 데 이어 민국당계 경찰간부 및 공무원들도 대량 해임했다. 국회가 불만을 표시하면서 정부와 국회간의 마찰이 더욱 심해졌다. 국회 내에서도 정부의 무책임에 대한 공방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시영 부통령이 1951년 5월 10일, 일련의 사태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양대 부정사건을 더 적극적으로 조치하여 국민의 의혹을 풀어야 할 것이며, 전쟁 발발 이후 모든 불미스러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승만대통령이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이시영 부통령 사임 이후 5월 16일 후임 부통령 선출을 위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민국당은 김성수, 여당세력인 신정동지회는 이갑성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했는데, 투표결과 재석 152명 중 김성수 78, 이갑성 73, 기권 1표로 김성수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공화구락부가 민국당과 합작하여 김성수를 부통령후보로 내세워 신정동지회 등 여권이 미는 후보를 누른 것이었다. 민국당에 비판적이었던 공화구락부가 민국당과 손을 잡았다는 것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운동으로 이어졌다.
註45
반면에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김성수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이승만의 정치 장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었고, 내각책임제는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이승만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국회 내 반이승만 야당연합세력이 강화되자 이런 상태에서는 국회 간선제로 자신이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승만은 신당을 조직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이루고자 했다.
(2) 정부의 대통령직선제개헌안 : 1951년 11월 30일
① 이승만의 신당 결성과 직선제개헌 추진
이승만은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집권당을 조직하여 의회 내에 지배력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제헌국회 기간 중에 집권당 형성에는 실패하였다.
註46 그러나 1951년 이시영의 부통령 사임과 민국당 김성수의 부통령 당선을 계기로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론이 제기되자 이승만의 위기감이 커졌다.
註47 이에 이승만이 1951년 8.15경축행사에서 신당 결성에 관한 담화를 발표한 후,
註48 원내외에서 신당을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註46
- 이승만이 정부수립 직후부터 정당조직에 관여했던 것에 대해서는, 백운선, 1992, 「제헌국회내 ‘소장파’에 관한 연구」,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75쪽; 서중석, 1997, 「이승만정부 초기의 일민주의」, 『진단학보』83집, 164~165쪽 참조.
원내에서 신당 조직 운동을 통해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합쳐서 1951년 5월 29일 공화민정회가 발족했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무소속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무소속구락부가 1950년 11월 공화구락부가 되었고, 공화구락부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다루면서 민국당과 합세하여 정부를 질책하는 야당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부통령선거에서 민국당의 김성수가 당선되자 위기감을 가진 신정동지회는 국민방위군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이 있어 곤란한 처지였던 차에 공화구락부와 함께 공화민정회를 발족시켰다. 이렇게 합쳐진 공화민정회는 원내 108석을 차지하는 거대 교섭단체로 등장하면서 신당조직의 모체로 부상했다. 국회의원 수는 공화구락부가 39명, 신정동지회가 69명으로 신정동지회가 더 많았지만, 신당작업은 공화구락부 측이 주도했다.
註49
이들은 통합을 통해 원내 안정세력을 구축하여 신당을 조직하고, 민국당을 견제하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자 했다.
註50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 대표는 통합에 앞서 내각책임제 개헌에 합의했는데,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임명 조각케 하고, 그 대신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는 형태였다. 통합과정에서 이승만에 대한 지지 여부와 차기 대통령 추대 문제 등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결국 절충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원수의 상징적 지위에 두고 장면을 내각제 하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데 합의했다. 공화민정회가 구상한 정부형태는 순수한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상징적 대통령을 둔 내각제였다.
註51 민국당과 공화민정회 간에 정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원들의 이합집산도 계속되었다.
신당 운동이 추진되는 시기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이 내놓은 개헌안이 원내외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원내 인사들은 정부 개헌안에 반대했는데, 현직의원들로 대통령선출권이라는 권한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으며, 단원제가 가진 강력한 입법권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기득권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원외 측은 이승만이 제기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즉각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원내외의 이견 조정이 실패하자 원내와 원외에 동일한 이름의 두 개의 자유당이 창당되었는데, 1951년 12월 23일 신정동지회를 중심으로 원내자유당이 결성되었고, 원외 친여단체들은 따로 원외자유당으로 결성했다.
개헌문제에서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은 애초부터 입장이 달랐다. 원내파는 내각제 개헌을 단행하여 이승만을 상징적인 국가권수에 머물게 하고 현 국무총리인 장면을 내각책임제 하의 실권 있는 국무총리로 임명할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반면에 원외파는 이승만과 이범석을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각각 정·부통령에 재선시키고 의회를 약화시키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註52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에 대해 전격적 지지를 표명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개헌을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승만의 일방적 지지와 경찰 및 공무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원외자유당은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원내자유당의 와해 및 흡수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원내 자유당은 잔류파(간부파)‘와 원외자유당으로의 ’합동파(삼우장파)‘로 또다시 분열되었다.
