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제헌헌법
- 1952제1차 헌법개정(발췌개헌)
- 1954제2차 헌법개정(사사오입)
- 1960제3차 헌법개정
- 1960제4차 헌법개정
- 1962제5차 헌법개정
- 1969제6차 헌법개정
- 1972제7차 헌법개정(유신헌법)
- 1980제8차 헌법개정
- 1987제9차 헌법개정(현행헌법)
시기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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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 해제: 1952년 1차 개헌 : ‘발췌개헌’ : 1948~1952 1. 한민당·민국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1) 의회와 행정부의 갈등 ① 초대 내각 구성을 둘러싼 갈등 개헌 관련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49년부터였다. 헌법 제정 당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은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구상하였지만, 이승만의 압력으로 대통령중심제로 수정하는 데 합의했다. 원래 헌법초안은 내각책임제로 준비되었으나 국무총리를 두는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되었고, 최종적으로 대퉁령중심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이 탄생했다. 그리하여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내각책임제의 내용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승만대통령과 한민당이 주도권을 두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개헌 논의가 시작되었다.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면서도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원(내각)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국무원은 대통령 및 국무총리, 각 부 장관으로 조직되는 합의체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 국책을 결의하는 기관이자 행정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 하의 내각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국무원 구성은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부의장으로 하며, 국무원의 의장인 대통령이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회와 정부 간에도 밀접한 관계가 아니다. 또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면서도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미국에는 내각에 해당하는 조직체가 없으며, 각부 장관들이 회의를 하는 경우는 있으나 이것이 헌법상의 기관이나 합의체는 아니었다. 정시채, 1985, 『한국행정제도사』, 법문사, 469쪽.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통치구조(대통령제·의원내각제)를 기계적으로 접목시킨 결과 정부 위기가 항상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정사와 유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통령제는 권력분립을 기본원리로 삼고 있고, 의원내각제는 권력융화를 기본원리로 삼고 있는데, 하나의 권력구조 안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를 기계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결국 정부기능의 마비만을 가져올 따름이라는 것이다. 제헌헌법에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면서도, 의회와 대통령 간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간선으로 임명되는 대통령의 권력기반을 국회에 두고 임기 4년·중임의 체제를 갖추면서도 대통령에게 내각(국무원) 임명권을 일임하고, 법률안거부권 및 법률안제출권을 부여하는 한편, 국회를 단원제로 하였다. 따라서 국회와 행정부가 대립할 때 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중간적 장치-예컨대 양원제, 또는 내각불신임권·국회해산권 등-가 결여되어 있었다. 한상희, 2000, 「전시체제에서의 헌법형성 1948~1954」, 『서울대학교 법학』 41(2), 51쪽. 특히 대통령중심제의 정부형태를 취하면서도 국무원을 심의기관이 아닌 의결기관(의원내각제적 요소)으로 하였고(제68조), 대통령 및 부통령을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써 간접선출하며(제53조), 국회의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게 하여(제39조) 의원내각제적인 요소를 절충하고 있다. 이는 결국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도 고전적 대통령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제헌국회는 2년의 임기를 가진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무소속이었고, 한민당이 하나의 정당으로서는 다수의석을 가졌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국민회)가 총 198석 중 55석으로 전체 비율의 27.5%를, 한민당이 29석으로 14.5%를 점하였으며, 대동청년단이 12석으로 6%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무소속이 총 85석을 얻어 전체의 42.5%에 달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8, 『대한민국정당사』, 178쪽. 그리하여 제헌국회의 주요정치세력은 한민당계와 이승만계로 대표되는 핵심 정치세력과 중도성향의 무소속, 그 외 유동적인 무소속으로 구성되었다. 여러 정치세력들은 대통령제와 내각제라는 두 가지 정부형태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나뉘어 있었다. 제헌의회의 세력 분포를 정부형태 구상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면, 한민당과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은 내각책임제를, 독촉계와 친이승만계 의원들은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가장 강력하게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하여 관철시켰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반면에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상징적 존재로 놓고 실질적으로는 국무총리 이하 각 부의 장·차관들이 정부를 운영해나가는 체제를 구상했다.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의 경우, 정치이념상 원칙적으로 한민당과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우위라는 기본적 권력구도에는 한민당과 의견을 같이했다. 의회와 정부의 관계에서 첫 대립은 초대 내각 조직문제를 두고 일어났다.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독촉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자 시도한 반면, 한민당은 미군정기부터 장악해왔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다. 중도파인 무소속구락부는 반(反)한민당의 위치에서 견제역을 담당했다. 한민당은 임정세력이 행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도파를 견제했으며, 김구나 조소앙을 입각시키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이승만세력과 한민당이 연합하여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중도파와 한민당의 대립 갈등을 이용하여 두 계열을 모두 배제하고 자파 인물을 내각에 기용하고자 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국회의 인준이 필요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앞장서 지지했던 한민당은 국무총리와 내각 인선에서 자신들이 등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의외의 인물인 이윤영을 국무총리에 지명하였고, 국회에서 재석의원 193명 중 가 59, 부 132, 기권 2로 부결되었다. 1차 지명이 부결되자 이승만은 2차로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8월 2일 열린 국회 제37차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가 110, 부 84로 가결되었다. 당시 국회 내 조직력을 가진 세력은 한민당,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족청) 등으로, 이승만이 족청단장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한민당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비록 임명동의안이 통과는 되었지만, 반대표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초대 내각은 이승만의 개인적인 신임을 기초로 선정되었다. 족청단장 이범석 외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이승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친정체제적 성격이 강했다. 초대 내각 구성과 인물에 대한 분석은, 이혜영, 2016, 「제헌의회기 한민-민국당의 집권 전략과 헌법 갈등」, 『사학연구』 124집, 180~186쪽 참조. 이러한 조각은 의회 내 세력분포를 무시한 것으로, 이승만정부와 의회와의 관계에서 대립과 파란을 불러왔다. 또한 이승만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형식적으로 각계 인사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자기 의사대로 결정했다. 각료를 임명하면서 이승만은 국무총리 이범석이나 부통령 이시영과 상의 한번 없이 거의 단독으로 진행하여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실권이 없는 자리로 만들어 버렸다. 내각 임면권을 대통령만의 고유한 권한으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② 각종 개혁법안을 둘러싼 행정부와 의회의 대립 1949년 국회에서 핵심적 안건들이 상정되어 심의·처리되는 과정에서 의회와 행정부 간에 상당한 마찰이 야기되었다. 이 시기 원내에는 여당 역할을 하는 이정회, 야당 역할을 하는 한민당과 소장파가 있었다. 독촉계와 대동청년단계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승만지지파가 ‘이정회’를 결성하였는데, 윤치영 등 50여 명의 의원을 규합하여 원내 여당적 존재로 활동했다(박찬표,1998, 「국회의 의정활동:분단·냉전체제하의 정치사회와 대의제 민주주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2, 오름, 310쪽). 이승만세력은 원내에서 열세였고, 의회가 행정부에 대해 우위를 보였다. 지방자치법 제정과정에 이러한 구도가 반영되었다. 지방자치문제는 국가의 권력구조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자 기존 행정 관료조직의 대대적 개혁을 의미했다. 제헌헌법 제96조와 제97조는 지방자치제와 지방의회 설치를 규정하였다. 국회에서 기초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1948년 9월 13일 정부에서 ‘지방행정조직법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군수와 도지사는 임명제로 하며, 미군정기 중앙집권적 경찰제를 존속하는 등 사실상 지방자치제 실시를 부정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 내무치안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던 소장파세력은 ‘지방자치에 의한 분권적 행정구조로의 개편’을 요구하였고, 이후 행정부와 의회 간에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지방자치제 시행시기로, 정부는 제2회 국회가 폐기된 후 5월 12일 일방적으로 지방자치법의 폐기를 국회에 통고했다. 소장파세력이 입법을 적극 주장한 반면, 의회 내에서도 여당격인 대한국민당과 야당을 자처한 민국당은 정부 요구대로 지방자치제 실시 연기를 주장했다. 지방행정권력을 둘러싸고 보수와 개혁세력의 대립구도를 보인 것이었다. 개헌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6월부터였다. 이 시기에 터진 농촌에 대한 각종 기부금 강제 징수, 국군의 월북사건, 민중계몽대의 국회의원 체포 구타사건 등을 계기로 국회는 국무총리 이하 각 장관의 총 퇴진과 함께 각 도지사의 파면을 결의했다. 개헌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국회와 정부의 대립이 심화된 것은 대통령책임제의 결함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내각총사직과 함께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다. 국회에서 각파교섭위원회가 꾸려져 개헌문제를 논의했는데, 민국당을 비롯한 동성회, 신정회, 이정회, 무소속 등 대다수 의원들이 개헌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 최초의 야당통합이라는 민주국민당(민국당) 창당도 개헌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민당이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문제를 제기하자 대한국민당 내에서 개헌 지지파인 신익희, 이청천 등이 자파 세력과 함께 한민당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이 창당되었다. 최한수, 1999, 『한국정당정치변동 Ⅰ』, 세명서관, 57쪽. 대한국민당은 국회의장이던 신익희 주도로 독촉국민회의 배은희 등과 함께 1948년 11월 13일 창당되었다. 당초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여당적 성격을 띠었으나 이승만의 후원을 얻지 못하였다. 신익희와 이청천이 개헌에 긍정적인 입장을, 배은희와 윤치영 등이 부정적 입장을 보여 분열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이러한 국회의 개헌 논의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친이승만계인 일민구락부조차 하나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일민주의를 표방하였고, 1948년 12월 20일부터 시작된 제2회 국회에서 여당적 성향이 두드러진 의원들이 일민구락부를 구성하였는데, 상당기간 50여 명의 의원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의회를 장악하지 못한 이승만정권은 반의회 전략을 펼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6월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이었다.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해 특위 요원들을 연행하고, 특경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속적인 방해공작으로 그 힘을 잃었다(한인섭, 2019, 「제1공화국에서 사법과 정치」, 『강원법학』 58, 452~453쪽); 소장파·반민특위와 이승만·경찰의 대립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중석, 199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104~143쪽 참조. 이에 국회는 내각 총퇴진을 결의하고 반민특위 무장해제 책임자 파면을 실행할 때까지 정부의 법안 심의를 거부한다는 결의를 하고 4일간 휴회에 들어갔다. 이 휴회기를 계기로 개헌론이 표면화되었다. 개헌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시점에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국가보안법이 제헌국회에서 통과된 지 6개월만인 1949년 5월 18일, 6월 19일, 7월 30일 3차에 걸쳐 김약수, 이문원, 노일환 등 좌파계열 소장파 의원 1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구속되었다. 길승흠, 1996, 「제1공화국:정당과 의회정치」, 『한국정치연구』 5집, 121쪽. 특히 6월 17일 국회부의장 김약수 외 6명이 외국군 철수와 미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진언서를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1950년 3월 14일 이들 모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국회 소장파의원들과 정부의 힘겨루기의 일면을 지닌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제1공화국 시기에 이승만 행정부를 견제하면서 자율적인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제헌국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제헌국회 전반기에는 이른바 ‘소장파’의원들이 집권세력을 활발히 견제하였는데, 이들은 이승만 지지세력과 보수세력 모두에 대항하는 소수자 세력이었다. 박찬욱, 「한국정치 50년:정치과정」, 『한국정치연구』10권, 41쪽.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을 겪으며 국회와 정부 간 세력이 역전되었다. 1949년 7월 초 국회는 정부와의 협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국회 내에서 일민구락부의 세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되자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한 국회부의장 선거에서 일민구락부의 윤치영이 당선되었다. 일민구락부는 조직 초기에는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제2의 국회프락치사건 재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더불어 민국당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여 무소속 소장파의원들이 대거 참여함에 따라 45명까지 늘어났다. 국회에서 통과시켰던 ‘내각총사퇴 및 정부제출법안 심의거부’ 결의는 번복되었고, 각종 개혁적인 법안들도 결국 행정부의 의도대로 수정되었다. 국회는 이승만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시키는 데 동의했다. 지방자치법 역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시·읍·면장은 지방의회에서 선출하되 도지사 및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에 의한 임명제’로 하였고, 시행시기도 정부 의도대로 사실상 유보시키는 데 동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내 진보세력이 제거되면서 국회 내 보수적 색채가 강해졌다. 민국당계와 혁신그룹인 소장파 간에는 국가보안법, 귀속재산처리법, 농지개혁법 등의 제정을 중심으로 대립이 극심했는데, 진보세력이 제거되면서 민국당이 원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2) 민국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제출 ① 원내 세력분포 변화와 개헌 논의 1949년 7월 7일 국회법이 개정되어 ‘교섭단체제도’가 공식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원내 각파의 세력 분할이 보다 제도화되고 공고화되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습격사건, 김구암살사건 등을 거치면서 소장파세력은 원내에서 힘을 잃었다. 신분상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소장파 의원들 다수가 대한국민당으로 이적하는 등 정치세력의 통합과 분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국회는 1949년 9월 제5회 회기부터 단체교섭회를 설치하였다. 1949년 2월 10일 한민당과 대한국민당 이탈파인 신익희·지청천 등이 합동하여 발당한 민국당은 소장파세력이 해체됨으로써 원내 제1세력이 되었다. 민국당은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김동원을 중심으로 원내에서 독자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1949년 6월 내각에서 민국당원이 12부 중 7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민국당원인 김효석·임병직·윤보선·허정·신성모·장기영 등이 입각하였는데, 이들의 입각은 소장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민국당이 협력관계를 구축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내각에 등용된 민국당원들도 결국은 이승만 직계그룹에 한정되었다(이혜영, 2016, 「제헌의회기 한민-민국당의 집권 전략과 헌법 갈등」, 『사학연구』 124집, 200쪽). 민국당은 원내외에서 독점적 지위를 장악한 데 자신감을 가지고 일부 무소속의원과 제휴하여 개헌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정감사로 행정부의 실정이 드러나고, 쌀값 앙등으로 인한 식량문제 및 인플레이션 문제로 반정부 여론이 형성되었다. 민국당은 이러한 문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리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국당이 개헌을 통해 차기 정권 획득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국당은 1950년 1월 27일 무소속을 포함한 79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헌법 제98에는 헌법개정이 국회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헌법개정의 제안은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 3분의 1 이상의 찬성에 의하고 대통령이 공고한다. 헌법개정의 의결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하고 의결 즉시 대통령이 공포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원내에서는 여당으로 재결성된 국민당을 중심으로 개헌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번에는 민국당의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대한국민당으로 총집결하면서 원내 세력분포가 변화했다. 대한국민당은 1948년 12월 독촉국민회를 중심으로 창당되어 여당조직운동을 전개했지만 이승만의 후원을 얻지 못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949년 2월 신익희·지청천 등이 이탈하여 민국당을 발당한 이후에는 일부 잔류파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소장파 해체 이후 원내에서 민국당의 독주를 막고 개헌을 반대하는 일민구락부·신정회·노농당 일부의원들이 대한국민당으로 통합함으로써 총 71명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이러한 원내 세력 분포가 개헌안 표결에 반영되었다. ② 민국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의 주요 내용 민국당이 주축이 되어 1950년 1월 27일 서상일 외 78인이 제출한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로 되어 있는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정하여 대통령을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로 두고 정치 실권을 자신들이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즉, “대통령은 국가원수로 모시고 국회에서 선거한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이 되고 그의 제청으로 국무원을 조직하고 국회는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의결권을 가지는 동시에 정부에는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내각책임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특별법원의 관할과 조직, 국회 임기 연기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상일이 제출한 ‘대한민국 헌법개정안 제출설명서’에서 내각책임제를 찬성하는 이유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 년 동안 실정이 허다한데 책임을 물을 길 없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책임 있는 제도로 고쳐서 민심을 수습하고 혁신정치를 하자. 둘째 정변은 민주정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며, 정변이 없는 나라는 망하고 너무 잦으면 쇠약한다. 셋째 내각책임제하의 국회는 명실 그래도 국가 최고기관으로서 정강 정책을 내걸고 정당적으로 합법적인 의회투쟁을 할 수 있는데, 대통령중심제는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려고 파당을 꾸며서 모략중상을 일삼으려 정당은 관당화 된다. 넷째 대통령은 정신적 존앙(尊仰)의 집결 하에 권력의 집결을 가해서 군주제에 가깝게 되지만, 내각책임제 하에 다수당이 정권을 잡는 것은 민주정치의 원칙이며 일당독재는 세계 민주진영을 이탈하는 결과가 되니 있을 수 없다, 다섯째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은 양원제와 내각책임제였는데, 정부수립이 긴급의 급무이어서 번안한 것이니 조만간 내각책임제로 될 것은 숙명적인 것이며 제헌의 잘못을 발견하였을 때는 개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여섯째 임기연장이 아니고 선거가 불가능할 때 국회의 중단을 없애기 위하여 헌법의 불비를 보강한 데 불과하며 38선에서의 소규모적인 충돌사건의 빈발과 5월 위기설이 전해지는 현 정세 하에 필요하다는 등이었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내각책임제 개헌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중심으로 책임정치가 되어야 하므로 거국일치의 내각이든지, 각 정당의 연합내각이든지, 국회에서 최선으로 생각하는 내각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개헌 논의 시작 단계부터 반대 입장을 담은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서상일 등이 개헌안을 제출하기 3일 전인 1950년 1월 24일, 내각책임제 개헌 공작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2월 6일 개헌안을 공고하는 동시에 개헌에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함께 공고하였다. 1950년 2월 7일 국회에서 제안한 헌법 개정 방안은 〈관보〉에 국무원 공고문으로 게시되었다. 3월 3일에도 개헌반대 담화를 발표하면서 국민이 국회의 결정에 대해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헌안 통과 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데 이어 3월 10일에는 개헌은 민의를 존중하라는 개헌반대 담화를 발표했다. 국민당과 일민구락부도 적극적으로 개헌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국민총궐기대회를 열고 개헌을 추진하는 자들은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라고 규탄했다. 