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법 개정의 배경
1948년 7월 17일부터 시행된 제헌헌법 이후 1952년, 1954년, 그리고 1960년에 있었던 두 번의 헌법 개정까지 합하여 4회의 개정을 거친 우리 헌법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또 한 차례의 개정을 예고하였다.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를 해산하였다.
註01
군사혁명위원회는 곧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하였다.
註02
1961년 6월 6일 공포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다시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새로 수립될 때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최고 통치기관의 지위를 갖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또 대통령 궐위 시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무엇보다도 헌법 규정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내용이 상충한다면, 후자에 의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헌법을 대신하여 법체계에서 최고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에 이미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기로 천명한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국가재건비상조치법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통치할 수는 없었다. 1961년 8월 12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는 ‘정권이양시기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註03
성명의 내용은 정권을 민간에 언제 어떻게 이양할 것인지에 관한 구상이 주를 이루었다. 이 성명의 내용에 따르면 사회질서와 법질서를 정돈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1년차 계획을 추진하는 등 어느 정도의 목표를 달성하고, 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공포한 다음 같은 해 5월에는 총선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정에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차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책임제로 하며, 국회는 정원 100∼120명 사이의 단원제로 하고, 선거관리는 철저한 공영제를 실시하며 구정치인의 정계진출에 관한 입법조치를 취한다는 것 등 신헌법에 들어갈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1961년 8월 12일의 성명은 5차 개정 헌법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헌법 개정 절차
1960년 헌법 제98조에 의하면 대통령, 민의원 혹은 참의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민의원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이 헌법개정안을 제안할 수 있었다. 헌법개정안이 제의되면 대통령이 이를 30일 이상 공고하고, 민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이 의결되면 대통령이 이를 공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1962년 당시에는 국회가 해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에 의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이것은 당시 초헌법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몫이 되었다. 1962년 10월 8일 개정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제9조를 변경하여 헌법 개정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거친 후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서 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 국민투표에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 수권 조항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1962년 10월 12일 공포된 국민투표법이다. 이 법 제1조는 “본법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9조의 규정에 의한 국민투표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어,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절차를 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률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법을 통하여 투표권, 투표구, 투표인 명부, 투표 방법 등 개헌 국민투표에 필요한 제반 절차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의 내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7월 최고회의의원과 전문가로 구성된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헌법, 정치학, 경제학 등 전문가로 구성된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는 1962년 7월 16일부터 개헌안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였다.
註04
전문위원회에서는 헌법의 제정인가 개정인가, 국회의 형태, 정부형태, 경제조항과 경제심의위원회 설치 여부, 헌법재판소 설치 여부 등을 두고 여러 가지 토론이 있었다. 1962년 8월에는 심의위원회에서 어느 정도 간추려진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공청회가 이루어졌다.
註05
공청회 후에는 본격적인 헌법개정안 조문화 작업이 이루어져서, 1962년 11월 5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의 찬성으로 제안된 헌법개정안이 공고되었다.
註06
12월 6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본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이 의결되어 마지막 관문인 국민투표에 부의되었다.
註07
12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서 제5차 개헌 헌법이 확정되었다.
註08
다만 이 헌법이 시행되기까지는 다시 우여곡절이 있었다. 헌법 부칙 조항에서 헌법 효력 발생일을 이 헌법으로써 국회를 구성한 뒤 국회가 처음 집회한 날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선거 실시라는 과정을 거쳐야 헌법은 비로소 효력을 발생하고 민정이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3년 3월에는 본래 헌법 개정 공포일(1962. 12. 26.)로부터 1년 이내에 국회 집회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던 부칙 조항을 변경하여, “이 헌법에 의한 최초의 국회의 집회는 1967년 8월 15일 이내에 한다”는 내용을 넣기로 하는 1962년 개정헌법에 대한 개정안이 공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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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정안의 의미는 민정이양 시기를 늦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과 미국의 부정적인 입장 등 요인으로 인하여 이러한 개정안의 내용은 번복되었다. 그 결과 1963년 10월 15일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1963년 12월 17일 마침내 국회가 소집됨에 따라 5차 개정 헌법도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註10
이 헌법은 제정으로 할 것인지 개정으로 할 것인지가 문제되었을 만큼 1960년 헌법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註11
정당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의원내각제로부터 다시 대통령제로 회귀하면서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종전의 양원제에서 변경을 가하여 단원제를 택하였으며, 경제 부분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라고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註12
- 註11
- 이 헌법의 경우 헌법안 마련 단계에서부터 그 성격을 헌법의 “제정”이라고 할 것인지 “개정”이라고 할 것인지에 관하여 견해가 분분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조동은, 2016, 「1962년 헌법제정론과 헌법개정론의 논쟁에 대한 연구」, 『법학연구』 통권 제49집(전북대학교 법학연구소)
3. 개헌 관련 자료
1962년 헌법은 5·16쿠데타로 인한 비상상황에서 마련되었다. 1962년 헌법 개정 과정에 대한 가장 자세한 자료로는 1967년 국회도서관에서 출판한 헌법개정심의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당시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의 기록과 공청회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헌법 개정 절차와 관련해서는 개헌 논의의 시작을 알린 1961년 8월 12일의‘정권이양시기에 관한 성명’, 헌법 개정안 공고 및 헌법개정안 국민투표 부의 공고 등『관보』가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헌법안 심의 과정을 담고 있는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 회의록과 공청회 기록, 그밖에 헌법안 심의 절차에 대한 소식을 보도한 신문자료 등도 개헌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국민투표법 등 관련 법률도 헌법 개정과정에 대한 자료에 해당한다.
그밖에 5·16 쿠데타에 대한 미국 문서 등도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정사 자료집 편찬 연구용역 보고서: 제3, 4공화국 헌법 개정에 대한 자료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