②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제출과 부결
1950년 11월 7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대통령은 법제처에 헌법개정안을 입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시점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여 통일을 앞두고 새로운 헌법으로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 1950년 5.30 선거 결과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경우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부의 개헌 논의는 중국군의 참전과 1.4후퇴로 진척되지 않다가, 1951년 10월 9일 제108회 국무회의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접선거, 양원제 등에 관한 헌법 개정과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을 법제처와 법무부에서 협의하여 입안하라고 유시를 내렸다. 1951년 10월 16일 제110회 국무회의에서는 법제처에서 작성한 ‘헌법개정안 요령’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정·부통령의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구성이 핵심으로, 국회는 제1원과 제2원으로 구성하여 행정부와 의회 사이의 의견 조정을 꾀하고자 했다.
註53
정부개헌안은 1951년 11월 30일 국무위원 13명이 발기한 ‘헌법개정제의’를 관보에 공고하였다. 총 26개조와 부칙을 개정하는 개헌안으로, 국회에서 1952년 1월 17~18일 이틀간 찬반 토론이 진행되었다. 정부개헌안의 핵심은 정·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통령·부통령을 국민직접선거로 하고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모두 궐위된 때에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직무를 집행하고 즉시 그 후임을 선거한다.
둘째, 국회를 상·하 양원제로 하고, 상원의 구성은 도단위의 대선거구로 하는 지역대표로 하여 그 임기는 6년인데, 2년마다 3분지 1을 개선하여, 그 권한은 하원과 같고, 다만 하원은 예산안의 선심의권을 갖는다.
정부는 그 제안 이유 설명에서 양원제의 장점으로, 첫째, 경솔 부당한 의결과 과오를 피하고, 둘째, 다수당의 전제를 방지하고, 셋째, 정부와 국회의 충돌을 완화시키고, 넷째, 상원에 비교적 노련하고 원만한 인물을 선출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회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통령 직접선거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중책을 가지므로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며, 삼권분립주의를 원칙으로 하는데 입법부인 국회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선거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이 정부 개헌안에 반대했다. 반대이유로는, 양원제의 경우, 필요하지 않으며, 전시상황에 적절하지 않고, 상하원에 차이가 없고, 재정상의 문제도 있으며, 결국 이승만이 국회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방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통령직선제의 경우, 독재를 초래할 수 있으며, 아직 미숙한 국민들이 권력에 이용되고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민 상호간에 반목과 질시가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註54
이 정부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국회 제9차 본회의에서 재석의원 163명 중 찬성 19, 반대 142, 기권 1표로 압도적인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당시 원내 세력분포는 민국당 39, 민우회 25, 원내자유당 93, 무소속 18이었다. 원내 자유당이 이승만의 의도를 따라주지 않은 것으로, 의원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최대 권한인 대통령선거권을 양보할 리가 없었고 입법권의 독점을 포기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었다.
註55 표결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대다수 국회의원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나 내각책임제를 지지했다.
국회 표결 이후에도 1952년 3월까지 자유당의 원내외 통합공작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원내자유당은 위원장제를 채택했고, 원외자유당도 단일 정당조직을 완성하여 당수에 이승만, 부당수에 이범석을 선출했다. 원외자유당의 임원진은 국민회, 청년단, 이범석의 족청출신으로 대별되며, 창당 3개월 만인 1952년 3월 20일 개최되니 제1차 전당대회에서 이미 당원수가 26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③ 대중동원과 통제 강화
정부개헌안이 부결된 후 정부와 국회의 극단적 대립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대중동원을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방의원 선거와 내각체제 구축을 동시에 진행했다. 1952년 4월~5월에 실시한 지방의원 선거도 그 일환이었다. 정부개헌안이 일차 부결되자 지방의회를 구성하여 개헌지지 세력을 만들어 국회와 대결하려는 의도였다. 한편으로는 국회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대중동원의 강도를 높이고 내각을 교체했는데, 내무부차관 장석윤을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註56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을 안건으로 다룸으로써 내각을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 참석해서 개헌 관련 유시를 내리고, 국무원들은 국회가 제출한 개헌안에 대한 반대논문을 유명인사들로 하여금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하도록 하고, 정부개헌안을 반박하는 데 대한 반박문을 발표시키거나 국회의 정부 개헌안 반대 국회의원들의 동향 검토까지 했다.
대중동원은 원외자유당과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의 대중단체가 주도했지만 내무부가 이들 데모를 지원해주었다. 정부개헌안 부결된 후 국회의원 추방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고, 과격시위로 변질되었다. 1952년 2월 대한청년단과 지방의회가 주도하여 부산임시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요구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정부개헌안이 부결된 후 1952년 2월 16일 이승만은 국회의원 소환 관련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국회의원을 소환하는 것이 헌법에 없다고 말하나 소환하지 말라는 조건 또한 없으므로, 주권자인 국민이 자기 대표를 소환하는 것을 이론적으로나 법리적으로 막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중을 선동했다. 이승만의 담화가 발표되자마자 2월 18일 국회의원 소환데모가 발생했다. 국회는 국회의원소환문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에 대처했다.