이들이 개헌 반대이유로 내세운 것은, 첫째 개헌은 치안이 확립되고 국토가 통일된 후에 논의할 것으로 시기상조이고, 둘째 정변이 빈발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정권야욕을 조장하여 붕당의 폐해가 생기고, 셋째 일당독재를 초래하며, 넷째 제헌의원의 임기 중 개헌은 부당하니 선거구 국민의 의사를 물어서 해야 하고, 다섯째 의원의 임기연장을 획책하여 불순하다는 등이었다. ③ 의원내각제 개헌안 국회 부결과 그 의미 1950년 1월 27일 서상일 외 78인이 제출한 개헌안은 1950년 3월 9일 대한국민당의 긴급동의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국회에서 세력이 약했던 이승만은 대한국민회 및 대중단체를 동원하여 개헌반대운동을 펼쳤다. 그에 따라 전국적 규모로 개헌반대국민대회가 열렸다. 1950년 2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애국단체연합회 주최로 개헌반대총궐기국민대회가 개최되었고, 1950년 2~3월 전국 각지에서 국민회 주최로 개헌반대총궐기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개헌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 직전인 1950년 3월 8일에도 명동시공관에서 전국애국단체연합회 주체로 내각책임제 개헌안 절대반대 및 총선거촉진국민대회가 열렸다. 1950년 3월 초 공보처 여론조사 결과 개헌 반대 의견이 72%로 나오자, 이에 힘입어 대한국민당이 나서서 기습적으로 국회 표결을 시도하였다. 그 후 7일간의 격렬한 찬반 토론을 거쳐 1950년 3월 14일 제52차 본회의에서 무기명 비밀투표로 표결에 부쳐졌다. 그 결과 재석 179명 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로 부결되었다. 투표과정에서 개헌반대파인 대한국민당은 소속의원의 이탈을 막기 위해 백지투표로 기권을 종용했는데, 민국당이 이를 문제 삼으면서 이날의 표결은 무효 처리되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인 3월 15일 재투표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로 66표의 기권표가 나왔다. 대한국민당은 당론이 통일되지 않아 백지투표라는 편법을 사용하여 내각제개헌안을 저지하고자 할 만큼 불안정했지만, 결과적으로 부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내각제 개헌안이 부결된 요인은, 첫째 국회 내외에 이승만 지지세력이 개헌안을 제기한 민국당 세력보다 강했다는 점, 둘째, 정부의 개헌반대 압력이 성공적이었다는 점, 셋째 민국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김수자, 2005, 『이승만의 집권초기 권력기반 연구』, 경인문화사, 169~170쪽. 민국당에 대한 불신은, 민국당의 권력 독점 가능성, 과거 한민당부터 이어진 친일파 지주정당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점과 제헌의원의 임기연장 조항에 대한 여론의 비판 등을 꼽을 수 있다. 국민들은 설사 개헌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제헌의회에서 개헌을 논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개헌안은 부결되었지만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도한 민국당은 결집력을 보여줌으로써 나름의 성과를 거둔 측면도 있었다. 내각제 개헌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민국당은 국회를 무대로 맹렬한 공세를 펼쳤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규탄하면서 사임한 이시영 부통령 후임으로 민국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김성수를 선출했다. 국회의장 선거에서도 민국당의 신익희가 선출됨으로써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심지연, 2017, 『한국정당정치사』, 82~83쪽. 이승만은 1950년 3월 14일, 국회를 양원제로 고치로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을 시사하는 담화를 발표하여,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개헌 문제가 또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2. 1950년 5.30선거와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1) 1950년 5.30선거 : 제2대 총선거 ① 1950년 5.30선거 결과와 의미 1950년 4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이 제정·공포되었다. 그에 따라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의 숫자는 2,209명으로, 제헌국회 입후보자 948명보다 2.3배가 더 많았다. 정당·단체의 숫자는 39개, 단 1명의 후보만을 내세운 정당·단체의 숫자는 18개로 제헌국회보다 다소 줄었지만, 무소속 후보자는 1,513명으로 제헌국회 417명보다 3.6배가 늘었다. 대한국민당이나 민국당이 보수적인 이념적 색채를 가졌으나 사회당과 민족자주연맹 등 혁신적인 성격의 정당도 선거에 참여하여 이념이나 정책 면에서 정당 간에 차이가 컸다. 정부수립 후 2년 동안의 시정결과를 비판하여 새로운 민의를 묻는 선거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선거 결과 민주국민당이 9.8% 득표로 24석을 차지하였고, 대한국민당도 역시 9.8%로 24석, 국민회가 6.8%를 얻어 14석을 차지하였다. 그 외에 대한청년단이 3.3%를 얻어 10석, 대한노총이 1.7%로 3석, 사회당이 1.3%로 2석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없었다. 제헌의원 선거와 같이 무소속이 압도적이어서 62.9%의 득표로 국회 총의석 210석 중 126석을 차지했다. 선거 결과는 미군정 및 그에 협력한 민국당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자 여당인 대한국민당에 대한 불신임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러나 대한국민당의 약화가 곧 이승만 지지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공식적인 여당이 확립되지 않았고,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총연맹, 일민구락부, 대한부인회, 중앙불교위원회, 대한여자국민당 등은 친이승만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60석에 근접하는 이승만 지지세력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서민적 이미지가 강했던 민국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의원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반면 이전 국회에서 배제와 배척의 대상이었던 중도 진보세력이 무소속의 형태로 원내에 대거 진출, 최소한 원내 1/4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상희, 2000, 「전시체제에서의 헌법형성 1948~1954」, 『서울대학교 법학』 41(2), 62쪽. 이는 대통령 간선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정치구조를 감안할 때 국가자체의 정당성의 위기로까지 평가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회당과 민족자주연맹, 무소속의 당선자 중 다수가 임정계열로, 126명의 무소속 의원 중 반정부적 성향이 절반 이상이었다. 6월 19일 제2대 국회 개회일 의장선거에서 나타난 투표상황을 통해 국회 내 세력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데, 제1차 투표결과 신익희(민주국민당) 96표, 조소앙(사회당) 48표, 오하영(무소속) 46표, 이갑성(국민회) 11표, 안재홍(무소속) 3표,윤기섭·장건상·지청천·김무용·장택상 각 1표를 얻었다. 정부에서 지지한 오하영은 46표를 획득하였을 뿐, 같은 계열을 합하여 57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야당계열이었다. 또한 제1대 국회에서 이승만의 내각에도 참여하고 후에는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이 국회부의장에 당선되었다는 점도 2대 국회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이 정부수립 직후부터 추진해온 독자적 정치세력 형성에 실패함으로서, 2대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재선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짐에 따라 정당 조직과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게 되었다. ② 6.25전쟁 발발 : 전시내각 구성과 비상조치 제2대 국회 개원 후 불과 일주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고 정부에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미리 피신하고 정부도 후퇴했다. 국회를 사수하기 위해 서울에 남아있던 국회의원들의 희생이 컸다. 전쟁 중 재석 210명 가운데 35명의 의원이 납치 및 행방불명되거나 사망했다. 35명의 국회의원이 납치 및 행방불명(27명), 피살(3명), 사망(5명)했다. 이들 35명의 소속은 대한국민당 5명, 국민회 2명, 민국당 2명, 일민구락부 1명, 사회당 1명, 민족자주연맹 1명, 무소속 23명이었다(이기하, 1961, 『한국정당발달사』, 의회정치사, 214쪽). 1951년 1.4후퇴 후 부산 임시수도에서 국회가 다시 열렸을 때 국회의 재적수는 175명으로 줄어들었다. 1950년 말 중국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다시 서을에서 후퇴한 후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 8월 15일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2대 국회는 부산임시수도에서 활동했다. 6.25전쟁은 한국정치에서 진보적 정치세력의 근본적 약화를 초래했다. 진보진영의 주요 인물인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등이 전쟁 중 납북되어 이들이 입지가 좁아졌으며, 전쟁 그 자체가 지닌 양자택일 강요적 상황이 그들의 입지를 좁힌 탓도 있었다. 좌우간의 계급투쟁이 전쟁으로까지 비화된 시점에서 중간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설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 이승만대통령은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당일에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하였다. 박원순, 1992, 『국가보안법연구』2, 역사비평사, 19~20쪽. 특별조치령이 과도하게 적용되면서 부당하고 불법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집권세력은 1950년 5.30선거 결과 의석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리력을 재편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전쟁 중이라는 핑계로 국민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신체의 자유도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다. 기본권은 긴급명령에 의해 제한되었고, 비상계엄의 선포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었다. 비상계엄에 따른 포고령에 의해 언론에 대한 검열이 행해졌고 영장 없는 체포 구속이 자행되었다. 김철수, 2000, 「헌정 50년의 회고와 전망」, 『법학논총』 12, 숭실대학교 법학연구소, 9쪽.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정부는 강력한 비상조치를 강구했다. 국회는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행정부의 무책임과 실정을 비난하며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1950년 11월 국회는 국무위원 총사직 건의안을 제출했으나 전시상황인 것을 고려하여 국무위원 인책 총사직 권고 결의안은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대응하여 강력한 거국적 성격의 전시내각을 구성했다. 1950년 7월 15일 민국당의 중견인 조병옥을 내무장관에 임명하여 전쟁 발발 이후 정부가 보여준 무능에 대한 국회와 국민들의 비난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조병옥은 미군정기 경무부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경찰을 재편하고 경찰이 전투업무를 병행하도록 하며, 경찰관 15,000명을 유엔군에 배속시켜 준군사기구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내무부를 강화시켰다. 국회와 정부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승만대통령은 이범석 사임 이후 공석이었던 국무총리에 민국당의 장면을 추천하여, 1950년 11월 10일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국무총리 인선 과정에서 이승만과 국회 간에 힘겨루기 끝에 나온 결과였다. 1950년 4월 이범석이 국무총리에서 사임한 이후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회에 승인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신성모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그 후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준을 임명 승인 요청했으나 그것도 국회에서 부결된 후 결국 장면을 추천하여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서울신문, 1950. 11. 10. 장면의 국무총리 인준에 대한 국회 표결은 재석의원 154명 중 가 148, 부 6으로 통과되었다. 그 외에도 조병옥, 김준연, 허정, 신성모 등 민국당 출신 각료들을 다수 입각시켜 정부에 대한 야당의 비난을 줄이고자 했다. 전쟁 중 발생한 정부의 실정은 의원들의 반정부적 태도를 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국회 내의 소수파인 민국당은 압도적 다수를 점하던 무소속의원들과 합세하여 반이승만 발언권을 강화했다. 부산임시수도에서 제2대 국회는 정부가 전쟁수행과정에서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들을 조사하였는데,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대표적이었다. 국회의 사건조사와 처리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추락했다. ③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의 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또다시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하하게 되었다. 전세가 불리해지던 11월 20일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대상은 만 17~40세까지의 청장년으로, 정규군 이외에 예비병으로 편성되어 훈련 받았으며 필요할 때 집단적으로 소집될 수 있도록 하였다. 소집된 방위군은 대부분 강제 징집되었고, 5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중국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게 됨에 따라 방위군을 집단적으로 후방으로 이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위군 간부들이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처분한 결과 방위 군인들이 물자와 식량, 보급 부족으로 천여 명 이상의 사망자와 병자가 발생했다. 방위군 간부가 부정처분한 금품이 신정동지회 등에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국민방위군 문제는 피란 국회 개회 첫날부터 비화되어 결국은 정치적으로는 거창사건, 신정동지회의 와해, 서민호사건, 정치파동 등을 거쳐 정계 개편으로까지 몰고 갔다(중앙일보사 편, 1983, 『민족의 증언』4권, 114쪽). 이에 국회에서도 3월 29일 국민방위군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활동을 벌였다. 각 정파에서 호선하여 15명을 선출되어 근 40일간에 걸쳐 부정행위를 파헤쳤다.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을 해체할 것을 결의하고 이 사건을 일으킨 김윤근 이하 간부 몇 사람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51년 2월 중순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공비 토벌 차 출동한 국군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주민 수백 명을 공비에게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불법 살해한 것이었다. 거창 사건은 전쟁 시기에 한국정부가 이른바 ‘용공분자’에 대한 무차별 투옥과 학살을 벌인 사건들 중 한 예에 불과했다. 그 밖에 산청·함양·합천·남원·순창 등 곳곳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서주석, 「한국전쟁과 이승만정권의 권력강화」, 『역사비평』 9호, 137쪽. 국회가 조사단을 거창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에 착수하였으나 경남지구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공비로 가장하여 국회의 현지답사를 방해하는 ‘조사단 피격사건’이 벌어졌다. 정부와 국회 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국회에서는 그 불법성을 지적하고 관계책임자를 처벌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두 사건을 빌미로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면서 민국당계의 조병옥내무장관과 김준연법무장관을 동시에 인책 사직케 하고, 그 후임으로 내무에 이순용, 국방에 이기붕, 법무에 조진만, 농림에 임문항 등 자파세력을 등용했다. 전쟁이 나자 일종의 거국내각 형식으로 민국당계의 두 사람을 내각에 둔 것인데, 이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새 정치세력을 구축하려고 한 것이다. 중앙일보사 편, 1983, 『민족의 증언』 4권, 230~231쪽. 이승만은 행정부 내 민국당 세력의 성장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개각을 단행한 데 이어 민국당계 경찰간부 및 공무원들도 대량 해임했다. 국회가 불만을 표시하면서 정부와 국회간의 마찰이 더욱 심해졌다. 국회 내에서도 정부의 무책임에 대한 공방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시영 부통령이 1951년 5월 10일, 일련의 사태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양대 부정사건을 더 적극적으로 조치하여 국민의 의혹을 풀어야 할 것이며, 전쟁 발발 이후 모든 불미스러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승만대통령이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이시영 부통령 사임 이후 5월 16일 후임 부통령 선출을 위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민국당은 김성수, 여당세력인 신정동지회는 이갑성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했는데, 투표결과 재석 152명 중 김성수 78, 이갑성 73, 기권 1표로 김성수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공화구락부가 민국당과 합작하여 김성수를 부통령후보로 내세워 신정동지회 등 여권이 미는 후보를 누른 것이었다. 민국당에 비판적이었던 공화구락부가 민국당과 손을 잡았다는 것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운동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김성수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이승만의 정치 장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었고, 내각책임제는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이승만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국회 내 반이승만 야당연합세력이 강화되자 이런 상태에서는 국회 간선제로 자신이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승만은 신당을 조직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이루고자 했다. (2) 정부의 대통령직선제개헌안 : 1951년 11월 30일 ① 이승만의 신당 결성과 직선제개헌 추진 이승만은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집권당을 조직하여 의회 내에 지배력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제헌국회 기간 중에 집권당 형성에는 실패하였다. 이승만이 정부수립 직후부터 정당조직에 관여했던 것에 대해서는, 백운선, 1992, 「제헌국회내 ‘소장파’에 관한 연구」,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75쪽; 서중석, 1997, 「이승만정부 초기의 일민주의」, 『진단학보』83집, 164~165쪽 참조. 그러나 1951년 이시영의 부통령 사임과 민국당 김성수의 부통령 당선을 계기로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론이 제기되자 이승만의 위기감이 커졌다. 이에 이승만이 1951년 8.15경축행사에서 신당 결성에 관한 담화를 발표한 후, 공보처, 1952, ‘신당조직에 관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 담화집:정치편』, 137~138쪽. 원내외에서 신당을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원내에서 신당 조직 운동을 통해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합쳐서 1951년 5월 29일 공화민정회가 발족했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무소속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무소속구락부가 1950년 11월 공화구락부가 되었고, 공화구락부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다루면서 민국당과 합세하여 정부를 질책하는 야당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부통령선거에서 민국당의 김성수가 당선되자 위기감을 가진 신정동지회는 국민방위군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이 있어 곤란한 처지였던 차에 공화구락부와 함께 공화민정회를 발족시켰다. 이렇게 합쳐진 공화민정회는 원내 108석을 차지하는 거대 교섭단체로 등장하면서 신당조직의 모체로 부상했다. 국회의원 수는 공화구락부가 39명, 신정동지회가 69명으로 신정동지회가 더 많았지만, 신당작업은 공화구락부 측이 주도했다. 이들은 통합을 통해 원내 안정세력을 구축하여 신당을 조직하고, 민국당을 견제하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자 했다. 이혜영, 2018, 「제2대 국회 전반 의회내 여당형성 활동과 원내자유당」, 『사학연구』 132집, 483쪽.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 대표는 통합에 앞서 내각책임제 개헌에 합의했는데,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임명 조각케 하고, 그 대신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는 형태였다. 통합과정에서 이승만에 대한 지지 여부와 차기 대통령 추대 문제 등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결국 절충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원수의 상징적 지위에 두고 장면을 내각제 하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데 합의했다. 공화민정회가 구상한 정부형태는 순수한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상징적 대통령을 둔 내각제였다. 민국당과 공화민정회 간에 정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원들의 이합집산도 계속되었다. 신당 운동이 추진되는 시기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이 내놓은 개헌안이 원내외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원내 인사들은 정부 개헌안에 반대했는데, 현직의원들로 대통령선출권이라는 권한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으며, 단원제가 가진 강력한 입법권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기득권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원외 측은 이승만이 제기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즉각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원내외의 이견 조정이 실패하자 원내와 원외에 동일한 이름의 두 개의 자유당이 창당되었는데, 1951년 12월 23일 신정동지회를 중심으로 원내자유당이 결성되었고, 원외 친여단체들은 따로 원외자유당으로 결성했다. 개헌문제에서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은 애초부터 입장이 달랐다. 원내파는 내각제 개헌을 단행하여 이승만을 상징적인 국가권수에 머물게 하고 현 국무총리인 장면을 내각책임제 하의 실권 있는 국무총리로 임명할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반면에 원외파는 이승만과 이범석을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각각 정·부통령에 재선시키고 의회를 약화시키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문정인·류상영, 2004, 「자유당과 경무대-‘정치사회’의 출현과 붕괴의 정치학」,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 20쪽.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에 대해 전격적 지지를 표명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개헌을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승만의 일방적 지지와 경찰 및 공무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원외자유당은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원내자유당의 와해 및 흡수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원내 자유당은 잔류파(간부파)‘와 원외자유당으로의 ’합동파(삼우장파)‘로 또다시 분열되었다. ②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제출과 부결 1950년 11월 7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대통령은 법제처에 헌법개정안을 입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시점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여 통일을 앞두고 새로운 헌법으로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 1950년 5.30 선거 결과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경우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부의 개헌 논의는 중국군의 참전과 1.4후퇴로 진척되지 않다가, 1951년 10월 9일 제108회 국무회의에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접선거, 양원제 등에 관한 헌법 개정과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을 법제처와 법무부에서 협의하여 입안하라고 유시를 내렸다. 1951년 10월 16일 제110회 국무회의에서는 법제처에서 작성한 ‘헌법개정안 요령’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정·부통령의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구성이 핵심으로, 국회는 제1원과 제2원으로 구성하여 행정부와 의회 사이의 의견 조정을 꾀하고자 했다. 