한편 이에 앞서 1952년 2월 5일 부산 무구 달성 등 8개구에서 국회의원보궐선거가 실시되어 원외자유당계가 7명, 무소속이 1명 당선되었다. 1952년 3월 20일 원외자유당은 당세를 확장하고 의원포섭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원내지유당 중 합동공작에 호응하는 의원들은 삼우장(三友莊)을 근거지로 하는 합동파(삼우장파)와
註57 잔류파(또는 간부파)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3. 1952년 5.26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1)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
①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 1952년 4월 17일
개헌안을 둘러싸고 국회와 정부 간에 정면충돌로 이어지면서 정부와 국회는 각각 개헌안을 제출했다. 민주국민당과 원내자유당 간부파인 구공화구락부, 민우회의 일부 및 무소속 일부의원들이 개헌안을 두고 야당연합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내각책임제개헌안을 작성하고 서명공작을 하는 동시에 4월 10일 개헌서명의원 간담회를 개최하여 원내자유당 6명, 민주국민당 4명, 민우회 3명, 무소속 2명으로 ‘국무원책임제개헌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개헌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4월 17일 원내자유당 93명 중 48명, 민주국민당 39명 전원, 민우회 25명, 중 21명, 무소속 26명 중 15명의 서명으로 곽상훈 의원 등 123명이 총 12개조와 부칙을 수정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안·발의했다. 123명은 당시 헌법 개정을 위한 재적 국회의원의 3분의 2보다 1명이 더 많은 숫자로, 1951년 1월 1차 내각제개헌안 제출 때와는 달리 강한 추진력을 얻은 것이었다.
야당이 제출한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註58 첫째,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1차 지명에 대한 승인을 얻지 못한 후 5일을 경과하거나 2차 지명에도 승인을 얻지 못하면 국회가 지명한 자를 임명한다. 둘째, 국회는 국무원의 조직완료 또는 총선거 직후의 신임결의로부터 1년 이내에는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국무원의 불신임결의를 못하게 한다. 셋째, 대통령은 국회가 그 임기 중 재적의원 3분지 2에 달하지 못한 찬성에 의한 국무원불신임결의를 2회 이상 행하였을 때에 한하여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있게 한다. 넷째, 국회가 해산되어 총선거를 할 때에는 국무총리와 내각부장관은 즉시 그 직권이 정지되고, 국회는 총선거기간 중 국무총리와 내무부장관의 직권을 대행할 자를 선거한다.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을 행정권에서 분리하고 국무총리가 국무를 책임지는 내각제에 있었다. 즉 대통령을 형식적·상징적 지위에 두고 실제 행정은 국무총리와 내각에 맡기자는 것으로 1951년 1월 27일 서상일 등 79인이 제출한 개헌안과 같은 내용이었다.
국회는 1952년 4월 20일부터 20일간 지방선거감시 및 지방실정 시찰을 위해 임시 휴회했다. 그런데 1951년 11월 제2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던 장면이 4월 20일 돌연 사임하고, 다음날 이승만은 국회부의장 장택상을 그 후임으로 지명했다. 5월 6일 국회가 긴급히 재개되어 국무총리임명승인에 대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장택상은 국회에서 개헌안이 제출되던 1952년 4월 개헌안 서명 의원들을 상대로 ‘개헌에 대한 4원칙’을 내걸고 또 다른 서명 작업을 벌였다. 장택상이 제시한 네 가지 조건은, 첫째 개헌을 추진하되, 둘째 개헌 내용 재검토, 셋째 개헌안 제출 상정시기 고려, 넷째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를 미리 정해둘 것 등이었다.
註59 장택상의 원칙에 동의한 의원들이 4월 19일 이미 30명이 넘었다. 마침 4월 19일 장면 총리가 사표를 제출하자 이승만대통령은 장택상 국회부의장을 국무총리로 지명해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장택상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문제를 두고 개헌을 추진하던 세력 내에서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장택상이 내세운 4원칙만으로는 태도가 불분명했지만, 향후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을 완화하고 수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민우회와 원내자유당잔류파 의원 일부가 장택상으로 지지함으로써 장택상 총리임명 승인은 95대 81표로 가결되었다.
註60 이로써 개헌 정국은 자유당합동파와 신라회를 축으로 한 내각제 반대 세력과 원내자유당(잔류파)과 민국당이 중심이 된 내각제 개헌세력의 대결구도를 형성하였다.
한편 국회 휴회 중인 4월 22일 내각책임제 개헌 추진의 주도인사인 서민호의원인 지방선거시찰차 전남 순천에서 현역육군대위 서창선과 시비 끝에 권총으로 서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회는 정당방위라고 석방을 주장하고 정부가 이에 반대하면서 논쟁을 벌였으나, 국회는 5월 14일 서민호의원의 석방을 가결했다.