정부개헌안은 1951년 11월 30일 국무위원 13명이 발기한 ‘헌법개정제의’를 관보에 공고하였다. 총 26개조와 부칙을 개정하는 개헌안으로, 국회에서 1952년 1월 17~18일 이틀간 찬반 토론이 진행되었다. 정부개헌안의 핵심은 정·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통령·부통령을 국민직접선거로 하고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모두 궐위된 때에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직무를 집행하고 즉시 그 후임을 선거한다. 둘째, 국회를 상·하 양원제로 하고, 상원의 구성은 도단위의 대선거구로 하는 지역대표로 하여 그 임기는 6년인데, 2년마다 3분지 1을 개선하여, 그 권한은 하원과 같고, 다만 하원은 예산안의 선심의권을 갖는다. 정부는 그 제안 이유 설명에서 양원제의 장점으로, 첫째, 경솔 부당한 의결과 과오를 피하고, 둘째, 다수당의 전제를 방지하고, 셋째, 정부와 국회의 충돌을 완화시키고, 넷째, 상원에 비교적 노련하고 원만한 인물을 선출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회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통령 직접선거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중책을 가지므로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며, 삼권분립주의를 원칙으로 하는데 입법부인 국회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선거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이 정부 개헌안에 반대했다. 반대이유로는, 양원제의 경우, 필요하지 않으며, 전시상황에 적절하지 않고, 상하원에 차이가 없고, 재정상의 문제도 있으며, 결국 이승만이 국회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방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통령직선제의 경우, 독재를 초래할 수 있으며, 아직 미숙한 국민들이 권력에 이용되고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민 상호간에 반목과 질시가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21~122쪽; 서희경, 2020, 『한국헌정사 1948~1987』, 도서출판 포럼, 177쪽. 이 정부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국회 제9차 본회의에서 재석의원 163명 중 찬성 19, 반대 142, 기권 1표로 압도적인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당시 원내 세력분포는 민국당 39, 민우회 25, 원내자유당 93, 무소속 18이었다. 원내 자유당이 이승만의 의도를 따라주지 않은 것으로, 의원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최대 권한인 대통령선거권을 양보할 리가 없었고 입법권의 독점을 포기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었다. 표결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대다수 국회의원은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나 내각책임제를 지지했다. 국회 표결 이후에도 1952년 3월까지 자유당의 원내외 통합공작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원내자유당은 위원장제를 채택했고, 원외자유당도 단일 정당조직을 완성하여 당수에 이승만, 부당수에 이범석을 선출했다. 원외자유당의 임원진은 국민회, 청년단, 이범석의 족청출신으로 대별되며, 창당 3개월 만인 1952년 3월 20일 개최되니 제1차 전당대회에서 이미 당원수가 26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③ 대중동원과 통제 강화 정부개헌안이 부결된 후 정부와 국회의 극단적 대립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에 대중동원을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방의원 선거와 내각체제 구축을 동시에 진행했다. 1952년 4월~5월에 실시한 지방의원 선거도 그 일환이었다. 정부개헌안이 일차 부결되자 지방의회를 구성하여 개헌지지 세력을 만들어 국회와 대결하려는 의도였다. 한편으로는 국회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대중동원의 강도를 높이고 내각을 교체했는데, 내무부차관 장석윤을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명영, 1975, 「자유당정치의 특성(1952~1960)」, 『사회과학』13, 성대사회과학연구소, 60~61쪽. 장석윤은 정보공작정치의 귀재로, 내무부장관으로서 대중동원체제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을 안건으로 다룸으로써 내각을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 참석해서 개헌 관련 유시를 내리고, 국무원들은 국회가 제출한 개헌안에 대한 반대논문을 유명인사들로 하여금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하도록 하고, 정부개헌안을 반박하는 데 대한 반박문을 발표시키거나 국회의 정부 개헌안 반대 국회의원들의 동향 검토까지 했다. 대중동원은 원외자유당과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의 대중단체가 주도했지만 내무부가 이들 데모를 지원해주었다. 정부개헌안 부결된 후 국회의원 추방과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고, 과격시위로 변질되었다. 1952년 2월 대한청년단과 지방의회가 주도하여 부산임시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요구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정부개헌안이 부결된 후 1952년 2월 16일 이승만은 국회의원 소환 관련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국회의원을 소환하는 것이 헌법에 없다고 말하나 소환하지 말라는 조건 또한 없으므로, 주권자인 국민이 자기 대표를 소환하는 것을 이론적으로나 법리적으로 막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중을 선동했다. 이승만의 담화가 발표되자마자 2월 18일 국회의원 소환데모가 발생했다. 국회는 국회의원소환문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에 대처했다. 한편 이에 앞서 1952년 2월 5일 부산 무구 달성 등 8개구에서 국회의원보궐선거가 실시되어 원외자유당계가 7명, 무소속이 1명 당선되었다. 1952년 3월 20일 원외자유당은 당세를 확장하고 의원포섭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원내지유당 중 합동공작에 호응하는 의원들은 삼우장(三友莊)을 근거지로 하는 합동파(삼우장파)와 잔류파(또는 간부파)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3. 1952년 5.26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1)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 ①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 1952년 4월 17일 개헌안을 둘러싸고 국회와 정부 간에 정면충돌로 이어지면서 정부와 국회는 각각 개헌안을 제출했다. 민주국민당과 원내자유당 간부파인 구공화구락부, 민우회의 일부 및 무소속 일부의원들이 개헌안을 두고 야당연합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내각책임제개헌안을 작성하고 서명공작을 하는 동시에 4월 10일 개헌서명의원 간담회를 개최하여 원내자유당 6명, 민주국민당 4명, 민우회 3명, 무소속 2명으로 ‘국무원책임제개헌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개헌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 4월 17일 원내자유당 93명 중 48명, 민주국민당 39명 전원, 민우회 25명, 중 21명, 무소속 26명 중 15명의 서명으로 곽상훈 의원 등 123명이 총 12개조와 부칙을 수정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안·발의했다. 123명은 당시 헌법 개정을 위한 재적 국회의원의 3분의 2보다 1명이 더 많은 숫자로, 1951년 1월 1차 내각제개헌안 제출 때와는 달리 강한 추진력을 얻은 것이었다. 야당이 제출한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29쪽. 첫째,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1차 지명에 대한 승인을 얻지 못한 후 5일을 경과하거나 2차 지명에도 승인을 얻지 못하면 국회가 지명한 자를 임명한다. 둘째, 국회는 국무원의 조직완료 또는 총선거 직후의 신임결의로부터 1년 이내에는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국무원의 불신임결의를 못하게 한다. 셋째, 대통령은 국회가 그 임기 중 재적의원 3분지 2에 달하지 못한 찬성에 의한 국무원불신임결의를 2회 이상 행하였을 때에 한하여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있게 한다. 넷째, 국회가 해산되어 총선거를 할 때에는 국무총리와 내각부장관은 즉시 그 직권이 정지되고, 국회는 총선거기간 중 국무총리와 내무부장관의 직권을 대행할 자를 선거한다.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을 행정권에서 분리하고 국무총리가 국무를 책임지는 내각제에 있었다. 즉 대통령을 형식적·상징적 지위에 두고 실제 행정은 국무총리와 내각에 맡기자는 것으로 1951년 1월 27일 서상일 등 79인이 제출한 개헌안과 같은 내용이었다. 국회는 1952년 4월 20일부터 20일간 지방선거감시 및 지방실정 시찰을 위해 임시 휴회했다. 그런데 1951년 11월 제2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던 장면이 4월 20일 돌연 사임하고, 다음날 이승만은 국회부의장 장택상을 그 후임으로 지명했다. 5월 6일 국회가 긴급히 재개되어 국무총리임명승인에 대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장택상은 국회에서 개헌안이 제출되던 1952년 4월 개헌안 서명 의원들을 상대로 ‘개헌에 대한 4원칙’을 내걸고 또 다른 서명 작업을 벌였다. 장택상이 제시한 네 가지 조건은, 첫째 개헌을 추진하되, 둘째 개헌 내용 재검토, 셋째 개헌안 제출 상정시기 고려, 넷째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를 미리 정해둘 것 등이었다. 장택상의 원칙에 동의한 의원들이 4월 19일 이미 30명이 넘었다. 마침 4월 19일 장면 총리가 사표를 제출하자 이승만대통령은 장택상 국회부의장을 국무총리로 지명해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장택상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문제를 두고 개헌을 추진하던 세력 내에서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장택상이 내세운 4원칙만으로는 태도가 불분명했지만, 향후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을 완화하고 수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민우회와 원내자유당잔류파 의원 일부가 장택상으로 지지함으로써 장택상 총리임명 승인은 95대 81표로 가결되었다. 국회사무처, 제12회 국회정기회의속기록 제50호, 1952년 5월 6일; 한태수, 1961, 1『한국정당사』, 신태양사, 30쪽. 이로써 개헌 정국은 자유당합동파와 신라회를 축으로 한 내각제 반대 세력과 원내자유당(잔류파)과 민국당이 중심이 된 내각제 개헌세력의 대결구도를 형성하였다. 한편 국회 휴회 중인 4월 22일 내각책임제 개헌 추진의 주도인사인 서민호의원인 지방선거시찰차 전남 순천에서 현역육군대위 서창선과 시비 끝에 권총으로 서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회는 정당방위라고 석방을 주장하고 정부가 이에 반대하면서 논쟁을 벌였으나, 국회는 5월 14일 서민호의원의 석방을 가결했다. 개헌파동이 한창 고조될 무렵에 발생한 서민호의원사건은 국회에서 열세로 궁지에 몰렸던 정부에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여야의 대립이 더 날카롭게 되고 국회에서의 서민호의원 석방결의안 가결은 결과적으로 정부로 하여금 비상상계엄선포의 구실로 삼게 했다. 정부가 이 사건을 큰 정치문제로 삼은 것은 서민호의원이 거창사건·국민방위군사건 등을 통해 대정부 공격에 앞장섰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적극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일보사 편, 1983, 『민족의 증언』5권, 338~344쪽. ② 정부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수정 제출 : 1952년 5월 14일 1952년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는 장택상 국무총리가 나서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과 내각제 개헌안을 절충하여 정부측 안으로 국회에 다시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절충안이라기보다 1월에 부결된 정부개헌안에 국회의 권한을 약간 강화한 것으로, 하원에 우월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틀 후인 1952년 5월 14일 정부는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 개헌안을 다시 제출하였다. 1월에 부결된 것을 약간 수정한 것으로, 총 19개조와 부칙을 수정하였다. 1월에 부결된 개헌안과의 차이는, 첫째 국무위원은 하원의 승인을 얻고, 대사 공사는 상원의 승인을 얻어 임명한다, 둘째 먼젓번 개헌안에서는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당연히 대통령이 되게 되었으나 이 경우에는 선거하게 한다. 셋째, 상원의원 중 국민이 선거한 의원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의원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와 학계에 명망이 있는 자 중에서 국무회의의 의결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넷째 양원합동회의에 있어서 또는 의안선거권 등 하원에 우월권을 준다는 등이었다. 명칭은 양 개헌안 조항을 발췌한 것이라고 했으나 정부안인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핵심이었다. 또다시 정부개헌안이 제출된 후 원외에서는 민족자결단, 백골단, 딱벌떼 등 데모대가 국회 해산과 국회의원 소환 등을 외치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대중동원의 배후에는 1952년 초 이범석이 주축이 되어 지방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한 원외 자유당이 중심에 있었다. 1952년 초 실시된 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도 8개 선거구 중 7개 선거구에서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뒀는데, 국민회와 청년단체, 경찰이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보궐선거에서의 승리로 원외자유당이 더욱 확대되었고, 초대 지방의원 선거전에서 하부조직이 더욱 강화되었다. 1952년 4월 지방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지방의원 선거를 실시한 이유는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제헌헌법에 따라 지방의회 선거제도를 규정한 ‘지방자치법’이 1949년 7월 공포되었고, 1950년 12월 제1대 지방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전쟁으로 지연되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과 5월에 걸쳐 지방자치선거가 강행된 이유는 이승만의 의회 내의 반대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 ‘민의’를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황수익, 1996, 「제1공화국의 선거제도」, 『한국정치연구』 제5호, 서우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13쪽. 당시 지방선거는 지방자치단체 의회에만 적용되었으며,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임명제로, 시·읍·면장은 지방의회에서 간접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선거가 적용될 수 있는 행정단위는 서울특별시 및 도의회와 시·읍·면의회였다. 전시상황이라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강원도의 계엄령이 선포된 일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4월 25일 시·읍·면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10일 도의회 선거가 시행되었다. 당시 지방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킨 정당 단체는 자유당, 민국당, 국민회, 대한청년회, 노총 등으로 민국당으로 제외하고는 모두 친정부계 단체들이었다. 1952년 지방의원 선거에서 원외자유당이 각급 지방의회에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지방의원선거에서 원외자유당은 시·읍·면 의원 총수 17,544명 중 4,444명을 당선시켰고, 동계열인 한청이 2,843명, 국민회가 2,621명, 노총이 23명으로 56% 차지, 도의원 총수 306명 중 자유당 147명, 한청 24명, 국민회가 32명으로 70% 획득. 원외자유당의 세력은 외부로부터 국회를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었다.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31쪽. 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자유당과 정부 외곽 단체인 국민회는 국회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며 국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52년 5월 19일 서민호의원이 검찰당국의 항고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49조에 의하여 석방되자 지방도민대회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주장하며 민의를 표시한다는 결의와 진정서가 날아들었다. 부산의 임시국회의사당앞 충무로광장에서는 반민족국회의원 성토대회가 열렸다. 반민의국회의원규탄 국민대회, 민족자결선포대회가 날마다 열리고, 데모 군중이 국회 앞에 시위단을 형성하고 개헌추진 중심인물로 지목되는 14명의 의원을 제명 처분할 것을 건의하는 결의를 하고, 도처에서 국회를 해산하라는 벽보와 반민의 의원이라고 지명된 의원의 인신공격성 벽보로 도배되었다. 5월 23일에 서민호의원을 살인국회의원이라고 하여 반민족국회의원 소환 등을 주장하며 시위가 점점 험악해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시위대는 대통령관저를 방문하고 청원서를 전달하는 등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과격해졌다. (2)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안’ 통과 ① ‘5.26 부산정치파동’ 1952년 5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했다. 이범석은 족청단장이자 원외자유당 부당수로 조직력 확대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강압적 행동에 착수했다. 이범석의 내무부장관 임명과 동시에 다음날 오전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23개 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헌법에 규정된 국회 승인도 없이 ‘공산분자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것으로, 이른바 ‘5.26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한 야당의원들에 대한 탄압의 시작은 1952년 4월 22일의 서민호의원 사건에서 시작되어 국제공산당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국회의 내각책임제개헌론의 선두주자였던 서민호의원이 국회의 석방 결의로 풀려나자 대중 시위가 살인국회의원규탄대회로 확산되었다. 이를 빌미로 5월 24일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5월 26일 정오 무렵, 국회버스로 등원하던 47명의 국회의원이 임시의사당인 경남도청 정문에서 헌병대에 의해 차에 탄 채로 끌려갔다. 완전무장한 헌병대가 버스를 포위하고, 버스에 국제공산당의 비밀공작자금을 받은 국회의원이 있다고 불심검문을 하려고 했다. 의원들이 차문을 굳게 잠그고 저항하자 헌병대는 크레인을 동원하여 버스를 토성동에 있는 헌병대 본부로 끌고 갔다. 원용덕을 통해 헌병대를 동원한 것은 계엄사령관인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일선부대의 계엄군 차출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김세중, 2004, 「1950년대 민군관계변동의 추이와 결과」,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 59쪽);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발표함으로써 군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이승만 정권과 대립했다. 5월 26일, 헌병대에 연행된 7인 중, 민국당의 서범석, 임흥순의원과 원내자유당의 이석기, 민우회의 김의준, 무소속의 이용설 의원이 국제공산당의 정치공작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구속된 야당의원들이 집중적으로 심문 받은 것은 “정치공작금이 어디서 조달된 것인지”와, “왜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느냐”였다. 전시 중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고 국정을 혼란케 한 것은 이적죄가 성립된다는 논리였다. 이후 계엄사령부는 ”야당의원들이 일본 조총련에서 유입된 국제공산당의 비밀공작비를 정치자금으로 받아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서병조, 1986, 청사에 쓰리라 민주의 이름으로, 문예춘추사, 85쪽(서희경, 2020, 『한국헌정사 1948~1987』, 도서출판 포럼, 205쪽 재인용) 5월 26일 새벽, 원내자유당의 정헌주 의원과 민우회의 장홍염 의원, 민국당의 양병일 의원 등이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같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서민호 의원도 재구속되었다. 5월 30일에는 무소속의 곽상훈, 박정근 의원이 구속되고, 이후 권중돈 의원도 구속되어 총 12명이 구속되었다. 장면도 이 사건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내무부는 장면이 ‘대한민국 정부혁신전국지도위원회 음모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국제공산당사건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조작극이었다. 1952년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이승만의 정치적 실정과 독재를 비판하면서 국회에 사임청원서를 제출했다. 다음날인 5월 30일 국회는 비상계엄을 즉시 해제할 것과 체포된 11명의 국회의원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하는 등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더 강경한 태도로 국회 해산까지 들고 나왔다. 5월 29일 이승만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여, “현 위기의 책임은 공산주의자의 음모공작, 게릴라 활동 및 ‘반항적’인 국회의원들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조선일보, 1952.5. 29. 그리고 국회를 해산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이승만의 성명과 동시에 5월 29일까지 7개 도의회에서 국회해산을 결의했다. 6월 12일에는 지방의회대표들이 반민의 국회해산 총궐기대회를 열고 국회해산을 결의하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과 대통령 임시관저 앞에서 국회해산 데모를 벌였다. 비상계엄령 선포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는데도 국회 성토 데모는 연일 부산 시내를 누볐다. 이러한 정치상황에 대해 유엔과 미국은 우려를 표했다. 한국의 정치파동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16개국을 동원하고 있는 유엔의 권위를 무색하게 하고, 미국을 국제여론상 궁지에 몰리게 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내정의 혼란은 결국 전쟁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을 것이었다. 홍석률, 1994,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역사비평』 통권 28호, 141쪽. 5월 26일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은 부산지역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권고했다. 미국이 국제 여론을 의식해서 직접적으로 한국에 압력을 가하기보다는 유엔기구를 내세워 이승만의 국회 탄압을 제제하는 정책을 택했던 것이다. 위원장 플림솔(Plimsoll)을 비롯한 위원들이 5월 28일 이승만을 방문하고, 한국의 헌법 조항을 근거로 계엄령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부산시의 계엄령 해제, 국회의원 석방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음날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 라이트너는 계엄령 조기 해제를 촉구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2일 이승만대통령이 정부개헌안에 찬성하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에 현재의 정치 위기를 완화할 조치를 취하고, 국회를 해산하지 말라는 각서를 보냈다. 이승만은 6월 4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정치정세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국회해산은 민의에 의거할 것”이라고 답신을 보냈다. 자유당의원들은 유엔위원단의 권고는 내정간섭이므로 외무부책임자를 출석시켜 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개헌추진파의 반대로 이 안이 폐기되자 6월 3일부터 국회 출석을 거부하였고, 신라회의 다수 의원들도 여기에 가세하였다. 이에 국회는 성원 부족으로 4차례나 유회되었다. 6월 5일 국회는 개헌파만으로 성원을 유지하여 국회 출석을 거부하는 의원들에게 출석을 권고하기로 가결한 후, “6월 6일 이후 개헌안 심의, 18일 정·부의장 선거, 23일 이전에 정·부통령선거를 국회가 행할 수 있도록 국회기능을 보장하라”고 정부에 경고했다.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32쪽. 그리고 6월 11일에는 비상사태수습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출석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이를 묵살하고, 행정부와 국회의 협상 시기는 이미 지났으니 국회가 민의에 따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것만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는 서한을 국회에 보냈다. 미국은 정치파동이 미국의 신뢰와 위신을 크게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여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 시기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에버레디 계획)을 본격 검토하였고, 한국군부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고 극비리에 미국과 협조를 모색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이완범, 2007, 「한국 정권교체의 국제정치」, 『세계정치 8』 제28집 2호, 2007년 가을·겨울, 137~138쪽). 미국 내에서는 국무부와 군부가 해결책을 두고 입장이 달랐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함으로써 미국의 위신을 지키고자 하였던 국무부와 군사안보를 중시하는 군부가 부산정치파동 발생 이후 약 열흘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국무부는 한국군을 통한 직접적 군사적 개입안을 주장한 데 반해 군부는 외교적 채널을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민간인 중심의 국무부는 군사적 수단을, 군인들은 외교적 수단을 선호한 것이다. 1952년 6월 4일 국무부-합참(JSC) 합동회의에서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군사안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유엔군에 의한 직접 개입이나 한국군에 의한 쿠데타 계획을 용인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승만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과 군부정권보다는 민간정권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인 인정한 것이다. 이승만 주변의 강경세력을 배제하고 온건한 세력을 포진시키려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한국내 정치상황에 우려를 표했지만, 결국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용인하되 다만 절차 면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이완범, 2007,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제30권 제2호, 205~206쪽. 군사적 개입을 피하고 다소 순화된 형태로 이승만의 리더십을 인정할 것과 장택상의 발췌개헌안이 가장 바람직한 타협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6월 7일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Trygve Halvdan Lie)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한국정부는 민주정체를 파괴할 우려가 있는 전제적인 방법을 쓰고 있으며, 현 정세는 한국에서의 유엔의 입장에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사건이 발생했다. 정치테러와 관제민의 동원 등으로 정국이 걷잡을 수 없는 불안상태에 놓였을 때, 6월 20일 이시영, 김성수 등 재야원로 66명이 부산시 남포동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호헌구국선언대회장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유혈소동이 벌어졌다. 대회장에 있던 조병옥, 유진산, 김도연 등이 연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야당 세력은 더욱 위축되었다. 한편 1952년 6월 이승만정권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키고자 100억 원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중석불(重石弗) 사건’이 드러났다. 원래 중석불이란 우리나라의 중석을 수출하여 얻은 은행달러로서, 당시의 정부 시행규칙에 의하면 정부보유불 또는 중석불로서 양곡이나 비료의 수입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과 가뭄으로 어려운 빈농과 영세민을 위해 중석불과 정부보유불로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했고 이에 관련된 무역업자들은 당초 목적과 달리 수입량의 80%를 자유 처분해 당시 원화로 50억 원의 폭리를 취했고, 그 절반이상이 정치자금으로 여당에 흘러들어갔다(조선일보사 간, 1981, 『전환기의 내막』, 613쪽). 1952년 7월 18일 국회특별조사위원회 12명이 조사 활동을 벌여 폭리 구조를 밝혔으나, 이 사건을 주도한 재무장관 백두진 등 재무부는 처벌받지 않았다. 중석불 사건은 이승만 정권 시기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자 경제범죄로 정경유착의 시작이었다. ② 발췌개헌안 국회 상정 및 통과 1952년 4월 17일 국회개헌안이 제출되어 5월 7일 공고한 결과 6월 5일 공고기일이 만료되었고, 정부개헌안도 5월 14일 국회에 제출되어 6월 12일에는 공고 기일이 만료되었다. 6월 21일 두 개의 개헌안이 동시에 상정되었는데, 제안 취지만 설명하고 질의 및 대체토론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국회 해산과 국회의원 구속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1952년 6월 20일 장택상을 중심으로 모인 일종의 친목단체라 할 수 있는 신라회가 준비해오던 발췌개헌안이 제출되었다. 신라회와 원내자유당합동파가 타협하여 정부와 국회에서 각각 제출한 두 개의 개헌안을 발췌하여 만들었다 하여 발췌개헌안으로 불렀다. 대통령 직선제, 상하양원제, 국무총리의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과 면직,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 등 4원칙을 토대로 기초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6월 25일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거행된 6.25기념식장에서 이승만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탄환 불발로 대통령 신변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국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 범인 유시태는 현장에서 체포되고, 배후인물로 전 민국당원인 무소속의 김시현 의원이 지목되었다. 서상일, 정용환 등 민국당 간부들과 몇몇 인사들이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6월 28일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데모가 벌어졌으며, 이에 호응하여 원외자유당은 배은희, 이갑성, 박영출 의원 등의 주도로 국회자진해산 결의안을 제출했다. 원외자유당 60여 명의 서명으로 국회에 제출된 국회자율해산 결의안의 제안 이유는, 서민호의원사건과 국제공산당 사건에 국회가 헌법 49조를 남용하여 석방 결의로 국민의 분노를 발동케 했고, 계엄선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으며, 내정 간섭한 유엔한위 성명 관련 동의를 묵살한 것은 외세의존의 사대주의이며, 대통령선거·헌법개정안 등 중대 안건을 놓고도 ‘의원의 성원미달로 유회’하는 것은 국회의 기능을 상실케 한 것이라는 등이었다. 중앙일보사 편, 1983, 『민족의 증언』6권, 27쪽. 그러나 국회의 자율적 해산에 관한 결의안은 , 법률적 문제로 보류되고 제출되었다는 것만을 국회에서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52년 6월 30일 제12회 정기국회가 폐회하고, 7월 1일 제13회 임시국회가 소집되었다. 출석을 거부한 의원들을 경찰이 동원하여 국회에 들여보내고, 구금된 의원들을 의사당에 출두시켰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우려해 내각제개헌추진 의원들이 국회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을 신속히 처리한 데는 미국의 입장 변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정했던 것이다. 발췌개헌안이 상정되기 직전 주한 미대사 무쵸가 신익희 국회의장을 만나 발췌개헌안 통과를 당부했다. 이에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봉암 부의장 등이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정국이 최악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였고 발췌개헌안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던 것이다. 서희경, 2020, 『한국헌정사 1948~1987』, 도서출판 포럼, 224쪽; 이혜영, 2015, 80~81쪽. 1952년 7월 1일 제13회 임시국회가 개회되자, 7월 3일과 4일 이틀간 국회는 전원위원회를 열고 두 개헌안에 대한 정치협상을 시도했다. 개헌추진파는 계엄이 해제되고 구속된 의원이 석방되어 국회의 기능이 보장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타개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였고, 삼우장파는 정부제출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회해산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신라회와 자유당합동파(삼우장파)가 제3의 발췌안을 내놓았다. 이는 장택상 국무총리가 국무회의에서 제시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회해산을 대신하여 해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발췌개헌안에 서명한 의원은 자유당 합동파 63명, 신라회 30명, 자유당 잔류파 19명, 민우회 11명, 민국당 6명, 무소속 4명, 총 133명으로 재석 183명의 개헌정족수 3분의 2를 넘었다.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지청천 전원위원장이 보고한 개헌안에 관한 정치협상의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ⅰ. 신라회에서 입안한 양 개헌안의 종합 발췌안을 중심으로 토의할 것. ⅱ. 동안(同案) 중 ‘상원’, ‘하원’을 ‘참의원’, ‘민의원’으로 개칭하고, 부칙 제3항 “상원은 본 법 시행 후 지체 없이 구성하여야 한다”를 삭제할 것. ⅲ. 국회의원 제출 개헌안 중 70조 제2항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회에 대하여 국무원의 권한에 속하는 일반 국무에 관하여는 연대책임을 지고, 각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개별책임을 진다”를 현행헌법 70조 제3항으로 삽입할 것. ⅳ.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거하자는 문제는 불문에 부칠 것. ⅴ. 발췌안 제70조2항 중 ‘국회’를 ‘민의원’으로 자구 정리한다. 국회사무처, 제13회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2호, 1952. 7. 4. 그에 따라 정부제출 개헌안과 국회 제출 개헌안 두 가지 중에서 채택한 조문들만을 가지고 표결에 부치게 되었고, 7월 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서 재석 166 중 가 163, 기권 3표로 가결되었다. 정부는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이렇게 발췌개헌안이 급하게 통과된 데에는 대통령 임기와 차기 대통령 선거 시한 문제도 걸려 있었다. 1948년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었고, 그 시한이 1952년 8월 15일이었다. 당시 선거법에서는 선거일 40일 전에 선거공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발췌개헌이 이루어지고 7월 19일에야 ‘정·부통령 선거법’이 공포되어 이미 선거법이 정한 시한을 지킬 수 없었다. 이에 국회는 서둘러 정·부통령 선거법을 기초하여 1952년 7월 18일 공포하였고, 선거일이 8월 5일로 결정되었다. 선거준비기간은 17일에 불과했고, 선거일 8일 전인 7월 26일에야 입후보자들이 중앙선거위원회에 등록할 수 있었다. 선거운동기간은 단 8일이었다. 촉박한 시일로 인해 선거 공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인지도와 관공리 및 경찰의 선거개입과 국민동원 능력이 관건이었다.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자유당내 최대세력인 족청계를 이끌던 이범석을 지명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이시영, 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지명하였다. 최종 대통령후보로 이승만, 이시영, 조봉암, 신흥우가 출마하고, 부통령 후보에 함태영, 이범석, 이갑성, 이윤영, 전진한, 임영신, 조병옥, 백성욱, 정기원이 등록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한 가운데, 관심사는 부통령 당선자였다. 선거 결과 이승만이 74.6%인 523만여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범석의 세력 강화를 두려워한 이승만이 행정조직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함태영의 선거운동을 하게 한 결과였다. 이범석이 이에 반발하면서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열과 비족청계열 간의 권력 다툼이 1953년 상반기까지 이어졌다. 1953년 9월 12일 이승만은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를 제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승만 담화, 「일체의 파당요소 제거, 자유당 국민회에 대하여」, 공보처 편, 1956, 『이승만대통령담화집』 2, 130~131쪽. 이후 자유당에서 족청계가 제거되면서 이기붕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③ 제1차 개헌 : ‘발췌개헌’의 주요 내용과 평가 발췌개헌의 절차적 위헌성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래서 발췌개헌은 무혈쿠데타에 의한 개헌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발췌개헌은 헌법규정과 법원리(적법절차의 원칙)를 무시한 위헌적 헌법개정이었다. 발췌개헌은 공고의 절차를 위반하였고, 국회의원의 토론의 자유 없이 강행된 것이기에 투표의 자유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위헌이라고 본다. 김철수, 1988, 『한국헌법사』, 대학출판사, 78쪽. 절차적 위헌성의 근거로는, 첫째, 헌법 제98조 제2항에 의하면 헌법개정절차에 있어서 대통령이 30일 이상의 공고기간을 두어 국민에게 개정될 헌법의 내용을 충분히 알리고 주지시켜야 하는데 이를 무시함으로써 공고절차를 위배하였고(공고절차의 위배), 둘째, 정부 측에서 제출한 개헌안은 제2차 개헌안과 동일한 내용의 개헌안을 동일한 회기 중에 제출한 것이 되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정확하게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에 저촉되며, 셋째, 의원들이 야간국회의 구금상태에서 기립표결을 통하여 통과되었다는 점에서 위헌이다.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아니하고,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의사가 억압된 상태에서 행하여진 강압에 의한 투표이므로 투표의 자유(자유투표의 원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1차 개헌과정에서 있어서 국가긴급권을 발동한 점으로, 정부는 무장공비잔당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전남북과 경남지방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위기감 및 공포분위기 조성’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때의 국가긴급권의 발동은 억압과 강제에 의한 개헌과정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이후의 헌정사에서 개헌을 위한 국가긴급권 악용의 선례 및 오점을 남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제1차 개헌(발췌개헌)안은 오로지 통치구조 부분에만 한정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개헌안을 조문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백유, 2015, 「제1공화국 헌법의 성립과 헌법발전」, 『서울법학』 22(3), 221~223쪽. : ⦁이승만이 요구하였던, 대통령·부통령의 선출은 국민직선제로 개정되었고(제53조) ⦁정부·여당의 주장에 따라,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로 구성하였고(제31조), ⦁민의원 의원은 4년(제33조 제1항), 참의원 의원은 6년의 임기로 하되 2년마다 의원 3분의 1을 개선하며(제33조 제2항), 법률안 기타 의안에 관하여 양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할 때에는 각원(민의원·참의원)의 재적과반수가 출석한 양원합동위원회에서 출석의원 과반수로서 의결하며(제37조 제2항), ⦁야당의 주장을 반영하여,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국무위원 임명에 있어서 국무총리의 임명제청권)으로 대통령이 임면하고(제69조 제4항),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무원에 속하는 일반국무에 대하여는 연대하여(연대책임),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는 개별적으로(개별책임) 국회에 대하여 책임지며(제70조 제3항), ⦁의원내각제적 요소로서, 민의원에서 국무원불신임 결의를 하였거나 민의원총선거 최초에 집회된 민의원에서 신임결의를 얻지 못한 때에는 국무원은 총사직하여야 하며(제70조의 2 제1항), ⦁헌법개정은 대통령, 민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 참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제안하되(제98조 제1항), 헌법개정안에 대한 의결은 양원(민의원·참의원)에서 각각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써 하도록 하였다(제198조 제4항) 이 개헌으로 국회는 대통령 선출권을 박탈당하고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나 여전히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행정각부의 장관인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면하도록 되어 있었다. 둘째,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국회에 대하여 국무위원의 권한에 속하는 일반국무에 관하여는 연대책임을 지고 각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개별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셋째, 양원 중 민의원이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를 하면 국무위원은 총사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에 의해, 그리고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권에 의해 제약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권력분립의 원리는 애초부터 무시하고 선거와 국회를 비정상적으로 이용하는 강력하고 권력집중적인 대통령이 이미 존재하고 그 권력의 공고화를 위하여 직선제를 수립하여 가는 마당에 국회에 그러한 권력을 부여한 것은 정치적 명분포장과 회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존중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제청권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창당한 자유당이 국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어 국회로부터도 견제를 받지 않고 계속 독주할 수 있었다. 이정복, 1996, 「제1공화국의 성격, 정치제도 및 주요정책」, 『한국정치연구』 5집,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4쪽. 또한 제1차 개헌 결과 국회는 양원제가 되어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1954년 제3대 국회부터 민의원으로 개칭하기는 하였으나, ‘민의원의원선거법’은 1958년에서야 제정되었고, 참의원의원선거는 제1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실시되지 않아서 실제로 양원제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정치구조 면에서는, 개헌과정의 비민주적 행태나 위헌성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무원 불신임제를 도입함으로써, 의원내각제의 내각불신임제와 유사한 제도로서 전통적인 대통령제적 모델을 제헌헌법보다 더욱 일탈한 모순을 내포하게 되었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도 발췌개헌안이 이론적으로 보면 불합리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애초에 철저한 대통령책임제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도 아니어서 여유가 있었던 것이 발췌안이 채택되어 한쪽으로 대통령책임제가 강화되고 또 한쪽으로는 내각책임제가 강화되었으니 이상스럽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유진오의 발언, 「헌법수난 9년-제9회 제헌절을 맞아 본사서 좌담회」, 한국일보 1957년 7월 14일.
- 02 2. 주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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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 해제: 1954년 2차 개헌 : ‘사사오입개헌’ : 1952~1954 1. 1954년 5.20 총선과 개헌의 배경 (1) 제3대 총선거와 자유당의 선거전략 : 개헌안의 연계 ① 자유당의 개헌안 연계 선거전략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총선거 과정에서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미 개헌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헌안 발의는 1952년 7월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에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1952년 7월 17일, ‘국회의원 소환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함태영 부통령을 중심으로 ‘헌법연구회’를 구성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이 개헌논의는 자유당 국회의원 포섭공작이 진행됨에 따라 지지부진해졌다. 자유당은 개헌안과 제3대 총선거를 연계하여 진행하였다. 선거운동의 주요기구로 개헌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개헌추진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개헌추진위원회는 자유당, 민중자결단, 국민회 대표 등 대중단체와 함께 구성되었고, 선거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헌추진위원회가 개최한 전국 규모의 개헌추진국민대회에서는 5개 항의 개헌 내용을 국민의 이름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하도록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개한 개헌안의 일부 내용은, “첫째, 정·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단 초대 대통령은 차한에 부재한다. 둘째, 헌법개정 및 국가구성요소의 변혁은 유권국민 3분의 2 이상의 결의 없이는 할 수 없다. 셋째 선거민에게 양원 의원에 대한 소환권을 부여한다. 넷째, 정부에게 민의원 해산권을 부여한다. 다섯째, 헌법 제6장 경제조항을 개정한다.”는 것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8, 『대한민국선거사』, 357쪽.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총선거에서는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갖춘 자유당이 여당으로 공식적으로 등장하여 선거에 참여하였다. 이 선거의 특징은 정권의 무제한적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정권의 강력한 통제력이 형성된 가운데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선거 부정이 심각했다. 경찰간부들의 자유당 후보 선출 강요, 통반장들의 호별 방문, 도지사의 지시 등 노골적인 형태의 관권개입이 이루어졌다. 자유당은 총선거 과정에서 개헌에 방해되는 인물과 차기 대권후보 등 야당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2대 국회에서 내각책임제를 제안한 후보들은 입후보조차 할 수 없도록 강요하고, 조봉암, 신익희, 허정, 조병옥 등에게도 정치보복과 정치공작을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입후보자의 등록 방해, 입후보자 사퇴 압력, 경찰의 직간접적 개입, 괴청년단체의 협박이나 선거운동원에 대한 테러, 행정부의 투·개표 과정의 불법행위 등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박태균, 1995, 202~206쪽. 이기붕과 같은 선거구인 서대문 을구에서 출마하려 했던 조봉암은 등록방해로 출마조차 못하였고, 신익희, 조병옥 등 민국당 거물급 인사들의 선거운동원들이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구속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자유당은 3대 총선거부터 공천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야당인 민국당도 일부 후보를 공천했지만 국회의원 입후보를 위해서 정당공천이 법적 요건은 아니었다. 정당공천제는 한 당에서 여러 후보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난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선진적인 제도이지만, 이 선거에서는 개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공천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공천에는 이승만의 의사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거 전 이승만은 현직 국회의원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 담화, 「민의원 의원 선거에 관하여(1954. 3. 11.)」, 「국회의원 선거에 대하여(1954. 3. 21)」, 공보실 편, 『이승만대통령담화집』 2, 9쪽, 11쪽. 그리고 개헌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 자리를 준 것이다. 3대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의 선거 구호 1번이 개헌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제3대 총선거의 경우 자유당 공천 조건이 개헌에 대한 동의 여부이므로 선거 결과 자유당 의석수는 개헌동의 여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자유당이 전열을 갖추어 선거에 임한 데 비해 야당은 전쟁이 끝난 후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조직력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따라서 선거의 쟁점은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헌에 대한 동의여부와 정부에 대한 지지와 반대였다. ② 정부의 헌법 경제조항 개정안 제출과 철회 정부는 1954년 1월 23일 경제조항개정안을 제출했다. 