註61 개헌파동이 한창 고조될 무렵에 발생한 서민호의원사건은 국회에서 열세로 궁지에 몰렸던 정부에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여야의 대립이 더 날카롭게 되고 국회에서의 서민호의원 석방결의안 가결은 결과적으로 정부로 하여금 비상상계엄선포의 구실로 삼게 했다. 정부가 이 사건을 큰 정치문제로 삼은 것은 서민호의원이 거창사건·국민방위군사건 등을 통해 대정부 공격에 앞장섰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적극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註62
②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수정 제출 : 1952년 5월 14일
1952년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는 장택상 국무총리가 나서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과 내각제 개헌안을 절충하여 정부측 안으로 국회에 다시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절충안이라기보다 1월에 부결된 정부개헌안에 국회의 권한을 약간 강화한 것으로, 하원에 우월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틀 후인 1952년 5월 14일 정부는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 개헌안을 다시 제출하였다. 1월에 부결된 것을 약간 수정한 것으로, 총 19개조와 부칙을 수정하였다. 1월에 부결된 개헌안과의 차이는, 첫째 국무위원은 하원의 승인을 얻고, 대사 공사는 상원의 승인을 얻어 임명한다, 둘째 먼젓번 개헌안에서는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당연히 대통령이 되게 되었으나 이 경우에는 선거하게 한다. 셋째, 상원의원 중 국민이 선거한 의원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의원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와 학계에 명망이 있는 자 중에서 국무회의의 의결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넷째 양원합동회의에 있어서 또는 의안선거권 등 하원에 우월권을 준다는 등이었다.
註63 명칭은 양 개헌안 조항을 발췌한 것이라고 했으나 정부안인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핵심이었다.
또다시 정부개헌안이 제출된 후 원외에서는 민족자결단, 백골단, 딱벌떼 등 데모대가 국회 해산과 국회의원 소환 등을 외치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대중동원의 배후에는 1952년 초 이범석이 주축이 되어 지방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한 원외 자유당이 중심에 있었다. 1952년 초 실시된 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도 8개 선거구 중 7개 선거구에서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뒀는데, 국민회와 청년단체, 경찰이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보궐선거에서의 승리로 원외자유당이 더욱 확대되었고, 초대 지방의원 선거전에서 하부조직이 더욱 강화되었다.
1952년 4월 지방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지방의원 선거를 실시한 이유는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헌헌법에 따라 지방의회 선거제도를 규정한 ‘지방자치법’이 1949년 7월 공포되었고, 1950년 12월 제1대 지방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전쟁으로 지연되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과 5월에 걸쳐 지방자치선거가 강행된 이유는 이승만의 의회 내의 반대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 ‘민의’를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註64
당시 지방선거는 지방자치단체 의회에만 적용되었으며,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임명제로, 시·읍·면장은 지방의회에서 간접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선거가 적용될 수 있는 행정단위는 서울특별시 및 도의회와 시·읍·면의회였다. 전시상황이라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강원도의 계엄령이 선포된 일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4월 25일 시·읍·면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10일 도의회 선거가 시행되었다. 당시 지방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킨 정당 단체는 자유당, 민국당, 국민회, 대한청년회, 노총 등으로 민국당으로 제외하고는 모두 친정부계 단체들이었다.
註65
1952년 지방의원 선거에서 원외자유당이 각급 지방의회에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지방의원선거에서 원외자유당은 시·읍·면 의원 총수 17,544명 중 4,444명을 당선시켰고, 동계열인 한청이 2,843명, 국민회가 2,621명, 노총이 23명으로 56% 차지, 도의원 총수 306명 중 자유당 147명, 한청 24명, 국민회가 32명으로 70% 획득. 원외자유당의 세력은 외부로부터 국회를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었다.
註66 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자유당과 정부 외곽 단체인 국민회는 국회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며 국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52년 5월 19일 서민호의원이 검찰당국의 항고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49조에 의하여 석방되자 지방도민대회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주장하며 민의를 표시한다는 결의와 진정서가 날아들었다. 부산의 임시국회의사당앞 충무로광장에서는 반민족국회의원 성토대회가 열렸다. 반민의국회의원규탄 국민대회, 민족자결선포대회가 날마다 열리고, 데모 군중이 국회 앞에 시위단을 형성하고 개헌추진 중심인물로 지목되는 14명의 의원을 제명 처분할 것을 건의하는 결의를 하고, 도처에서 국회를 해산하라는 벽보와 반민의 의원이라고 지명된 의원의 인신공격성 벽보로 도배되었다. 5월 23일에 서민호의원을 살인국회의원이라고 하여 반민족국회의원 소환 등을 주장하며 시위가 점점 험악해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시위대는 대통령관저를 방문하고 청원서를 전달하는 등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과격해졌다.