건국헌법은 기간산업 및 주요산업의 국공유화, 사영기업의 국유화 등의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대폭 도입하고 있었다. 헌법기초위원회 보고 및 헌법안 제1독회에서 유진오의 헌법초안 이유설명서, 제1회 국회속기록 제17호, 9쪽. 이는 광범위한 국유화와 사회화의 규정 하에 공공복리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깊이 개입할 수 있음을 규정한 것이었다.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 내지 국영원칙은 당시 엄청난 비중을 점하던 귀속재산과 관련이 있었다. 정부로서는 미군정으로부터 넘겨받을 막대한 재산을 맡아서 관리할 법적 근거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헌법의 경제조항에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 및 국영의 원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우파세력이 중심 정치세력이었던 제1공화국의 헌법이 이러한 경제정의 조항을 유지한 것은 일제 강점기의 경제적 불평등과 북한 공산정권 경제적 평등주의에 상징적 차원에서나마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정복, 1996, 「제1공화국의 성격, 정치제도 및 주요정책」, 『한국정치연구』 5집,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3쪽. 해방과 전란으로 인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의도로 정부는 헌법 경제조항 개정을 시도했다. 개헌은 4개의 경제조항에 한정된 것으로, 사기업에 의한 개발과 외자유치를 위하여 통제경제적인 헌법조항을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의 경제조항 개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수력 등 자연력의 처분·채취·개발 또는 이용에 관한 것은 법률로 정하여 소유경영 내지 이용관계로 융통성 있게 하고, 둘째, 중요한 운수·통신·금융·보험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예외적으로 사영을 특허하며 대외무역의 국가통제의 기준을 법률로써 제정하며, 셋째,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요함으로 인하여 법률을 제정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경영을 통제나 관리할 수 없게 한다. 제의 이유로서, 현행헌법이 일면 자유주의경제의 장점인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면서 한편 사회주의적인 균등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통제경제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중요자원과 중요기업은 국유 국영제도가 원칙으로 되어 있어서 헌정 5년 동안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경제의 후진성에 있으므로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의 자유와 창의의 귀중성을 체험시켜서 생산력의 고도증강 국가경제의 발전을 기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 개헌안이 공고된 다음 국회는 공고기간을 이용하여 법제사법위원회 주최로 서울·부산·대구·광주 등지에서 공청회를 갖고 찬반여론을 청취한 다음 2월 25일 제26차 본회의에 상정하여 3월 4일까지 연5일간에 걸쳐 질의토론을 벌였다. 국회에서 이 경제조항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박명림은 이것이 제헌국회의 국가보안법 논쟁에 이은 건국 이래 두 번째의 국체 대논쟁이라고 보았다(박명림, 2008, 「헌법, 국가의제, 그리고 대통령 리더십-‘건국 헌법’과 ‘전후 헌법’의 경제조항 비교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2008-12, 48(1), 445쪽). 질의토론에서 나온 반대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경제가 헌법이 조문을 고친다고 해서 발전될 수 있는가? 둘째, 전시하의 경제체제는 오히려 통제체제로 나아가고 있는데, 개헌을 통해 자유경제체제로 갈 필요가 있는가? 셋째,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시장지배 등의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넷째, 현행헌법이 철저한 자유경제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유경제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결국 독점경제를 지향하겠다는 의도이다. 반면 찬성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제경제로부터 자유경제로의 완전 전환은 아니다. 둘째, 개헌을 하더라도 균등사회 실현을 위한 법적 제도적 근거는 층분하다. 셋째, 경제파탄 상태로 인해 외자도입은 당장 절실하다. 넷째, 외자에 의한 경제침략보다는 외려 개헌을 하더라도 얼마만한 외자가 들어올지 우려스럽다. 경제침략 역시 법률적으로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 외자를 무서워하는 것은 일부 편협한 쇄국주의, 국수주의자들의 자살행위적 애국론에 불과하다. 다섯째, 국유화 조항이 외자도입을 가로막고 있음으로 경제파탄을 개헌을 통해 타개하겠다는 주장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여섯째, 기업의 자주성과 창의성이 절실하기 때문에 개헌은 필요하며, 기업·자본·시장 독점의 우려는 정책으로 규제할 수 있다. 박명림, 2008, 「헌법, 국가의제, 그리고 대통령 리더십」, 『국제정치논총』 제48집 1호, 447~448쪽. 이승만은 이 개헌을 추진하기에 앞서 족청계를 제거하고 자유당을 재편하고자 했다. 자유당 내 이기붕, 이갑성 등 새로운 연합체제를 형성하며 족청계를 제거한 후 원내자유당 세력을 흡수했지만, 확대된 자유당은 쉽게 통제되지 않았다. 이때 국회의 세력분포는 자유당이 102명, 민주국민당은 22명, 무소속 55명으로, 개헌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자유당 의원들이 행동통일을 하더라도 20명 이상의 의원을 포섭해야 했다. 이승만은 “천하에 처음 보는 국회에 중대한 개헌을 맡길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한 후 3월 9일 개헌안의 철회를 요구하였고, 국회는 3월 15일 이를 승인했다. 백두진 총리는 임기 만료를 앞둔 2대 국회에서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철회 이유로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 철회 이유는 총선을 앞두고 정부 정책의 실패를 부각시키려는 민국당과 공천제를 통해 당내 권력구조를 재편하고자 했던 자유당의 내분으로 인한 것이었다(신용옥, 2008, 「대한민국 헌법 경제조항 개정안의 정치·경제적 환경과 그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2008년 봄호 제44집, 279, 292쪽). 이때 이승만 정부가 경제조항 개헌을 추진한 데는 미국과의 관계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질서가 사적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사기업 중심을 지유경제체제로 나아가기를 원했으며, 이것이 외자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전제라고 보았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후 원조의 실행을 앞둔 한국 정부가 미국을 의식하여 경제조항 개헌안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경제조항 개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정의 취지를 실해하려는 한국 정부의 의지라고 보았다. 이때 철회한 경제조항은 1954년 9월 정부가 개헌안을 제출할 때 포함되어 통과되었다. (2) 자유당의 득세와 의원포섭 공작 선거 결과 자유당은 공천 후보 99명, 비공천 후보 15명이 당선되어 총 114석을 획득했다. 민국당은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기타 1석, 무소속이 67석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득표 비율로 보면 자유당 36.7%, 민국당 7.9%, 무소속이 47.9%로, 자유당보다 무소속 비율이 높았다. 제헌의원 선거부터 이어져온 무소속 강세현상이 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불안정한 정당구도가 반영된 것이었다(심지연, 2017, 『한국정당정치사-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59~60쪽). 자유당은 경기·강원·충청·충북 각 도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경남·경북·전남·전북 각 도에서는 반수를, 서울시에서는 겨우 3분의 1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제2대 국회 말기의 자유당원내세력을 형성하던 주요 인사들이 낙선한 반면, 원외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기붕과 정부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고, 민국당은 신익희·조병옥·윤보선 등 거물급과 소선규·김상돈·신도성 등 쟁쟁한 인물들이 원내 진출했다. 제3대 총선거 결과 표면적으로는 자유당이 승리하고 민국당의 철저한 패배로 드러났다. 자유당의 공천제도의 영향으로 무소속 국회의원도 이전 총선거에 비해서 감소했다. 헌정사상 최초로 여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성립되었지만,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인 정원 203석의 3분의 2인 136명에는 미치지 못했다. 선거 전 개헌과 공천을 연계하였으므로, 개헌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후 개헌 정족수 확보를 위한 자유당의 의원 포섭공작이 진행되어 1954년 6월 9일 제3대 국회가 개원할 때 자유당은 127석을 확보했다. 의석수 우위를 토대로 자유당은 제3대 국회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최순주가 선임되었고, 상임위원장 14석도 자유당이 독점했다. 국회의장 투표에서 자유당 이기붕이 124, 민국당의 신익희가 52, 무소속의 장택상이 15,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이 7표를 얻었는데, 이 득표수가 국회 내 여·야 세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유당은 의원 포섭공작을 계속하여 교섭단체등록 시인 6월 16일 개헌 정족수인 136석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무소속의원 일부는 무소속동지회로 30명이 모이고, 민국당은 교섭단체 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소속 36명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2. 자유당의 개헌안 (1) 자유당의 개헌안 제출 정부와 자유당은 1954년 5.20 총선거 이후 정부기구개편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추진하기 위해 헌법개정초안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개헌의 주요 내용은 ‘국민투표제 채택, 국회의원 소환제, 국무총리제를 국무장관제로 변경, 대통령 궐위 시 잔여임기는 부통령이 대리하고 부통령 궐위 시 부석국무위원이 대리, 경제조항 개정 등의 5개 조항으로 정리되었다. “표면화한 개헌운동”, 동아일보, 1954. 7. 11. 그러나 5.20 총선거에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위해서 불안정한 당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승만이 지시한 국회의원 소환제를 개헌안에 포함시킬 경우 자유당 내에서도 이탈자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국회에서 국무원 신임안이 통과된 이후 7월 9일 정부 여당 연석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개헌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개헌 주도권을 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각료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촉발되었다. 정부와 여당 사이에서 가장 쟁점 사항은 국회의원 소환제로, 자유당 일부와 무소속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개헌안 초안 구상 단계에서 제외되었다. 이때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에게 ‘승계권’을 부여하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승계권 규정은 부통령 후보로 예측되는 이기붕과 주류파의 정치적 이해를 담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무총리제 폐지 대신 국무위원 개개인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을 삽입하여 의원과 국회의 행정부 견제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김혜진, 2002, 「제1공화국의 제도변경에 관한 연구: 대통령선출제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제11집 제2호, 127쪽. 정부와 자유당이 협의하여 개헌 초안을 마련하여 협의한 후 이승만의 동의를 받아 9월 2일 개헌안 서명에 착수하였다. 자유당은 1954년 9월 6일 이기붕 외 135명의 서명으로 개헌안을 제출하고, 정부는 이틀 후인 9월 8일 이 개헌안을 공고했다.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권의 제한이나 영토의 변경 등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하여는 국민투표 실시, 둘째 국무총리제를 삭제하고 국무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며, 셋째, 참의원에 대법관 등 법률에 의해 지정된 공무원 임명 인준권을 부여하고, 넷째,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의 원칙으로 이전하며, 다섯째, 대통령 궐위 시 국민이 직접 선거한 부통령으로 하여금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하되 3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거케 하며, 여섯째,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할 것 등이었다. 그 외에도 헌법회의의 헌법적 근거 명시, 국민에게 헌법개정제의권의 부여, 양원의 권한관계를 명백하게 하고 혹은 변경할 것, 국회의 탄핵소추의 발의 및 의결종족수를 저율로 할 것, 그리고 헌법개정의 한계를 규정한 것 등 광범위했다. 개헌안 공고기간 동안 야당은 반대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야당계 신문들은 연일 개헌 반대 이론을 내세워 자유당을 공격했다. 민국당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개헌안 공청회 등을 열고 반대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무소속동지회 소속 의원 30여명도 총회를 열고, 이 개헌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이 목적이며, 국민투표제니 자유경제체제니 하는 것은 미끼일 뿐이라며 만장일치로 개헌에 반대했다. 무소속동지회는 개헌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국정만반의 혼란과 민생의 고난을 가져온 정치적 원인은 정부 스스로가 법질서를 유린하고, 관료독선 행정적으로 이도가 부패되고, 행정각부의 연대책임의 결여로 종합적인 정책수행을 불가능케 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개헌으로서, 첫째, 국가원수와 행정권을 완전히 분리하고, 둘째, 내각연대책임 하에 내각은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셋째, 내각에 의회해산권ㅇ르 부여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는데, 현 개헌안이 성립된다면 정계를 문란케 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절망의 구렁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42쪽. 이러한 반대운동에 상당수 국민들이 호응하였고, 여론도 개헌 반대로 기울어지는 분위기였다. 총선거에서 참패했던 민국당은 개헌반대성명을 발표하며 반대파의 중심으로 부활했다. 민국당은 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반대의견의 핵심은, 첫째 개헌은 양원 각각 재적의원 2/3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했으나(헌법 제98조), 참의원 구성조차 하지 않은 채 부칙을 악용했다는 절차적 문제, 둘째, 초대 대통령에 한하는 중임철폐조항은 만민평등의 법칙(헌법 제8조)과 위배된다는 점, 셋째, 국민투표제가 관제민의동원과 같은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동아일보, 1954. 9. 21 민주당은 “설사 헌법개정의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참의원을 구성한 후에 헌법규정의 절차대로 양원의 의결을 얻어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개헌 때와 달리 개헌반대운동은 민국당 주최의 개헌안토론회, 각 신문사주최의 개헌안 공청회 등 언론의 참여와 여론형성이 시도되었다. 10월 7일, 공고 기간 한 달이 지나 언제든 개헌안 상정 표결이 가능해졌지만,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확신할 수 없어 개헌안 표결을 미루고 있었다. 이승만은 10월 11일 변영태국무총리를 통해 개헌안을 사항별로 표결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국민투표안만 통과되면 임기문제는 국민공의에 따라 판결될 것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자유당 간부진은 개별 사항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전체를 일거에 밀어보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추진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민국당의 신익희가 월북한 조소앙과 통일문제를 협의했다는 ‘뉴델리 밀담설’이 발표됨으로써 개헌찬반 논란에 이데올로기 공세가 개입되었다. ‘뉴델리 밀담설’은 민국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인 함상훈이 ‘전 민국당 동지들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알려졌는데, 신익희 국회의장이 1953년 6월 2일 국회의장 자격으로 영국 엘리자베드여왕 대관식 참석차 유럽 순방 길에 뉴델리에서 북한의 조소앙과 만나 한국의 중립화 통일을 논의했다는 것이었다. 민국당은 성명서를 발표한 함상훈을 제명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민국당 내 파벌 대립으로 개헌 반대의 힘도 분산되었다. 10월 19일 이승만은 개헌문제에 대해 또다시 담화를 발표했다. 국제정세가 위급한 상황이므로 2년 전의 소위 ‘정치파동’과 같은 난국이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면서, 이번 개헌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투표제라고 강조했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을 하지 말라는 조항은 인정치 않는다. 그러나 이 운동이 자유당의원이나 당원들이 국회에서 주장하게 되면 정당주의와 친분상 관계로 이런 운동을 하는 것같이 보이게 되면 동지들의 본의도 아니고 나에 대해서도 욕이 되지 않는 영광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이것을 국민공의에 붙여서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태도를 표명했다. 공보실, 1953,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제2집, 49~51쪽. 다시한번 ‘국민 공의’를 내세워 자유당이 내놓은 개헌안의 통과를 압박한 것이었다. 의원들이 개헌안 통과에 찬성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개헌안 상정을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당정책위원회는 자유당 의원의 찬성을 강제하기 위한 기명투표제 국회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헌찬성 자유당 의원조차 국회법 개정은 당지도부와 행정부의 의원에 대한 압박이라며 탈당까지 거론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였다. 야당측은, “정치파동의 결산인 발췌개헌안 표결에서 기립을 강요했던 사실을 되풀이하려는 여하한 조치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과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 문제로 국회에서는 11월 13~15일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에게 개헌안을 비롯한 사회질서 유지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개헌을 주도적으로 반대한 것은 민국당이 아니라 무소속동지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회에서는 개헌안을 빨리 통과시키라는 결의문을 보내고, 지방의원들의 상경이 이어졌다. 반공전혈대 이름으로 벽보와 삐라가 뿌려졌고, 이승만의 담화도 이어졌다. 그러나 1차 개헌처럼 원외 대중동원이나 물리력에 의존하기보다 원내에서 수의 정치와 절차적 조작을 통해 개헌이 이루어졌다. (2) 자유당 개헌안의 주요 쟁점과 의미 1954년 11월 18일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개헌안 발의 이후 2개월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자유당 이재학의원이 제안 설명을 한 후 질의응답이 일주일 간 이어졌다. 국민당의 조재천의원은 39개항을 2일간 계속했고, 무소속동지회에서 10명이 질의에 나섰다. 자유당에서 이재학과 장경근, 황성수 의원이 답변했다. 대체토론은 찬성과 반대를 6명씩 각파에서 지명해서 진행했다. 질의와 토론을 통해 개헌안의 중요한 내용에 대한 찬반 이유가 거의 다 표명되었다. 국회에서 진행된 질의와 토론의 쟁점은 국민투표제·국무총리제 및 국무원연대책임제 폐지·초대대통령의 중임제한 폐지·경제질서 등으로, 쟁점별로 찬성과 반대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19회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82호~89호 1954년 11월 18~26일;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43~145쪽. 먼저 국민투표제에 대한 찬성 이유로 제시된 것은, 첫째,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중요사건에 대한 최후결정권은 국민에게 부여하여 민권을 신장해야 한다. 둘째, 국제적으로 압력이 있을 때에는 정부와 국회와 국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헌법적인 효과를 가지고 막을 수 있다. 셋째, 남용 등 폐해를 배제하기 위한 안전판으로서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한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국한하고 반드시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에야 할 수 있고, 국민투표의 발의권을 국민에게만 부여하였으므로 부작용의 염려가 없다는 점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첫째, 관권에 의하여 조작민의가 성행되는 데 도리어 민권을 압박하고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된다. 둘째, 외세의 압력, 기타 이유로 주권의 제약,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중대 사항을 정부나 국회가 결정을 했을 때 국민의 자유의사로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정부나 국회가 낸 국민투표를 원하지 않는 경우에 2개월이란 단시일 내에 50만 명을 동원하여 발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하등의 실효성 없는 무용의 지물이다. 셋째, 국회가 기결한 것을 다시 국민투표에 붙여 부결시킨다는 것은 국회를 거세 무력화하며, 직능을 상실케 하는 등 남용의 우려가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두 번째로 국무총리제와 국무원연대첵임제의 폐지에 대하여 찬성하는 이유로 제시된 것은, 첫째,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라는 상극하는 두요소를 혼합채택한 결과 헌정운영에 있어서 행정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여졌고, 국회와 정부의 대립·마찰로 국사지연을 초래하였으므로 양자 중 하나를 채택하여 모순을 시정한다. 둘째, 아직 건국단계에 처하고 전란의 초비상시에 있어서 부흥재건의 중대과업수행에 일관성 있는 시책과 전문적·기술적·효율적인 행정운영을 함에 있어서는 안정성 있는 대통령중심제가 적합하다. 셋째, 국무원을 존치하여 각부간의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국회에 국무위원의 개별적인 불신임권을 부여함으로서 정당정치가 아직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국민의 실정에 감하여 책임정치구현의 애로와 폐해의 발생을 제거할 수 있다는 등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첫째, 발췌개헌 후 국무총리는 제청권을 행사해 본 일이 없고, 불신임을 해 본 일이 없는 데 혼란과 마찰을 초래했다 할 수 없고, 적용만 잘 하면 내각책임제의 좋은 실적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대통령중심제는 미국과 같은 3권의 엄격한 분립과 상호견제, 특히 사법권의 권한협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전통과 정당의 발달 등의 토대가 있어야 성공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중남미 제국과 같이 독재자의 도구로서 폭력혁명의 소인을 만든다. 셋째,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다분히 채택되어 있는 현 헌법 하에 있어서도 행정부의 실질권력이 과중하여 삼권분립의 기본구조는 파멸에 임하고 정부 내 각부처간의 종합성의 결여는 행정의 무계획 무질서를 초래하여 난국의 수습을 불가능케 하고 있는데 국무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면 입법부는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행정의 전횡과 부패의 혼란은 극도에 달할 것이라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세 번째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폐지에 대하여 찬성 이유로 나온 것은, 첫째, 내외다난하여 중대한 존망의 기로에 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우리 국민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민족의 숙원인 민국주권하의 남북통일을 실현하는 중대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하여야 할 대통령의 최적임자로서 건국공적이 찬연한 초대 대통령이며 건국 후의 혼란기를 통하여 또는 공산침략에 항거하여 시종일관 애국지성으로 우리민족을 영도하여 온 현 이승만대통령의 계속취임을 국민이 원한다면 당선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둔다. 