(2)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안’ 통과
① ‘5.26 부산정치파동’
1952년 5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했다. 이범석은 족청단장이자 원외자유당 부당수로 조직력 확대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강압적 행동에 착수했다. 이범석의 내무부장관 임명과 동시에 다음날 오전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23개 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註67 헌법에 규정된 국회 승인도 없이 ‘공산분자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것으로, 이른바 ‘5.26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한 야당의원들에 대한 탄압의 시작은 1952년 4월 22일의 서민호의원 사건에서 시작되어 국제공산당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국회의 내각책임제개헌론의 선두주자였던 서민호의원이 국회의 석방 결의로 풀려나자 대중 시위가 살인국회의원규탄대회로 확산되었다. 이를 빌미로 5월 24일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5월 26일 정오 무렵, 국회버스로 등원하던 47명의 국회의원이 임시의사당인 경남도청 정문에서 헌병대에 의해 차에 탄 채로 끌려갔다. 완전무장한 헌병대가 버스를 포위하고, 버스에 국제공산당의 비밀공작자금을 받은 국회의원이 있다고 불심검문을 하려고 했다. 의원들이 차문을 굳게 잠그고 저항하자 헌병대는 크레인을 동원하여 버스를 토성동에 있는 헌병대 본부로 끌고 갔다. 원용덕을 통해 헌병대를 동원한 것은 계엄사령관인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일선부대의 계엄군 차출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註68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발표함으로써 군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이승만 정권과 대립했다.
註69
5월 26일, 헌병대에 연행된 7인 중, 민국당의 서범석, 임흥순의원과 원내자유당의 이석기, 민우회의 김의준, 무소속의 이용설 의원이 국제공산당의 정치공작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구속된 야당의원들이 집중적으로 심문 받은 것은 “정치공작금이 어디서 조달된 것인지”와, “왜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느냐”였다. 전시 중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고 국정을 혼란케 한 것은 이적죄가 성립된다는 논리였다. 이후 계엄사령부는 ”야당의원들이 일본 조총련에서 유입된 국제공산당의 비밀공작비를 정치자금으로 받아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註70
5월 26일 새벽, 원내자유당의 정헌주 의원과 민우회의 장홍염 의원, 민국당의 양병일 의원 등이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같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서민호 의원도 재구속되었다. 5월 30일에는 무소속의 곽상훈, 박정근 의원이 구속되고, 이후 권중돈 의원도 구속되어 총 12명이 구속되었다. 장면도 이 사건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었다.
註71 내무부는 장면이 ‘대한민국 정부혁신전국지도위원회 음모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국제공산당사건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조작극이었다.
1952년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이승만의 정치적 실정과 독재를 비판하면서 국회에 사임청원서를 제출했다. 다음날인 5월 30일 국회는 비상계엄을 즉시 해제할 것과 체포된 11명의 국회의원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하는 등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더 강경한 태도로 국회 해산까지 들고 나왔다. 5월 29일 이승만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여, “현 위기의 책임은 공산주의자의 음모공작, 게릴라 활동 및 ‘반항적’인 국회의원들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註72 그리고 국회를 해산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이승만의 성명과 동시에 5월 29일까지 7개 도의회에서 국회해산을 결의했다. 6월 12일에는 지방의회대표들이 반민의 국회해산 총궐기대회를 열고 국회해산을 결의하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과 대통령 임시관저 앞에서 국회해산 데모를 벌였다. 비상계엄령 선포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는데도 국회 성토 데모는 연일 부산 시내를 누볐다.
註73
이러한 정치상황에 대해 유엔과 미국은 우려를 표했다. 한국의 정치파동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16개국을 동원하고 있는 유엔의 권위를 무색하게 하고, 미국을 국제여론상 궁지에 몰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내정의 혼란은 결국 전쟁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을 것이었다.
註74 5월 26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은 부산지역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권고했다. 미국이 국제 여론을 의식해서 직접적으로 한국에 압력을 가하기보다는 유엔기구를 내세워 이승만의 국회 탄압을 제제하는 정책을 택했던 것이다. 위원장 플림솔(Plimsoll)을 비롯한 위원들이 5월 28일 이승만을 방문하고, 한국의 헌법 조항을 근거로 계엄령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부산시의 계엄령 해제, 국회의원 석방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전달했다.
註75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음날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 라이트너는 계엄령 조기 해제를 촉구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2일 이승만대통령이 정부개헌안에 찬성하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에 현재의 정치 위기를 완화할 조치를 취하고, 국회를 해산하지 말라는 각서를 보냈다. 이승만은 6월 4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정치정세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국회해산은 민의에 의거할 것”이라고 답신을 보냈다.
자유당의원들은 유엔위원단의 권고는 내정간섭이므로 외무부책임자를 출석시켜 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개헌추진파의 반대로 이 안이 폐기되자 6월 3일부터 국회 출석을 거부하였고, 신라회의 다수 의원들도 여기에 가세하였다. 이에 국회는 성원 부족으로 4차례나 유회되었다. 6월 5일 국회는 개헌파만으로 성원을 유지하여 국회 출석을 거부하는 의원들에게 출석을 권고하기로 가결한 후, “6월 6일 이후 개헌안 심의, 18일 정·부의장 선거, 23일 이전에 정·부통령선거를 국회가 행할 수 있도록 국회기능을 보장하라”고 정부에 경고했다.
註76 그리고 6월 11일에는 비상사태수습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출석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이를 묵살하고, 행정부와 국회의 협상 시기는 이미 지났으니 국회가 민의에 따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것만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는 서한을 국회에 보냈다.
註77
미국은 정치파동이 미국의 신뢰와 위신을 크게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여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註78 미국 내에서는 국무부와 군부가 해결책을 두고 입장이 달랐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함으로써 미국의 위신을 지키고자 하였던 국무부와 군사안보를 중시하는 군부가 부산정치파동 발생 이후 약 열흘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국무부는 한국군을 통한 직접적 군사적 개입안을 주장한 데 반해 군부는 외교적 채널을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민간인 중심의 국무부는 군사적 수단을, 군인들은 외교적 수단을 선호한 것이다. 1952년 6월 4일 국무부-합참(JSC) 합동회의에서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군사안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유엔군에 의한 직접 개입이나 한국군에 의한 쿠데타 계획을 용인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승만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과 군부정권보다는 민간정권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인 인정한 것이다. 이승만 주변의 강경세력을 배제하고 온건한 세력을 포진시키려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註79
- 註78
- 이 시기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에버레디 계획)을 본격 검토하였고, 한국군부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고 극비리에 미국과 협조를 모색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이완범, 2007, 「한국 정권교체의 국제정치」, 『세계정치 8』 제28집 2호, 2007년 가을·겨울, 137~138쪽).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한국내 정치상황에 우려를 표했지만, 결국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용인하되 다만 절차 면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註80 군사적 개입을 피하고 다소 순화된 형태로 이승만의 리더십을 인정할 것과 장택상의 발췌개헌안이 가장 바람직한 타협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6월 7일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Halvdan Lie)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한국정부는 민주정체를 파괴할 우려가 있는 전제적인 방법을 쓰고 있으며, 현 정세는 한국에서의 유엔의 입장에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사건이 발생했다. 정치테러와 관제민의 동원 등으로 정국이 걷잡을 수 없는 불안상태에 놓였을 때, 6월 20일 이시영, 김성수 등 재야원로 66명이 부산시 남포동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호헌구국선언대회장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유혈소동이 벌어졌다. 대회장에 있던 조병옥, 유진산, 김도연 등이 연행되었다.
註81 이 사건으로 야당 세력은 더욱 위축되었다.
한편 1952년 6월 이승만정권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키고자 100억 원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중석불(重石弗) 사건’이 드러났다.
註82 1952년 7월 18일 국회특별조사위원회 12명이 조사 활동을 벌여 폭리 구조를 밝혔으나, 이 사건을 주도한 재무장관 백두진 등 재무부는 처벌받지 않았다. 중석불 사건은 이승만 정권 시기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자 경제범죄로 정경유착의 시작이었다.
註83
- 註82
- 원래 중석불이란 우리나라의 중석을 수출하여 얻은 은행달러로서, 당시의 정부 시행규칙에 의하면 정부보유불 또는 중석불로서 양곡이나 비료의 수입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과 가뭄으로 어려운 빈농과 영세민을 위해 중석불과 정부보유불로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했고 이에 관련된 무역업자들은 당초 목적과 달리 수입량의 80%를 자유 처분해 당시 원화로 50억 원의 폭리를 취했고, 그 절반이상이 정치자금으로 여당에 흘러들어갔다(조선일보사 간, 1981, 『전환기의 내막』, 613쪽).
② 발췌개헌안 국회 상정 및 통과
1952년 4월 17일 국회개헌안이 제출되어 5월 7일 공고한 결과 6월 5일 공고기일이 만료되었고, 정부개헌안도 5월 14일 국회에 제출되어 6월 12일에는 공고 기일이 만료되었다. 6월 21일 두 개의 개헌안이 동시에 상정되었는데, 제안 취지만 설명하고 질의 및 대체토론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국회 해산과 국회의원 구속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1952년 6월 20일 장택상을 중심으로 모인 일종의 친목단체라 할 수 있는 신라회가 준비해오던 발췌개헌안이 제출되었다. 신라회와 원내자유당합동파가 타협하여 정부와 국회에서 각각 제출한 두 개의 개헌안을 발췌하여 만들었다 하여 발췌개헌안으로 불렀다. 대통령 직선제, 상하양원제, 국무총리의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과 면직,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 등 4원칙을 토대로 기초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6월 25일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거행된 6.25기념식장에서 이승만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탄환 불발로 대통령 신변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국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 범인 유시태는 현장에서 체포되고, 배후인물로 전 민국당원인 무소속의 김시현 의원이 지목되었다. 서상일, 정용환 등 민국당 간부들과 몇몇 인사들이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6월 28일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데모가 벌어졌으며, 이에 호응하여 원외자유당은 배은희, 이갑성, 박영출 의원 등의 주도로 국회자진해산 결의안을 제출했다. 원외자유당 60여 명의 서명으로 국회에 제출된 국회자율해산 결의안의 제안 이유는, 서민호의원사건과 국제공산당 사건에 국회가 헌법 49조를 남용하여 석방 결의로 국민의 분노를 발동케 했고, 계엄선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으며, 내정 간섭한 유엔한위 성명 관련 동의를 묵살한 것은 외세의존의 사대주의이며, 대통령선거·헌법개정안 등 중대 안건을 놓고도 ‘의원의 성원미달로 유회’하는 것은 국회의 기능을 상실케 한 것이라는 등이었다.