둘째, 미국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례를 깨뜨리고 4선을 하였으며 그 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까지만 하게 함에 있어서 당시 존재하던 트루먼대통령에게는 이 규정의 적용을 배제한 예에 비추어 특권의 창설이 아니라는 점 등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첫째, 종신연임을 허용한다는 것은 일개인을 위하여 국헌을 변경함이 원칙상으로 불가할 뿐 아니라 일종의 특권을 설정하는 것이니 국민평등을 선언한 헌법 제8조의 규정에 저촉된다. 둘째, 후대의 대통령이 선례를 모방하여 자기에 대한 중임제한폐지의 개헌을 또다시 기도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셋째,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헌법상의 제한이 없었고, 트루먼대통령은 헌법 개정으로 말미암아 불공평한 처지에 있으니 예외로 취급할 수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네 번째로 경제질서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찬성 이유로는, 현실적으로 국가 개입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자유주의 경제원칙을 천명하여야 외국 자본 유치가 쉽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반대 이유로는, 경제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인지, 실패의 원인을 헌법조항에 돌리는 것은 아닌지, 전시에 자유경제체제의 도입이 바람직한지 등에 대한 질문과 외국자본 도입이 국가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그 외에 쟁점이 되었던 것은 양원제가 실시되지 않은 데 따른 위헌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11월 27일 국회 제90차 본회의는 대체토론이 종결되는 마지막 날이었는데, 이날 민국당의 신도성은 현행 헌법이 양원제이므로 민의원만의 개헌은 위헌이요 불법이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국회사무처, 제19회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90호, 1954. 11. 27. 헌법 제31조 2항에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써 구성한다’고 되어 있는데, 발췌개헌안으로 양원제를 통과시키고도 참의원을 구성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헌법 98조 4항에는 “헌법 개정의 의결은 양원에서 각각 그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으로서 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참의원 승낙 없이 민의원 단독 개헌은 위법이라는 것이었다. 3. 개헌안 표결과 ‘사사오입개헌’ (1) 개헌안 부결과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① 개헌안 표결 :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1954년 11월 27일 일괄표결 전 무소속의 송방용의원이 자유당의 암후투표 방지를 위한 발의를 했다. 이 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감표의원이 투표 후 그 용지를 봉인하기로 합의한 후 무기명투표로 표결이 이루어졌다. 표결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 부 60, 기권 6, 무효 1, 결석 1로서 사회자인 최순주부의장이 부결을 선포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에서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부에서도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논의한 끝에 갈홍기 공보처장이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정부 견해를 발표함. “60표의 반대표는 총수의 3분지 1이 훨씬 되지 못한다. 한국은 표결에 있어서 단수를 계산하는 데 전례가 없었으나 단수는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는 것이 정부의 견해이다.” 다음날인 11월 29일 국회를 시작하자마자 사회자인 최순주 부의장은 “지난 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국회사무처, ‘헌법개정안 정족수에 관한 건’, 제19회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91호, 1954. 11. 29.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때 곽상훈 부의장이 “나도 부의장자격으로 개헌안부결을 확인 선포한다”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이기붕 의장이 장내를 수습하고 회의록 시정여부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야당의원들이 총퇴장한 가운데 의석에 남은 자유당의원 125명(강세영 무소속의원 포함)이 긴급동의로 “개헌안은 재적의원 3분지 2인 135로서 가결된 것이고 지난 회의록은 계산착오이므로 정정한다”고 결의했다. 이날 오후 3시 경무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대통령서명을 개정헌법이 공포되었다. 이렇게 ‘사사오입’으로 개헌을 통과시킨 자유당은 개헌 파동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강경 대응 방식을 택했다. 제94차 본회의에서 국회 부의장 곽상훈을 국회혼란을 이유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야당의원들이 출석 거부하는 상황에서 통과과정에서 물리력을 행사했던 이철승, 김상돈 의원의 징계동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정부와 자유당의 무리한 제2차 개헌 이후 자유당에서 이탈의원들에 대한 제명과 의원들의 자발적 탈당이 이어졌다. 1954년 12월 5일 이후 자유당 의원의 탈당이 이어져 총 18명이 탈당했고, 야당의석은 85석으로 늘어났다. ② 호헌동지회 구성과 신당운동 : 민주당과 진보당 결성 사사오입 개헌안이 자유당 의원들에 의해 번복 결의된 후 야당의원들은 계속 본회의 출석을 거부했다. 출석을 거부한 무소속동지회,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60명이 날마다 대책을 세우고, 11월 29일에는 위헌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수의 횡포로서 가결된 것을 번복한 것은 비법적이라고 지적하며 헌법수호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다음날인 30일 헌법수호의 뜻을 따라 ‘호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12월 3일에는 새로운 야당연합조직을 만들기 위해 신당조직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호헌동지회 의원들은 본회의 거부 일주일만인 1954년 12월 4일 국회 제96차 본회의 전원 출석하여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 시비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당의 시도는 자유당의 숫자에 밀려 모두 부결되었다. 호헌동지회는 이기붕의장과 최순주부의장의 징계동의를 내걸고 공세를 했지만, 자유당에서는 곽상훈부의장 징계동의로 맞섰다. 9일에는 개헌안 가결 선포와 회의록 정정 과정의 결의가 불법으로 무효라는 요지의 회의록 번복안을 제출했으나 폐기되었다. 이어서 정부규탄안, 국무위원 백한성에 대한 불신임결의안, 공보처장 갈홍기 파면 결의안 등을 제출했지만, 12월 14일 모두 부결되었다. 이로써 11월 29일 이래의 개헌안 통과를 둘러싼 파동은 16일 만에 원내의 의제로서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파동 과정 중에 자유당 의원의 탈당과 호헌동지회 가입이 이어졌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가증하게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여론이 비등하자 원내외의 반이승만 세력이 결집하였다. 당시 원내 반대세력의 분포는 무소속 상태인 민국당 14석, 윤병호를 교섭단체 대표로 등록한 ‘무소속 동지회’ 31석, 순수 모소속 23석 등 모두 68석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성격이 서로 다르고 조직도 분산되어 있었지만 개헌 반대에는 입장을 같이 했다. 이들이 원내교섭단체인 호헌동지회로 결집하였다. 오유석, 2000, 「민주당내 신·구 파벌간 갈등에 관한 연구」, 『국사관논총』 94집, 308쪽. 호헌동지회 결집 후 단일야당을 결성하기 위한 신당운동이 급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54년 12월 2일 ‘야당연합신당’이 결성되었고, 다음날인 12월 3일에는 호헌동지회 지도층 7인으로 ‘신당발기촉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로부터 20여일 후인 1954년 12월 24일 발표한‘신당발기취지서’에는 자유당에서 이탈한 14명의 의원이 가담하였고, 원외세력도 조직적 차원에서 합류했다. 원외세력으로는 민국당의 원외조직, 조선민주당계 및 혁신계 인사, 흥사단 및 대한부인회 인사 등 광범위한 재야 지도층 인사들이 망아되어 있었다. 원외 주요인물로는 민국당의 김성수, 혁신계의 조봉암, 조선민주당계의 한근조, 원내자유당계의 장면,대한부인회의 박순천 등이 있었다. 1954년 12월 28일에는 신당발기촉진위원회를 18인으로 보강하고 신당에는 ‘반공 반독재’에 동의하는 인사라면 무조건 참여시키기로 했다. 신당의 지도이념은, “반공반독재, 건전한 대외정치와 책임정치제도의 확립, 사회정의에 입각한 수탈 없는 국민경제체제의 발전, 민주우방과의 협조제휴를 통한 평화적 국제질서의 수립” 등 4개항이었다. 한태수, 1961, 『한국정당사』, 신태양사, 151쪽. 윤제술·김준연·신도성 등이 강령기초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의견을 모아 신도성이 작성했다. 그러나 정치적 성격과 각자의 조직이 다른 인사들이 모였기 때문에 지도이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수탈 없는 국민경제체제 발전’이라는 항목이 사회주의 이론이라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이념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급기야 조봉암의 참여문제로 비화되었다. 당시 신당 결성에 관한 모든 일은 ‘신당발기촉진위원회(18인 위원회)’에 위임했는데, 이들은 발기준비위원을 지명하기 위해 6개 항의 조직 요강을 발표하면서, 좌익전향자와 독재행위나 부패행위가 현저한 자를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는 혁신계의 조봉암과 족청계의 이범석·장택상 등의 참여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조봉암은 신당에 적극 참여할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신당추진세력은 조봉암의 참여에 찬성하는 ‘민주대동파’와 반대하는 ‘자유민주파’로 분열되었다. 김성수·장택상·신도성 등의 ‘민주대동파’는 2대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지지표를 받은 조봉암을 참여시켜야 민주대동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조병옥·장면·김준연 등의 ‘자유민주파’는 정치이념이 달라 조봉암과의 제휴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 민국당은 신당이 이념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1955년 3월 4일 민국당 상임집행위원회 결의 참조. 1955년 3월 11일 호헌동지회 전체회의에서 조봉암의 참여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보수파인 자유민주파와 혁신파인 민주대동파로 크게 갈라졌다. 이로써 신당운동은 반자유당세력의 총결집을 이루지 못하고 민국당과 원내자유당 이탈세력만으로 추진되었다. 조봉암은 이를 두고 “민국당 내의 몇 사람이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들고 나서서 자기네와 같은 주의자, 동질자가 아니면 신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야당연합적인 신당은 끝이 났다.”고 보았다. 1955년 3월 25일 호헌동지회 총회에서 18인위원회 위원이 총사직하고, 이를 대치할 9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준비위원회 구성부터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1955년 6월 6일 호헌동지회 총회에서 조직요강 1항을 삭제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6월말 이내로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파간에 주도권 장악 문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어서 결국 신당운동은 분열된 채 마무리되었다. 민국당은 1955년 9월 18일 중앙집행위원회 개최하고 당의 해체와 신당의 참가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기존 조직을 신당조직으로 전환시켰다. 동위원회가 1955년 9월 19일 대의원 2,013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와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민주파의 신당발기위원회는 신당의 이름을 ‘민주당’이라 개칭함으로서 민주당의 창당을 보게 되었다. 당시 민주당 합류 의원들은 민국당계 13명, 무소속동지회계 10명, 무소속 5명, 자유당계 5명 등 모두 33명이었다. 국회사무처, 1971, 『국회사』, 223-224쪽. 신당운동의 모체였던 호헌동지회의원 60명 중 절반을 겨우 넘는 정도였다. 민주당 창당은 민국당의 기존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원내세력의 일부만을 흡수한 민국당의 조직확대를 통한 재정비과정이었다. 자유당과의 힘의 정치에서 밀린 민국당이 1956년 선거를 의식하고 유권자의 지지획득을 위해 급조한 선거용 정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오입개헌으로 대통령이 권한이 더욱 강화되고, 개헌 과정의 불법성으로 인해 야당 세력이 뭉쳐 호헌동지회를 거쳐 민주당 창당으로 이어졌으므로, 민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김진흠, 2020, 「제1공화국 시기 민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 정책과 ‘민주주의 정당’ 위상의 획득」,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19권 1호, 100쪽. 민주대동파는 신당운동 불참을 선언하고 이탈하여, 독자적인 신당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55년 9월 세칭 ‘광릉회의’를 계기로 조봉암의 진보당과 서상일계의 민혁당이 조직되었다. 서상일, 민국당의 원외인사들, 장택상·임흥순을 중심으로 한 무소속동지회 및 무소속출신 인사들이 당시 위원회의 주요인사들이었다. (2)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의미 ①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주요 개정내용 제2차 개헌은 30개 조항에 걸쳐 수정·삭제·중보가 행해졌다. 그 중 주요 개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백유, 2015,「제1공화국 헌법의 성립과 헌법발전」, 『서울법학』 22(3),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연구소, 233~235쪽. ⦁국민투표제의 신설(주권의 제한 및 영토의 변경시) [제7조의2],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중임까지만 가능)을 삭제(부칙)하여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3선제한을 철폐하고 무제한 입후보까지 가능하게 수정(제55조, 부칙 제3항)하였고,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하여,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전임자의 잔임기간 중 재임한다(제55조 제2항). ⦁국무총리제를 폐지(제68조·제73조)하여 순수한 대통령제로 환원하였고, ⦁“민의원에서 국무위원에 대하여 불신임결의를 하였을 때에는 당해 국무위원은 즉시 사직한다”고 하여, 국무위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개별책임제만을 두어 개별 국무원에 대한 개벌적 불신임을 인정(제70조의 2 제1항)하였고, ⦁군법회의(군사재판)에 대한 헌법상 근거부여(제83조의2 제1항), ⦁경제조항의 자유경제체제로의 전환(제6장), ⦁헌법개정안의 국민발안(제98조 제1항), ⦁제98조 제6항에서 제1조(주권), 제2조(국민)와 제7조의2(국민투표)의 규정은 개폐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헌법개정의 한계를 명문화함. 국민투표제 도입,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의 연대책임제를 폐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 지위 계승, 군법회의의 설치근거 마련, 자유경제체제 보장 등이 주요 내용이다. 제2차 개정헌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부칙에 있었다. 부칙 말미에 “이 헌법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조문을 삽입하여, 이승만대통령의 종신연임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부칙에는 참의원 의원의 선거구를 기존에는 3부제로 운영하였는데, 득표수에 따라 제1부, 제2부로 나누고, 제1부 위원의 임기는 6년, 제2부는 3년으로 하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참의원에게 주요 정부 요직 인사의 인준권을 부여하였는데, 참의원 선거는 1960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2년 1차 개헌안에 비하여 1954년의 개헌에서는 참의원이 인준해야할 정부 내 직책은 늘어났고, 이는 상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1960년까지 상원인 참의원이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국회의 비준 없이 고위직 인사들을 임명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정부는 참의원이 국회의 균형과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위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참의원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원하는 대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②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의 의미 제2차 개헌은 이승만 개인의 3선을 위한 개헌이었고, 일단 부결 선포된 헌법개정안이 이른바 ‘사사오입’이론에 의하여 가결 선포되는 헌정사의 오점을 남긴 개헌으로 평가된다. 제2차 개헌의 위헌성에 대해서는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결정족수를 무시한 헌법개정이라는 점을 일차적으로 들 수 있다.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장기집권하려는 사례는 장기집권과 독재를 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변개(變改)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다음으로는 개헌안 토론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이 그 위헌성을 지적한 바와 같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위헌 무효의 헌법개정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김백유, 2015, 「제1공화국 헌법의 성립과 헌법발전」, 『서울법학』 22(3),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연구소, 236쪽; 한태연, 1968, 「한국헌법의 발전과정: 개헌 20년의 회고와 전망」, 『법정』 제23권 제9호, 1968년 9월호, 411쪽. 국회에서의 심의는 1952년 제1차 헌법개정에 비해 민주적이었다고 평가되지만,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편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개정안 초안 작성 과정이 경무대와 자유당지도부 일부에 국한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작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 더 근본적 문제였다. 헌법개정이 부결되고 번복되는 과정은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겼으며, 절차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합법성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1954년 헌법은 헌법개정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비민주적 정당구조로 말미암아 국회의 기능은 마비되고 국민의 의사는 왜곡되었으며 제도 자체의 의미까지도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임기 보장으로만 알려져 있는 제2차 개헌은 내각책임제 요소를 갖고 있었던 제헌헌법의 조항들을 완전히 삭제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2차 개헌의 골자는 국무총리제도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행정부의 수반으로 하는 제도에 대해 부담감을 가졌다. 제2차 개정헌법은 헌정 60년사에서 국무총리가 폐지된 유일한 헌법이었다. 아울러 국회의 책임을 경감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국회가 갖고 있던 국무위원 승인권 및 국무원 불신임 권한을 폐지하고, 개별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만 가능하도록 남겨두었다. 이는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견제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민의원은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결의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낙인, 2008, 「헌정 60년과 정치제도의 변용 – 불안정 속의 안정-」, 『공법연구』제37집 2호, 한국공법학회, 20쪽. 이 개헌으로 제헌헌법과 제1차 개정 이후 헌법에 포함되어 있던 의원내각제적 요소는 상당히 제거되었으나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이 실제로 더 강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의원내각제적 특성이 강한 헌법 하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를 무시하고 독주하였고 제2차 개정헌법은 이와 같은 현실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한 헌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통령 승계권 문제는 1948년 제헌헌법과 1952년 헌법에서 “대통령 또는 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즉시 그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였던 것을 선거 없이 부통령에게 승계시키는 것으로 변경했다. 대통령 유고시 선거가 오히려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부통령직을 차지함으로써 이승만 유고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부통령이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경우, 대통령과 부통령의 정당이 다른 경우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954년 개헌안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같은 정당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국회 토론과정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19회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89호, 1954. 11. 26. 민국당 소선규 의원 발언. “... 대통령께서는 자유당이고 부통령이 민국당인 경우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민국당인 부통령이 거기에 가서 승격되었다고 하는 이 자체는 여기에 대해서 무슨 조절책이 있어야”.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제2차 개헌의 결과 형성된 1954년 헌법은 한국 헌법사에서 유일하게 국무총리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미국식 대통령제에 비교적 근접한 권력구조를 취하려고 하였고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지위 승계, 국민투표제도, 경제질서에 자유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 등을 특징으로 한다. 경제질서 조항을 개정한 이유를 제헌헌법의 한계성과 전쟁의 영향에서 찾기도 한다. 1948년 헌법은 정부형태와 경제질서 면에서 한계를 갖는데, 전쟁으로 인한 경제 파탄의 극복과 그 수단으로서 외자 유치를 위해 경제질서 조항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의회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사사오입개헌은 이승만대통령에게 종신 대통령의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한국정치를 군주제와 유사한 것으로 전락시켰고, 국회가 점차 자유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회가 심각할 정도로 자유당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국회는 점차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첫째,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을 자유당이 장악한 것, 둘째, 국회가 행정부의 ‘통법부(通法府)‘로 바뀌어 대통령과 행정부의 의사를 그대로 통과시켜 주는 국회로 전락한 것으로, 야당의 반발이 심한 경우에는 날치기 통과와 물리력까지 동원했다. 2.4파동 당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백영철, 1995, 제1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 의회정치를 중심으로, 나남, 203~205쪽. 셋째, 당정협의회제를 도입하여 대통령과 행정부 의사를 당과 의회에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당정협의회제를 도입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 02 2. 주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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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 해제: 1960년 3차 개헌 I. 헌법 개정의 전개 과정 1. 헌법 개정의 배경 1960년 6월 15일 제4대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재석 국회의원 211명 중 208명의 찬성으로 헌법 개정안을 가결하였다. ‘제3차 헌법 개정’, 즉 대한민국 헌정이 1948년 7월 제헌헌법을 제정한 이후 세 번째의 개헌을 단행한 순간이었다. 