註84 그러나 국회의 자율적 해산에 관한 결의안은 , 법률적 문제로 보류되고 제출되었다는 것만을 국회에서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註85
1952년 6월 30일 제12회 정기국회가 폐회하고, 7월 1일 제13회 임시국회가 소집되었다. 출석을 거부한 의원들을 경찰이 동원하여 국회에 들여보내고, 구금된 의원들을 의사당에 출두시켰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우려해 내각제개헌추진 의원들이 국회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을 신속히 처리한 데는 미국의 입장 변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정했던 것이다. 발췌개헌안이 상정되기 직전 주한 미대사 무쵸가 신익희 국회의장을 만나 발췌개헌안 통과를 당부했다. 이에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봉암 부의장 등이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정국이 최악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였고 발췌개헌안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던 것이다.
註86
1952년 7월 1일 제13회 임시국회가 개회되자, 7월 3일과 4일 이틀간 국회는 전원위원회를 열고 두 개헌안에 대한 정치협상을 시도했다. 개헌추진파는 계엄이 해제되고 구속된 의원이 석방되어 국회의 기능이 보장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타개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였고, 삼우장파는 정부제출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회해산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신라회와 자유당합동파(삼우장파)가 제3의 발췌안을 내놓았다. 이는 장택상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제시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회해산을 대신하여 해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註87 이 발췌개헌안에 서명한 의원은 자유당 합동파 63명, 신라회 30명, 자유당 잔류파 19명, 민우회 11명, 민국당 6명, 무소속 4명, 총 133명으로 재석 183명의 개헌정족수 3분의 2를 넘었다.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지청천 전원위원장이 보고한 개헌안에 관한 정치협상의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ⅰ. 신라회에서 입안한 양 개헌안의 종합 발췌안을 중심으로 토의할 것.
ⅱ. 동안(同案) 중 ‘상원’, ‘하원’을 ‘참의원’, ‘민의원’으로 개칭하고, 부칙 제3항 “상원은 본 법 시행 후 지체 없이 구성하여야 한다”를 삭제할 것.
ⅲ. 국회의원 제출 개헌안 중 70조 제2항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회에 대하여 국무원의 권한에 속하는 일반 국무에 관하여는 연대책임을 지고, 각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개별책임을 진다”를 현행헌법 70조 제3항으로 삽입할 것.
ⅳ.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거하자는 문제는 불문에 부칠 것.
ⅴ. 발췌안 제70조2항 중 ‘국회’를 ‘민의원’으로 자구 정리한다.
註88
그에 따라 정부제출 개헌안과 국회 제출 개헌안 두 가지 중에서 채택한 조문들만을 가지고 표결에 부치게 되었고, 7월 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서 재석 166 중 가 163, 기권 3표로 가결되었다. 정부는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이렇게 발췌개헌안이 급하게 통과된 데에는 대통령 임기와 차기 대통령 선거 시한 문제도 걸려 있었다. 1948년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었고, 그 시한이 1952년 8월 15일이었다. 당시 선거법에서는 선거일 40일 전에 선거공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발췌개헌이 이루어지고 7월 19일에야 ‘정·부통령 선거법’이 공포되어 이미 선거법이 정한 시한을 지킬 수 없었다. 이에 국회는 서둘러 정·부통령 선거법을 기초하여 1952년 7월 18일 공포하였고, 선거일이 8월 5일로 결정되었다.
선거준비기간은 17일에 불과했고, 선거일 8일 전인 7월 26일에야 입후보자들이 중앙선거위원회에 등록할 수 있었다. 선거운동기간은 단 8일이었다.
註89 촉박한 시일로 인해 선거 공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인지도와 관공리 및 경찰의 선거개입과 국민동원 능력이 관건이었다.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자유당내 최대세력인 족청계를 이끌던 이범석을 지명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이시영, 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지명하였다. 최종 대통령후보로 이승만, 이시영, 조봉암, 신흥우가 출마하고, 부통령 후보에 함태영, 이범석, 이갑성, 이윤영, 전진한, 임영신, 조병옥, 백성욱, 정기원이 등록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한 가운데, 관심사는 부통령 당선자였다.