이로써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 이래의 기존 헌법은 효력을 상실하였고, 제3차 개헌으로 결실을 맺은 이른바 ‘제2공화국 헌법’이 그를 대체하여 새 헌정의 토대로 자리매김하였다. 「대한민국헌법」(1960.6.15., 일부개정). 제3차 헌법 개정의 직접적 계기는 단연 3.15 부정선거와 4월 혁명이었다. 이승만(李承晩) 정권과 자유당은 대한민국 헌법이 표방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형해화하며 집권 연장에 골몰하였고, 그에 대한 국민적 반발조차 유혈 진압으로 억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4월 혁명으로 절정에 치달은 저항의 열기는 정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하야를 선언하였으며, 이로써 대한민국 제1공화국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제1공화국의 종언은 곧 제2공화국의 출범을, 그에 따른 새로운 헌정의 수립은 제3차 헌법 개정을 각각 예고했다. 개헌으로 3.15 부정선거 이래의 정치적 위기를 수습해야 한다는 논의는 이미 4.19 직후부터 떠오른 바 있었으며, 「국정혁신을 위한 개헌구상을 제의함」, 『조선일보』 1960. 4. 22. 석간 1면. 이는 이승만 하야 시점에 이르러 국민대회의 결의사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비록 헌법 개정의 주체, 시기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신속히 개헌을 단행하여 제2공화국을 수립하는 데에는 보편의 합의가 존재했다. 헌법 개정으로 논의가 빠르게 수렴된 배경에는 개헌을 일상적으로 호명해온 1950년대 한국 정치의 경험이 자리했다. 통상적으로 개헌은 기존 헌정에 대한 깊은 숙고와 성찰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승만과 자유당은 주요 정치적 국면마다 개헌을 정략적 수단으로 악용하는 모습을 반복했다. 1952년 제1차 헌법 개정과 1954년 제2차 헌법 개정이 그 단적인 사례였으며, 1950년대 후반에도 자유당이 던진 내각책임제 개헌, ‘동일티켓제’ 개헌 관련 논의가 정가를 지배했다. 「표면화된 여당 개헌안」, 『경향신문』 1957. 7. 1. 2면; 「여, 1월 내에 제안」, 『조선일보』 1959. 12. 12. 조간 1면. 이처럼 개헌을 정략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행태가 만연했던 당대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4월 혁명 이후 자유·민주 양당이 각각의 정치적 이해타산에 입각하여 헌법 개정에 호응한 양상도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거시적인 맥락에서는 제1공화국 전반에 걸쳐 누적된 문제의식이 4월 혁명을 경유하여 헌법 개정으로 집약된 측면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4월 혁명으로 급격히 고조된 한국 사회의 여론은 정권 교체 그 이상의 변혁을 요구했다. 이승만 정권이 답습한 파행적 국정 운영, 경찰의 사병화(私兵化), 사법부의 독립 침해, 언론 자유의 탄압 등을 총체적으로 시정하기 위해서는 헌정 차원의 일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제2공화국 헌법은 제1공화국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연유한 비판적 논의를 헌정의 형태로 다듬어낸 결과물에 해당했다. 2. 헌법 개정의 구체화 1) 제4대 민의원 주도의 개헌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성립한 제2차 개정 헌법에 따르면, 헌법 개정의 제안 주체는 대통령, 재적 1/3 이상의 참의원·민의원 의원 혹은 50만 명 이상의 유권자여야 했다. 제3차 헌법 개정은 그 중 민의원을 경유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대통령직이 궐위로 남겨진 4월 혁명 직후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26일 하야를 선언하였으며, 유고시 계승권자인 장면(張勉) 부통령도 그에 앞서 사퇴한 터였다. 「장면씨 부통령직을 사퇴」, 『조선일보』 1960. 4. 23. 석간 1면. 물론 이승만이 사임한 이후로는 수석 국무위원 허정(許政)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그 공백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헌에 직접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이 임명한 수석 국무위원으로서 정치적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을 뿐더러, 법적으로도 과도기에 한하여 행정부를 책임지는 권한대행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헌법 개정의 책무는 국회, 그 중에서도 제4대 민의원의 몫이 되었다. 헌법상으로만 참의원이 존재하던 제1공화국의 실정을 고려하면, 민의원 홀로 개헌을 책임진 사실은 쉽게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당이 원내 과반을 점한 기존의 제4대 국회가 헌법 개정의 주체를 자처한 데에는 정치적 논란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혜영, 2010, 「4.19 직후 정국수습 논의와 내각책임제 개헌」, 『이화사학연구』 40, 269쪽. 실제로 장외의 일각에는 현 국회를 해산한 다음 총선을 실시하여 차기 국회에 개헌을 맡겨야 한다는 이른바 ‘先총선 後개헌’ 요구가 있었다. 민주당 신파의 주요한(朱耀翰)이 사회 각계 대표를 구성원으로 하는 ‘비상입법회의’의 수립을 주장한 맥락도 그에 맞닿아 있었다. 「정계스냎」, 『동아일보』 1960. 4. 28. 조간 1면. 2) ‘先개헌 後총선’의 강행 ‘先총선 後개헌’에 맞서 제4대 국회가 내세운 기조는 ‘先개헌 後총선’이었다. 1960년 4월 26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4월 혁명의 정치적 수습을 논의한 끝에 「시국수습에 관한 결의안」과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곧바로 ‘내각책임제개헌안기초위원회’ 구성을 결의한 데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공통적으로 내각책임제 개헌 단행 후 국회 해산에 방점을 찍은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로써 제4대 국회는 이승만의 사임조차 결정되지 않은 시점에 ‘先개헌 後총선’의 원칙을 천명하며 ‘先총선 後개헌’을 미연에 배제하였다. 자유·민주 양당은 각각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제4대 국회 주도의 개헌에 동조하였다. 자유당은 제4대 국회 주도의 개헌을 최후의 기회로 삼아 생존과 재건의 여지를 모색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혜영, 2010, 앞의 글, 268쪽. 집권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고 지도부가 무너지는 등 당의 존폐가 불투명한 최대의 위기국면에서, 국회에서 점한 과반의 의석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민주당에서는 구파와 신파의 입장이 미묘하게 엇갈렸다. 신파는 내심 내각책임제 개헌보다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를 선호했다. 조병옥(趙炳玉), 이승만, 이기붕(李起鵬)이 연이어 퇴장한 이상, 정계에 남아있는 유일한 거물은 자파의 영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내세워 대선을 다시 치른다면, 신파로서는 3.15 부정선거의 완벽한 시정을 명분으로 취하며 손쉽게 정권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민주당 창당 이후 일관되게 당시로 내걸어온 내각책임제 개헌을 스스로 번복해야 하는 측면에서 정치적 부담감을 수반했다. 구파가 신파의 단독 집권을 용납할 리도 만무했다. 이미 구파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관철한 후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는 전망을 상정한 터였다. 결국 신파 역시 민주당 구파와 자유당이 동조한 ‘先개헌 後총선’의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개헌 후 선거 찬동」, 『조선일보』 1960. 4. 29. 조간 1면. 1960년 5월 2일 국회는 5월 10일까지 헌법 개정안 제안을 마치고 정부통령 재선거는 개헌 완결 이후로 연기하기로 결의하는 것으로 향후의 정치 일정을 공식화하였다. 3. 헌법 개정안의 기초 제4대 국회는 1960년 4월 26일 본회의에서 구성을 결의한 ‘내각책임제개헌기초위원회(이하 ‘기초위원회’)’에 헌법 개정안 작성을 위임하였다. 그 인선은 각 교섭단체에 맡겼는데, 최종적으로는 민주·자유 양당이 동수로 위원을 균분하여 전자의 조재천(曺在千), 정헌주(鄭憲柱), 윤형남(尹亨南), 엄상섭(嚴詳燮), 후자의 이재학(李在鶴), 정운갑(鄭雲甲), 박세경(朴世俓), 이형모(李炯模) 및 무소속 황호현(黃虎鉉) 등을 기초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양당대표 내정」, 『조선일보』 1960. 4. 28. 조간 1면; 「교섭단체 소속 헌법기초위원 선정보고의 건」,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4대 국회 제35회 제11호, 1960. 4. 29. 민주당 측의 위원을 대별하면, 엄상섭, 조재천은 신파에, 정헌주, 윤형남은 구파에 각각 속하였다. 신·구파 공히 전원 재선의 중진급 간부를 기초위원회에 배치하였으며, 그 중 정헌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식민지기에 고등문관 시험을 통과한 법조계 출신의 인사였다. 1960년 5월 3일 엄상섭이 사망한 이후에는 한근조(韓根祖)가 그 공석을 채웠다. 자유당 측의 위원은 전원 ‘혁신파’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재학은 자유당에 남은 최후의 거두였으며, 박세경은 동당의 개헌안 기초 작업을 담당해온 핵심 간부였다. 「내각책임제 개헌 추진」, 『조선일보』 1960. 4. 24. 조간 1면. 기초위원회는 4월 29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여 ‘민주당안’과 ‘자유당안’을 토대로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는데 잠정 합의하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양안의 골자는 아래의 〈표 1〉과 같았다. 「민·자(혁신파) 양당의 개헌안 요강 대조표」, 『경향신문』 1960. 5. 1. 석간 1면. 〈표 1〉 1960년 5월 민주당·자유당이 내각책임제개헌안기초위원회에 제출한 헌법 개정안 개요 쟁점 민주당안 자유당안 국회 ·민의원 우위의 양원제 채택 ·국민 직선으로 양원 선출 ·양원합동회의 존속 ·참의원의 고위공무원 임명 인준권 폐지 ·민의원에 내각불신임권 부여 민의원 우위의 양원제 채택 ·국민 직선으로 민의원 선출 ·지방의회 간선 선출 의원 및 당연직 의원으로 참의원 구성 ·양원합동회의 폐지 ·참의원의 고위공무원 임명 인준권 폐지 ·민의원에 내각불신임권 부여 대통령 ·형식적, 의례적 권한만 부여 ·긴급명령권 불인정 ·조건부 긴급재정처분권 인정 ·법률거부권 불인정 ·최고국방회의 의장 겸임 ·국민 직선으로 선출 ·임기 6년에 1차 중임 허용 ·긴급명령권 인정 ·긴급재정처분권 인정 ·국군 통수권 부여 ·국회 및 각도 의회 간선으로 선출 ·임기 6년에 1차 중임 허용 국무총리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원에 행정권 부여 ·국회에서 선출 ·국무위원과 더불어 국회에 연대책임 ·국회해산권 인정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원에 행정권 부여 ·대통령 지명-국회 동의로 선출 ·국무위원과 더불어 국회에 연대책임 ·국회해산권 인정 국민 기본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대한 사전 검열 혹은 사전 허가 금지 ·현행 헌법 유지 기타 경찰행정의 중립화, 인사행정의 중립화 명시 - 양당은 공히 내각책임제와 민의원 우위의 양원제를 권력 구조로 채택하였다. 후술하듯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제2공화국 헌정의 기본 틀로 상정하여 국무원·민의원에 행정·입법의 실권을 부여하는 데에는 나름의 보편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던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무총리의 국회해산권, 민의원의 내각불신임권을 각각 인정하여 양자의 정치적 균형을 모색한 측면에서도 작동 원리상의 공통점이 드러났다. 그 연장선에서 참의원·대통령은 민의원·국무원 본위의 헌정을 보완하는 후순위의 헌법기관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세부 각론에는 이견이 있었다. 특히 참의원에 관해서는 양당이 서로 다른 선출 방식을 내세우며 쟁점을 형성했다. 민주당이 참의원 전원의 국민 직선을 주장한 반면, 자유당은 당연직 자동 임명과 지방의회 간선의 혼성을 제시하였다. 후자에 따르면, 전직 정부통령, 대법원장, 양원 의장 등은 별도의 선거 없이 자동으로, 전직 국무위원, 검찰총장, 대법관, 심계원장, 대사, 공사, 각군 참모총장, 국회의원 및 기타 직업단체 및 업종단체 대표자 등은 지방의회의 간선을 거쳐 참의원에 임명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권한도 양당의 견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지점이었다. 긴급명령권, 법률거부권 등을 소거한 단락에서 드러나듯이, 민주당의 안은 대통령을 상징적인 국가수반으로 국한하여 국무원 전권의 행정을 보장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안은 대통령에 국군 통수권, 긴급명령권, 긴급재정처분권을 부여하여 행정권의 일부를 분점하게 하였다. 정반대의 관점에서 행정부 내 국무원과 대통령의 관계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 외에는 민주당안에서 경찰 행정과 인사 행정의 중립화를 규정한 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권리를 더욱 철저히 보장하고자 한 점 등이 두드러진다. 주지하듯이 이승만 정권은 경찰의 정치 개입에 기대어 주요 선거를 치러왔으며, 더 나아가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하는 등 야당 계열의 언론을 탄압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이에 민주당은 제3차 헌법 개정을 장으로 삼아 그에 대한 제도적 대안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월 4일의 첫 공식 회의에서는 기초위원 전원과 전문위원 이태준(李泰俊), 박일경(朴一慶), 한태연(韓泰淵)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토의를 진행하였다. 『헌법개정안기초위원회속기록』, 제4대 국회 제35회 제1호, 1960. 5. 4. 당시 이태준은 민의원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 박일경은 법제실 제1국장이었으며, 4월 혁명 이전 박일경의 주요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20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42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 졸업, 1947년 대구대학교 법학과 교수, 1949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1951년 법제처 제1국장. 한태연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였다. 이들은 법학 이론과 해외 사례를 제시하며 논점을 정리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한태연이 자유당의 견해에 힘을 실어 대통령에 군 통수권을 부여하는 결정을 이끌어낸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지론을 헌법 개정에 반영하여 헌법재판소 신설을 관철하기도 하였다. 그 외의 쟁점에 있어서는 경찰 중립에 관한 조항은 민주당의 주장이 채택되었으며, 참의원의 구성 방식은 양당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여 다음 날로 예정된 공청회 이후로 결론을 미뤘다. 1960년 5월 5일에 열린 ‘내각책임제개헌공청회’에서는 학계 및 법조계 인사 13인의 견해를 청취하였다. 『내각책임제개헌공청회속기록』, 제4대 국회 제35회 제1호, 1960. 5. 5. 공청회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한 연사는 중앙대학교 교수 이종극(李鍾極), 동국대학교 교수 이형호(李炯鎬), 대한변호사협회 대표 이천상(李天祥), 서울대학교 교수 민병태(閔丙台), 제헌동지회 대표 김수선(金壽善), 경희대학교 교수 엄민영(嚴敏永), 숭실대학교 교수 백도광(白道光),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윤순덕(尹順德), 성균관대학교 교수 강문용(姜文用), 한양대학교 교수 갈봉근(葛奉根), 단국대학교 교수 이규복(李圭復), 공법학회 대표 김남진(金南鎭), 국민대학교 교수 원동진(元東鎭) 등이었다. 내각책임제 개헌공청회 공청사항 (1) 양원제의 가부(양원제를 채택할 때에는 상원의 구성 방법, 권한 및 양원 합동회의의 존폐 문제 포함) (2) 대통령 선거 방법과 궐위 시의 대행 순위 문제 (3) 권한 배정 특히 군통수권 문제(최고국방회의의 설치 여부 문제 포함) (4)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선임 방법 (5) 국무원 신임 문제(연대 책임 이외에 개별 책임까지 인정하느냐의 문제 포함)와 하원 해산문제 (6)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취임 요건에 관한 문제(예컨대 ①국회의원이라야 하느냐 ② 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 일정한 연한을 필요로 할 것이냐의 여부 등등) (7) 선거 내각의 가부 (8) 긴급명령, 긴급재정처분, 법률안 거부권의 존폐 문제 (9) 대법원장 및 법관의 선임방법과 그 임기 문제 (10) 법령의 위헌심사문제(특히 헌법재판소 문제) (11) 정당제도에 관한 제문제 (12) 기타 연사들은 기초위원회가 사전에 준비한 12개의 ‘공청사항’에 대하여 논지를 개진하였다. 최대의 쟁점은 대통령 선출 방식과 군 통수권의 귀속 주체였다. 내각책임제 채택에 부응하여 대통령의 역할을 최소화할 것을 주장한 연사들은 국회의 간접 선출을 지지하며 군통수권을 국무원의 소관으로 명시한 반면, 대통령에 갈등 조정 및 국무원 견제의 역할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 연사들은 국민의 직접 선출을 지지하며 대통령의 군통수권 행사를 인정하였다. 양원제 채택, 국무원 연대 책임, 헌법재판소 혹은 헌법법원의 신설, 정당 규정의 신설, 대통령 법률거부권의 삭제 등에 관해서는 다수의 견해가 합치되었다. 각 안건마다 소수 의견이 없지는 않았으나 학계, 법조계의 중론을 확인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흐름이었다. 그 외의 의제로는 법조인 회의에 의한 법관선거, 경찰·교육의 중립화 명시, 반민주행위자 및 부정축재자의 사법적 청산 등이 거론되었다. 〈표 3〉 공청사항 제1~6항에 대한 발언 요지 (1) 양원제 (2) 대통령 선출 (3) 군통수권 (4) 국무총리 선출 (5) 국무원 신임 (6) 국무원 취임 요건 이종극 찬성 국회 간선 국무원 민의원 지명→대통령 승인 연대 책임 ·1/2 이상은 국회의원·군경 경력자 배제 이형호 찬성 국회 간선 국무원 대통령 지명→국회 인준 연대 책임 ·2/3 이상은 국회의원 이천상 찬성 국민 직선 대통령 대통령 지명→국회 인준 연대 책임 ·퇴역 후 1년 이상 경과 군인에 한해 허용 민병태 반대 국무원 대통령 지명 연대 책임 ·제한 불필요 김수선 찬성 국회 간선 대통령 대통령 지명→국회 인준 연대 책임 ·제한 불필요 엄민영 찬성 - - - - - 백도광 찬성 국민 직선 대통령 - - - 윤순덕 - 국민 직선 대통령 - 연대 책임 - 강문용 찬성 - - - - - 갈봉근 - - - 대통령 지명→국회 인준 - - 이규복 반대 국민 직선 - - 연대 책임 ·제한 불필요 김남진 찬성 국회 간선 국무원 국회 선출 연대 책임 ·국회의원 원동진 찬성 국민 직선 대통령 - 개별 책임+연대 책임 - 〈표 4〉 공청사항 제7~12항에 대한 발언 요지 (7) 선거내각 (8) 대통령 권한 (9) 대법관 선임 (10) 위헌심사 (11) 정당제도 이종극 필요 없음 ·긴급명령권 삭제·긴급재정처분권 삭제·법률거부권 삭제 특별조치 필요 헌법재판소에 권한 부여 정당 규정 신설 이형호 필요 없음 ·긴급명령권 인정·긴급재정처분권 인정·법률거부권 삭제 대법원장 제청→국회 인준 헌법법원에 권한 부여 정당 규정 신설 이천상 필요 ·긴급명령권 삭제·긴급재정처분권 인정·법률거부권 삭제 선거인단 간접 선출 대법원에 권한 부여 - 민병태 필요 없음 ·긴급명령권 삭제·긴급재정처분권 삭제·법률거부권 삭제 대법원장 임명 헌법재판소에 권한 부여 정당 규정 신설 김수선 필요 없음 - - - 정당 규정 신설 엄민영 - - 법조인 회의 선출 헌법법원에 권한 부여 - 백도광 - - 법조인 회의 추천→대통령 임명 법원에 권한 부여 - 윤순덕 - ·법률거부권 일부 인정 사법부 지명→국회 인준 헌법법원에 권한 부여 정당 규정 신설 강문용 - - - - - 갈봉근 - - - 헌법법원에 권한 부여 - 이규복 - ·긴급명령권 삭제·긴급재정처분권 삭제·법률거부권 삭제 법조인 회의 선출 헌법재판소에 권한 부여 김남진 필요 없음 ·긴급명령권 삭제·긴급재정처분권 삭제·법률거부권 일부 인정 법조인 회의 선출 헌법법원에 권한 부여 정당 규정 신설 원동진 - ·긴급명령권 삭제·법률거부권 삭제·긴급재정처분권 삭제 - - 정당 규정 신설 기타국민 기본권 유보 조항 삭제, 부정축재 재산 몰수 명시, 경찰의 중립화 명시, 교육의 중립화 명시, 반민주행위자 처벌 부칙 삽입, 학원의 자유 조항, 경제조항 삭제 불필요 등 4. 헌법 개정의 발의와 의결 자체 회의와 공청회로 안팎의 여론을 수렴한 기초위원회는 1960년 5월 11일 국회 본회의에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대표 발의자는 위원장 정헌주였으며, 발의에 찬성한 의원은 총 174인이었다. 헌법 개정안 발의를 확인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 제98조에 근거하여 곧바로 이를 공고하였고, 「헌법 개정의 제의 공고에 관한 건」, 『관보』 제2576호, 1960. 5. 11. 1~4면. 헌법이 규정한 최소 30일 이상의 공고 기간에 들어 갔다. 공고 기간 동안 국회는 「국회법」을 수정하여 개헌안 표결 방식을 기명으로 변경하였다. 본래 「국회법」 제5조 제3항은 헌법 개정안의 무기명 표결을 규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기명 표결은 자유당의 개헌안 처리 협조를 장담하지 못하는 측면에서 불안감을 수반했다. 이에 장외의 여론에 기대어 자유당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일환으로 기명 투표가 부상하였고, 이를 수용한 제4대 국회는 1960년 6월 1일에 본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안의 표결 방식을 기명 투표로 수정한 「국회법」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법 중 개정법률안 제1.2독회」,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4대 국회 제35회 제26호, 1960. 6. 1. 1960년 6월 11일로 공고 기간이 끝난 이후에는 6월 11일, 13일, 14일 세 차례에 걸쳐 토의가 이어졌다. 먼저 6월 11일의 본회의에서는 민주당 신파의 주요한, 이종남(李種南) 의원이 질의에 나섰다. 주요한은 제3차 개헌이 현행 헌법의 개정으로 귀결될 경우 1952년의 ‘발췌 개헌’,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을 기정사실로 정당화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새 헌법의 제정 혹은 제헌헌법의 개정을 촉구하였다. 이는 1950년대의 파행적 헌법 개정을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으로, 4월 혁명의 헌정사적 의의와 그 파급력을 최대한의 수위로 끌어올린 주장이었다. 서희경, 2020, 『한국헌정사 1948-1987』, 포럼, 403~407쪽. 또한 이종남은 제3차 헌법 개정 관련 논의에서 경제 조항을 도외시한 흐름을 지적하며 제헌헌법 이래의 “공공복리” 지향과 사사오입 개헌에서 강화된 “자유방임적 경제 원칙”을 개헌안에 그대로 병존시킨 배경을 질의하였다. 6월 13일의 본회의에서도 반대 토론이 이어졌다. 자유당의 변진갑(邊鎭甲)은 제3차 헌법 개정이 양원제를 채택한 이상 참의원에도 나름의 실권을 부여하여 그 취지를 구현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인 이철승(李哲承), 조일재(趙一載) 등은 헌법 개정안이 대통령에 국군 통수권, 계엄 선포권을 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출을 국회에 위임한 점을 지적하며 국민 직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철승, 조일재 등은 권력 구조를 향한 비판과 더불어 헌법 개정안이 반민주행위자 및 부정축재자 처벌의 법적 근거를 결여한 점도 함께 지적하였다. 이는 법률 불소급의 원칙이 혁명의 대의에 앞설 수 없다는 논리에 근거한 주장으로, 제3차 헌법 개정 과정에서 간과되었던 논쟁적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었다. 서희경, 2020, 앞의 책, 416~417쪽. 그러나 제4대 국회는 이들의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는 1960년 10월 서울지방법원이 반민주행위 혐의자에 면소(免訴)를 선고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제2공화국은 1960년 11월 재차 헌법 개정을 단행한 후에야 비로소 ‘혁명입법’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6월 14일의 본회의에서는 헌법 개정안을 지지하는 발언들이 대세를 점하였다. 자유당의 박세경, 민주당의 서범석(徐範錫), 한근조, 권중돈(權仲敦) 등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제3차 헌법 개정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단, 자유당 이옥동(李玉童) 의원은 내각책임제를 곧 민주주의로 전제하며 대통령 중심제를 반민주적 제도로 비판하는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제1공화국의 정치적 폐단을 대통령 중심제의 제도적 한계로 규정해온 민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론과 대비를 이루는 논지였다. 김진흠, 2020, 「제1공화국 시기 민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 정책과 ‘민주주의 정당’ 위상의 획득」,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9-1, 101쪽. 마침내 1960년 6월 15일 제4대 국회는 제3차 헌법 개정을 매듭지었다. 재석 국회의원 211명 중 자유당의 이옥동, 김창동(金彰東), 김공평(金公平) 등 3인을 제외한 208명이 기초위원회에서 작성한 개정안에 찬성하였다. 개헌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은 자유당의 조순(趙淳), 박용익(朴容益), 정문흠(鄭文欽) 등이었는데, 이들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자유당 기획위원으로서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이미 구속된 상태였다. 「자유당 선대위 기획위원 6명 구속」, 『동아일보』 1960. 5. 27. 석간 3면. 국회의 개헌안 의결을 확인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은 당일로 헌법 개정을 공고하여 제3차 개헌을 완결하였다. 이로써 제4대 국회는 1960년 4월 26일 헌법 개정을 공언한 이후 약 50여일 만에 모든 절차를 완수하였다. Ⅱ. 제3차 헌법 개정의 주요 특징 1. 정치 부문 제3차 헌법 개정안을 ‘내각책임제 개헌안’으로 일컬은 데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듯이, 제2공화국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여 국무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국무원에 행정권을 부여(제68조)하였다. 대통령 중심제를 따르지 않은 헌정사상 유일의 사례였다. 이로써 국무총리가 정부수반으로서 국정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지명으로 임명되는 국무위원이 국무원을 구성하며 각 부처의 장관을 겸임(제69조, 제73조)하였다. 또한 제3차 개정 헌법은 민의원에 국무원 불신임권(‘연대책임’)을 부여하되 개별 국무위원 불신임권(‘개별책임’)은 인정하지 않으며 국무원의 정치적 일체성을 보장하였다. 