선거 결과 이승만이 74.6%인 523만여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범석의 세력 강화를 두려워한 이승만이 행정조직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함태영의 선거운동을 하게 한 결과였다. 이범석이 이에 반발하면서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열과 비족청계열 간의 권력 다툼이 1953년 상반기까지 이어졌다. 1953년 9월 12일 이승만은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를 제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註90 이후 자유당에서 족청계가 제거되면서 이기붕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③ 제1차 개헌 : ‘발췌개헌’의 주요 내용과 평가
발췌개헌의 절차적 위헌성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래서 발췌개헌은 무혈쿠데타에 의한 개헌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註91 발췌개헌은 헌법규정과 법원리(적법절차의 원칙)를 무시한 위헌적 헌법개정이었다. 발췌개헌은 공고의 절차를 위반하였고, 국회의원의 토론의 자유 없이 강행된 것이기에 투표의 자유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위헌이라고 본다.
註92 절차적 위헌성의 근거로는,
첫째, 헌법 제98조 제2항에 의하면 헌법개정절차에 있어서 대통령이 30일 이상의 공고기간을 두어 국민에게 개정될 헌법의 내용을 충분히 알리고 주지시켜야 하는데 이를 무시함으로써 공고절차를 위배하였고(공고절차의 위배),
둘째, 정부 측에서 제출한 개헌안은 제2차 개헌안과 동일한 내용의 개헌안을 동일한 회기 중에 제출한 것이 되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정확하게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에 저촉되며,
셋째, 의원들이 야간국회의 구금상태에서 기립표결을 통하여 통과되었다는 점에서 위헌이다.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아니하고,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의사가 억압된 상태에서 행하여진 강압에 의한 투표이므로 투표의 자유(자유투표의 원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1차 개헌과정에서 있어서 국가긴급권을 발동한 점으로, 정부는 무장공비잔당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전남북과 경남지방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위기감 및 공포분위기 조성’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때의 국가긴급권의 발동은 억압과 강제에 의한 개헌과정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이후의 헌정사에서 개헌을 위한 국가긴급권 악용의 선례 및 오점을 남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註93
제1차 개헌(발췌개헌)안은 오로지 통치구조 부분에만 한정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개헌안을 조문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註94 :
⦁이승만이 요구하였던, 대통령·부통령의 선출은 국민직선제로 개정되었고(제53조)
⦁정부·여당의 주장에 따라,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로 구성하였고(제31조),
⦁민의원 의원은 4년(제33조 제1항), 참의원 의원은 6년의 임기로 하되 2년마다 의원 3분의 1을 개선하며(제33조 제2항), 법률안 기타 의안에 관하여 양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할 때에는 각원(민의원·참의원)의 재적과반수가 출석한 양원합동위원회에서 출석의원 과반수로서 의결하며(제37조 제2항),
⦁야당의 주장을 반영하여,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국무위원 임명에 있어서 국무총리의 임명제청권)으로 대통령이 임면하고(제69조 제4항),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무원에 속하는 일반국무에 대하여는 연대하여(연대책임),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는 개별적으로(개별책임) 국회에 대하여 책임지며(제70조 제3항),
⦁의원내각제적 요소로서, 민의원에서 국무원불신임 결의를 하였거나 민의원총선거 최초에 집회된 민의원에서 신임결의를 얻지 못한 때에는 국무원은 총사직하여야 하며(제70조의 2 제1항),
⦁헌법개정은 대통령, 민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 참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제안하되(제98조 제1항), 헌법개정안에 대한 의결은 양원(민의원·참의원)에서 각각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써 하도록 하였다(제198조 제4항)
이 개헌으로 국회는 대통령 선출권을 박탈당하고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나 여전히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행정각부의 장관인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면하도록 되어 있었다.
둘째,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회에 대하여 국무위원의 권한에 속하는 일반국무에 관하여는 연대책임을 지고 각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개별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셋째, 양원 중 민의원이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를 하면 국무위원은 총사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에 의해, 그리고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권에 의해 제약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권력분립의 원리는 애초부터 무시하고 선거와 국회를 비정상적으로 이용하는 강력하고 권력집중적인 대통령이 이미 존재하고 그 권력의 공고화를 위하여 직선제를 수립하여 가는 마당에 국회에 그러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정치적 명분포장과 회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註95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존중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제청권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창당한 자유당이 국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어 국회로부터도 견제를 받지 않고 계속 독주할 수 있었다.
註96
또한 제1차 개헌 결과 국회는 양원제가 되어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1954년 제3대 국회부터 민의원으로 개칭하기는 하였으나, ‘민의원의원선거법’은 1958년에서야 제정되었고, 참의원의원선거는 제1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실시되지 않아서 실제로 양원제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정치구조 면에서는, 개헌과정의 비민주적 행태나 위헌성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무원 불신임제를 도입함으로써, 의원내각제의 내각불신임제와 유사한 제도로서 전통적인 대통령제적 모델을 제헌헌법보다 더욱 일탈한 모순을 내포하게 되었다.
註97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도 발췌개헌안이 이론적으로 보면 불합리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애초에 철저한 대통령책임제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도 아니어서 여유가 있었던 것이 발췌안이 채택되어 한쪽으로 대통령책임제가 강화되고 또 한쪽으로는 내각책임제가 강화되었으니 이상스럽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註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