김도협, 2008, 「제2공화국 국무원에 관한 연구-독일연방정부와의 비교법적 고찰을 중심으로」, 『헌법학연구』 14-2, 471쪽. 민의원에 의한 국무총리 선출을 규정한 조항, 그리고 국무총리와 과반의 국무위원을 국회의원으로 전제한 조항(제69조) 등은 내각책임제의 기본 원리에 입각하여 입법부-행정부의 결합력을 높인 조처였다. 아울러 현역 군인에 한해서는 문민통제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무위원 임명을 제한(제69조)하였는데, 후일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무원을 ‘내각’으로 대체하여 해당 규정을 회피하였다. 긴 호흡으로 제헌헌법 이래의 내각책임제 담론을 조망하면, 제3차 헌법 개정은 그 마지막 종착점에 해당했다. 언제나 제도권 일각에 ‘대안’으로 자리하였던 내각책임제 논의가 마침내 제도화의 단계에 이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후반 자유·민주 양당의 내각책임제 논의에 관해서는 김진흠, 2018, 「1956~1957년 자유당 내각책임제 개헌 시도의 정치적 의미」, 『통일인문학』 76 참조. 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을 당시(黨是)로 내걸어온 민주당으로서는 당의 제1정책을 관철한 측면에서 제3차 헌법 개정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행정부의 또 다른 한 축인 대통령을 살펴보면, “순수한 내각책임제”에 걸맞지 않는 실권을 부여한 점이 두드러진다. 위의 조항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긴급명령권(제57조), 국군 통수권(제61조), 계엄 선포 거부권(제64조), 국무총리 후보 지명권(제69조) 등을 행사하는 헌법기관으로서 상징적 국가원수 그 이상의 존재감을 점하였다. 이는 국민 직선 대신 국회 간선을 채택(제53조)하여 대통령의 위상을 낮춘 흐름에 역행한 것으로서 전술한 국무원 본위의 행정과 상호 충돌하였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나름의 실권직으로 끌어올린 주역은 자유당과 학계였다. 앞서 기초위의 논의 과정에서 확인하였듯이, 이들은 내각책임제 특유의 입법-행정 권력 일치가 다수당의 절대 독재로 귀결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중립적’ 대통령에 견제, 조율의 역할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 헌정이 전제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은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구현에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국무총리와의 갈등을 재생산하는 양상만이 두드러졌다. 오제연, 2015, 「제2공화국 시기 윤보선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과 정치 관여 논란」, 『한국인물사연구』 23, 374~375쪽. 제2공화국 헌법의 내각책임제가 오랜 연원의 논의를 제도로 구현한 것이었다면, 양원제는 헌정과 현실 정치 사이의 괴리를 해소한 것이었다. 1952년 제1차 헌법 개정은 참의원의 존재를 명시한 바 있었으며, 이는 1954년 제2차 헌법 개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참의원은 제1공화국 전 기간에 걸쳐 구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참의원 선거에 자신이 없었을 뿐더러, 「참의원선거않키로」, 『경향신문』 1958. 9. 9. 조간 1면. 민주당 소속의 장면 부통령이 참의원 의장을 겸직하며 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을 경계하였다. 이에 제2공화국 헌법은 별도의 부칙을 두어 민의원·참의원 총선을 헌법 시행일 기준 각각 45일, 6개월 이내에 실시하도록 규정하였다. 결과적으로는 1960년 6월 24일 민주당 구파와 자유당이 합세하여 「국회의원선거동시실시에관한건의안」을 관철함에 따라 1960년 7월 29일의 제5대 총선은 민의원·참의원 동시선거로 치러졌다. 「민·참동시선거키로」, 『동아일보』 1960. 6. 19. 조간 1면. 제2공화국의 민의원·참의원은 전자 우위의 비대칭적 양원제에 해당했다. 민의원은 양원의 의결이 서로 엇갈릴 경우 재의권을 행사(제37조)하였으며, 국무원 불신임(제71조), 국무총리 선출(제69조) 등에 관해서도 전적인 권한을 지녔다. 이는 앞서 자유·민주 양당이 각각의 개헌안에서 공히 제시한 민의원 우위의 양원제를 그대로 관철한 것으로, 제2공화국 참의원의 활동 반경을 크게 제한하였다. 참의원 구성으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 존재 의의를 둘러싼 논란이 부상하게 되는 정치적 배경이었다. 「참의원폐지론은 시기상조다」, 『조선일보』 1961. 1. 12. 석간 1면; 김동명, 「참의원무용론의 시비(1)」, 『동아일보』 1961. 1. 28. 조간 2면 등. 마지막으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를 살펴보면, 제2공화국 헌법은 민의원과 국무원에 각각 국무원 불신임권, 민의원 해산권을 부여함으로써(제71조) 나름의 균형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전자가 별다른 조건 없이 재적 과반수의 결의로 의결 가능한 적극적인 권한이었던 반면, 후자는 민의원이 국무원 불신임결의안을 가결한 경우에 한하여 작동 가능한 소극적인 권한이었다. 그 결과 제2공화국 헌정이 구현한 의회·정부의 균형은 입법부, 그 중에서도 특히 민의원에 무게중심이 다소 치우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2. 경제 부문 제3차 헌법 개정의 전개 과정을 조망하면, 경제 부문의 논의가 타 부문의 그것에 비해 매우 희미하게 나타났다. 「5일부터 개헌안공청회」, 『조선일보』 1960. 5. 1. 석간 1면; 「국회의 협상 개헌을 배격하며 총사퇴를 거듭 요구함」, 『조선일보』 1960. 5. 2. 석간 1면. 민주당 구파와 자유당은 물론, 김영선(金永善)과 주요한을 중심으로 ‘자유경제’ 지향의 정책 구상을 다듬어온 민주당 신파조차도 경제 조항의 수정을 제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헌법 개정의 주체를 자임한 제4대 국회가 경제 조항의 수정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였기에 공청회 역시 해당 부문에 관해서는 별다른 쟁점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조항을 둘러싼 쟁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헌법 개정 이전으로 경제 조항을 환원하여 제헌헌법의 경제적 지향을 복구하고자 한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효민, 「4.26혁명과 경제정화(下)」, 『경향신문』 1960. 5. 15. 조간 2면. 예컨대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 이종남은 제3차 헌법 개정안이 제헌헌법이 지향한 “공공복리의 우선주의”(제15조)와 사사오입 개헌이 삽입한 “자유방임적인 경제원칙”(제88조)의 모순적 공존을 그대로 방치하였다고 주장하며 후자의 시정을 요구한 바 있었다. 주요 기업체의 국유화, 노동자의 이익 균점 등을 명시한 또 다른 개헌안의 존재까지 고려하면, 「개헌안의 미비점은 새로운 국회에서 시정함이 어떠할가」, 『경향신문』 1960. 5. 12. 석간 1면. 이종남이 대변한 균등경제에의 지향은 원내 일각에서 널리 환기되고 있었던 것 같다. 원외에서는 4월 혁명 이후 제도권에 재진입한 혁신계가 그러한 흐름에 가세했다. 혁신계의 경제적 지향은 제헌헌법이 담지하였던 균등의 가치에 맞닿아 있던 터였다. 비록 제3차 헌법 개정 당시에는 장외에 있었기에 국회 내의 논의에 합류하지 못하였으나, 국가의 경제적 개입을 적극 주창한 혁신계의 논조는 제2공화국의 첫 선거인 1960년 7월의 제5대 총선 국면에 이르러 민주당의 자유방임적 경제 구상과 분명한 대립각을 형성하였다. 조석곤, 2010, 「4월혁명 직후 진행된 각 정파의 경제발전 지향을 둘러싼 제논의」, 정근식·이호룡 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331~336쪽. 3. 행정 부문 행정 부문에 있어 제3차 헌법 개정이 견지한 문제의식은 ‘중립(中立)’으로 집약 가능하다. 그 바탕에는 4월 혁명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에 널리 환기된 ‘중립화’ 담론이 자리했다. 해당 담론은 1950년대 제도권의 지식인들이 다듬은 일련의 논의로, 195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을 ‘사(私)에 의한 공(公)의 전유’로 해석하며 후자의 중립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승만·자유당이 국가 전반의 공적 제도, 기구를 정치적으로 전유한 지점을 포착하여 재구성한 보편적 대안으로서 경찰, 방송, 교육, 금융 등 사회 각 부문으로 영역을 점차 확장하였다. 중립화 담론은 공무원(제27조 제2항)·경찰(제75조 제2항)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하는 형태로 제3차 헌법 개정에 관철되었다. 이전의 헌정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중립의 원칙이 제3차 헌법 개정에 이르러 행정 권력의 작동 원리로 부상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75조 제2항은 3.15 부정선거와 4월 혁명을 계기로 절정에 이른 경찰 개혁론을 반영한 조항이었는데, 궁극적으로는 그 방향을 경찰의 중립화로 규정하여 제2공화국 헌정이 지향해야 할 과업으로 격상하였다. 신창훈, 2018, 「제2공화국 전후 경찰중립화 구상 연구」, 『사림』 64, 203~204쪽. 단, 중립화 담론이 전제한 이상적 행정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정부에 의한 지휘와 정권에 의한 예속을 엄격히 구분하여 전자를 인정하고 후자를 배격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정치권력에 행정권을 위임하는 것이 곧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본질인 이상, 양자의 경계선은 결코 명확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자체로 논쟁을 수반했다. 중앙선거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격상한 조항(제75조의 2)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다. 주지하듯이 3.15 부정선거를 비롯한 제1공화국 시기의 주요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개입으로 얼룩졌다. 법제상으로는 중앙선거위원회가 선거를 관리, 감독하여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여야 했다. 하지만 제1공화국의 중앙선거위원회는 전 기간에 걸쳐 그 역할이 유명무실하였다. 「대통령·부통령선거법」, 「민의원의원선거법」 등 타 법률에 간접적으로 근거를 두었던 데다가, 「대통령·부통령선거법」(1952.7.18., 제정); 「민의원의원선거법」(1958.1.25., 제정). 내무부 산하의 하부 기관으로서 자율성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제2공화국 헌법은 행정부의 간섭을 차단하여 중앙선거위원회의 독립을 엄격히 보장하는 취지에서 그를 별도의 헌법기관으로 분리하였으며, 제4대 국회는 제3차 헌법 개정을 매듭지은 직후 「선거위원회법」을 제정하여 후속 입법까지 완결하였다. 「선거위원회법」(1960.6.17., 제정). 이로써 제2공화국 중앙선거위원회는 일체의 법적 토대를 완비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당, 자유당, 대법원이 추천한 중앙선거위원 9명을 허정 과도내각이 위촉함으로써 공식 출범하였다. 중앙선거위원회는 1960년 7월의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12월의 지방선거를 원만히 관리하며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구 자체는 5.16 쿠데타 이후 제2공화국 헌법과 운명을 같이 하여 사실상 해체되었다. 최선웅, 2018, 앞의 글, 95~97쪽. 그러나 선거 관리를 전담할 독립적 헌법기관의 문제의식은 그대로 유효하였기에 중앙선거위원회는 1963년 제5차 헌법 개정에 이르러 지금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부활하였다. 마지막으로 지방행정 관련 조항을 살펴보면, 1958년 12월 24일 자유당은 이른바 ‘2.4파동’을 일으켜 「국가보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한 주요 쟁점 법안을 강행 처리하였다. 「야당축출코 보안법안통과」, 『동아일보』 1958. 12. 24. 석간 1면. 이는 대통령에 의한 도지사, 서울특별시장, 시장 임명 및 도지사에 의한 읍장, 면장 임명을 관철한 조치로, 지방자치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제3차 헌법 개정은 시·읍·면장 선출 방식을 주민 직선으로 복구(제97조)하였으며, 「지자법의 개정을 백지로 환원하는 것이 신보안법의 수정 이상으로 중요하다」, 『경향신문』 1959. 2. 2. 석간 1면. 그 후속 조치로 개정된 「지방자치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까지 포함시켜 4년의 임기를 보장하였다. 이로써 군수와 서울특별시 구청장을 제외한 모든 지방자치단체장이 주민 직선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마침내 1960년 12월 제2공화국은 전국 단위의 지방선거를 실시하여 각 지방자치단체장의 주민 직선을 매듭지었다. 4. 사법 부문 제3차 헌법 개정이 사법 부문에 파급한 변화는 헌법재판소 신설과 법관선거제 채택이다. 제헌헌법 이래의 대한민국 헌정은 단 한 차례의 예외 없이 탄핵재판소와 헌법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방치로 말미암아 양 기관은 제1공화국 전 시기에 걸쳐 출범에 이르지 못하였다. 특히 1956년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는 탄핵재판소와 헌법위원회의 구성을 방해하는 정략적 저의가 더욱 짙어졌다. 부통령이 탄핵재판소 재판장과 헌법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헌법상기관에 대한 명예훼손」, 『조선일보』 1958. 12. 24. 석간 1면. 이에 제2공화국 헌법은 탄핵재판소와 헌법위원회를 통합한 상설기관으로 헌법재판소를 설치할 것을 규정하였다. 관련 논의를 이끈 주역은 학계의 인사들이었다. 기초위원회 전문위원 한태연이 서독 연방재판소를 예시로 거론하며 헌법재판소의 상설화를 적극 주장하였으며, 공청회에 참석한 연사들도 비슷한 논조로 그를 뒷받침하였다. 헌법재판소의 관장 업무는 법률의 위헌 여부 심사, 헌법에 관한 최종 해석, 국가기관 간의 권한 쟁의, 정당 해산 심판, 탄핵 재판, 대통령, 대법원장 및 대법관 관련 선거 소송 등(제83조의3)이었다. 해당 업무를 수행할 헌법재판소 심판관은 총 9인으로 결정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대통령, 대법원, 참의원이 각각 3인의 심판관을 선임하는 방식(제83조의 4)을 취하였다. 그 외의 세칙은 1961년 1월 13일 민주당 김채용(金采庸) 의원이 대표 발의하여 1961년 4월 10일 최종 의결된 「헌법재판소법」에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제2공화국의 헌법재판소 역시 첫 발을 떼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1962년 12월의 제5차 헌법 개정은 헌법재판소 관련 조항을 다시 삭제한 후 위헌 심사 및 탄핵 심판에 관한 권한을 각각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로 이관하였다. 「대한민국헌법」(1962.12.26. 전부개정), 제62조, 제102조. 이후 헌법재판기관은 1972년 제7차 헌법 개정에서 ‘헌법위원회’로 다시 부활하여 1987년까지 존속하였으나, 법원의 위헌 제청 기피 및 소요 부재로 사실상 활동을 정지하였다. 「헌법위 ‘개점휴업’ 6년」, 『동아일보』 1987. 3. 28. 5면. 이는 1987년 제9차 개헌에 이르러 비로소 변화를 맞이하여, 기존의 헌법위원회를 격상한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위헌 심사, 탄핵 심판, 권한 쟁의, 헌법 소원 등을 전담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법관선거제 채택을 살펴보면, 제2공화국 헌법은 대법원장·대법관을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써 조직되는 선거인단”의 간접 선거로 선출할 것을 명시(제78조)하였다. 이는 사법부 최고위직의 인선을 법조계의 자체 선출에 위임한 것으로, 그 이전은 물론 그 이후의 헌정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제3차 헌법 개정만의 독특한 시도였다. 제5대 국회는 해당 조항에 근거하여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법」을 제정하였으며,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법」(1961.4.26. 제정). 그에 따른 첫 선거는 1961년 5월 25일로 예정하였다. 법조계 자체 선거의 방식을 취한 데에서 유추 가능하듯이, 법관선거제는 행정부·입법부의 인사 개입을 원천 차단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 기저에는 행정부의 법관 인사권 남용으로 말미암아 사법부의 독립성이 흔들린 1950년대 후반의 사회적 경험이 자리했다. 이승만 정권은 대법관 임명·연임에 수시로 개입하며 사법부를 정치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고, 이는 행정부의 고유 권한으로서 법관 인사권이 지닌 잠재적 위력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1950년대 후반의 법관 인사 논란 및 그 정치적 의미에 관해서는 곽규일, 2022, 「1957-1961년 법관 인사 논란과 그 귀결」, 『사림』 79, 제2장 참조. 법관선거제는 그러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제2공화국 나름의 대답이었다. 제3차 헌법 개정에 참여한 민주당과 학계의 중론은 행정부의 법관 인사권을 완전 박탈하여 법조인 자체 선거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수렴했다. 이로써 미군정기 이래로 사법부 독립의 제도적 대안으로 거론되어 왔던 법관선거제 담론은 1950년대 후반의 사회적 문제의식, 그리고 4월 혁명이 창출한 정치적 동력에 기대어 헌정과 결합하였다. 단,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법」은 법조계의 고위 엘리트로 하여금 대법원 구성의 전 과정을 독점하게 한 측면에서 폐쇄적 성격도 드러냈다. 곽규일, 2022, 위의 글, 183쪽. 전·현직 대법원장, 대법관, 고등법원장, 검찰총장, 고검장, 대한변호사협회장, 헌법재판소 소장 및 참의원 2인, 민의원 4인으로 구성된 추천인단이 대법관 후보를 3배수로 추천하면, 마찬가지로 현직 법관 50인 및 재야 법조인 50인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최종 선출하는 제한선거를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5. 기본권 부문 제3차 헌법 개정은 4월 혁명 직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제2장 ‘국민의 권리의무’를 상당 부분 개정하였다. 이는 제헌 이후 최초로 기본권 관련 조항을 고친 사례였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법률유보조항’의 삭제, ‘정당 보호조항’의 삽입, 국민 자유·권리의 강화 등으로 대별 가능하다. 김배원, 2009, 「한국헌법사와 현행헌법 기본권장의 개정 방향」, 『공법학연구』 10-3, 67쪽. ‘법률유보조항’은 법률에 의한 국민 기본권 제한을 가능케 한 단서를 가리킨다. 예컨대 제3차 헌법 개정 이전의 제10조는 관련 법률이 마련될 경우 거주·이전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침해할 여지를 열어두었다. 이에 제2공화국 헌법은 거주·이전의 자유, 침입·수색을 받지 않을 권리, 통신 비밀의 보장,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다룬 제10조, 제11조, 제13조에서 해당 단서를 삭제하였다. 국가가 법률유보조항을 내세워 국민의 자유, 권리를 유린하였던 1950년대의 경험을 수렴한 결과물이었다. 제13조는 정당의 보호를 확립한 점에서 적극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공청회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정당 정치의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헌법에 관련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다. 기초위는 그러한 여론을 수용하여 정당에 대한 국가적 보호를 헌법에 명시하는 한편,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그를 완비하게 하였다. 단, 말미에서는 헌법재판소에 의한 정당 해산도 함께 언급하였는데, 이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준거로 내세워 좌익 정당을 보호 대상에서 배제한 조치였다. 제28조는 법률유보조항을 존치한 측면에서 앞의 조항들과 결을 달리 한다. 그러나 그 다음 문구에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절대적으로 보장한 점을 감안하면, 큰 틀에서는 기본권 보호를 확대한 움직임과 맞닿은 것이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대한 검열, 허가제를 금지한 조항 역시 그 연장선에서 평가 가능하다. 특히 언론, 출판의 자유 보장은 당대 언론계의 요구사항 중 하나로, 「언론·출판 자유의 법률유보를 삭제하지 못하는 국회라면 즉시 해산하라」, 『경향신문』 1960. 5. 7. 석간 1면. 「신문 등 정기간행물 법안」 제정 추진, 『경향신문』 강제 폐간 등으로 누적된 문제의식을 함의했다. 신창훈, 〈2023년도 헌정사 자료집 DB 구축을 위한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 02 2. 주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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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 해제: 4차 개헌 I. 헌법 개정의 전개 과정 1. 헌법 개정의 배경 1960년 10월 17일 민주당의 윤형남(尹亨南)을 비롯한 민의원 114인이 「헌법개정안」을 발의하였다. 개정안은 약 36일의 공고 기간을 거쳐 11월 23일 제5대 국회 민의원 본회의를 압도적 표차로 통과하였고, 5일 후인 11월 28일에는 참의원 본회의의 문턱을 넘었다. 제2공화국 장면(張勉) 내각과 제5대 국회가 처리한 최초이자 최후의 헌법 개정이자 제헌 이래의 네 번째 헌법 개정이었다. 제4차 헌법 개정은 직전의 제3차 헌법 개정으로부터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다시 단행된 측면에서 돌출적 위치를 점한다. 그 직접적인 배경은 이른바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벌이 미완으로 그친 데 있었다. 3.15 부정선거 관여자, 4월 혁명 당시 발포 명령자 및 제1공화국 시기 부정축재자의 사법적 처단은 여론의 절대적 지지 속에 ‘혁명 과업’으로 환기되고 있었다. 이는 제2공화국 헌법을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도 현안으로 부상한 바 있었는데, 특히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는 과거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사례처럼 헌법에 특별법의 근거를 삽입하여야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를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요 일간지 역시 비슷한 논조에 입각하여 헌법 개정안의 미비점 중 하나로 그를 거론하였다. 「부정축재에 가차 없이 엄단을 가하라」, 『경향신문』 1960. 5. 11. 석간 1면; 「개헌의 신속한 실현을 요망」, 『동아일보』 1960. 6. 12. 석간 1면. 그러나 제3차 헌법 개정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미처 담아내지 못한 채 일단락되었고, 이는 제1공화국 비정(秕政)의 사법적 청산이 무산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예컨대 반민주행위 혐의자들은 처벌 근거인 「정·부통령 선거법」이 제3차 헌법 개정으로 실효(失效)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워 면소(免訴)를 주장하였고, 재판부 일각에서도 그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대부분이 무효론에 동의」, 『동아일보』 1960. 7. 22. 석간 3면; 「발포명령에 무죄」, 『경향신문』 1960. 9. 2. 석간 3면. 4월 혁명의 완결을 기대하던 여론과 극명히 엇갈리는 흐름이었다. 이에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4월혁명 완성을 위한 개헌안 기초에 관한 결의안」, 「4월혁명완수입법심의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긴급동의안」 등을 발의하며 여론을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취했다. 「4월혁명 완성을 위한 개헌안 기초에 관한 결의안」, 「4월혁명완수입법심의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긴급동의안」,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20호, 1960. 9. 24. 전자는 신파의 김채용(金采庸)이 제출한 안으로, 1948년 8월 15일에서 1960년 4월 26일에 이르는 제1공화국 전 기간의 부정선거 및 부정축재 관련 행위를 처벌할 특별법의 근거를 헌법 부칙에 삽입하고 전문(前文)에 그 취지를 명시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부칙을 덧붙이는 형태의 소급입법 개헌을 제시한 최초의 사례로, 1960년 9월 29일 만장일치로 민의원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구파의 윤형남 의원이 제출한 「4월혁명완수입법심의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긴급동의안」은 민의원 내에 별도의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특별재판소및특별검찰부 조직법」,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정을 서두르는 내용을 담았다. 비록 민의원은 각 상임위원위를 신속히 구성하는 방향으로 중론을 수렴하여 해당 동의안을 폐기하였으나, 「4월혁명완수입법심의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긴급동의안」,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24호, 1960. 9. 29. 이른바 ‘혁명입법’을 신속히 완수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은 엄중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위기의식은 1960년 10월 8일 서울지방법원의 1심 판결로 현실화되었다. 재판부는 주범 일부에 한하여 중형을 언도하였을 뿐, 나머지 대다수의 반민주행위 혐의자에 구형량에 미치지 못하는 형량 혹은 「대통령·부통령선거법」의 효력 상실 및 공소시효 만료를 근거로 면소를 선고하였다. 반민주행위자의 의법 처단을 기대해온 광장의 여론이 급격히 격앙되었으며, 정계 역시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크게 당황했다. 장면 국무총리와 민주당 신파는 물론, 제1야당인 민주당 구파도 헌법 개정을 통한 특별법 제정을 약속하며 상황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특별법 제정 위해 개헌은 부득이한 일」, 『동아일보』 1960. 10. 10. 조간 1면; 「특별법제정합의」, 『조선일보』 1960. 10. 11. 조간 1면; 「구파서 개헌 결정」, 『조선일보』 1960. 10. 11. 조간 1면. 2. 헌법 개정의 본격화 뒤늦은 특별법 제정 약속만으로는 여론을 누그러뜨리기에 부족했다. 이미 미심쩍은 시선으로 제도권의 혁명 입법을 주시하던 광장의 여론은 10월 8일 서울지법의 1심 선고를 계기로 일거에 폭발하였다. 급기야 1960년 10월 11일에는 4월 혁명 상이학생들이 민의원 본회의장을 점거하여 국회를 규탄하였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에 민·참 양원은 물론, 장면 내각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제4차 헌법 개정을 가속화 시킨 결정적 동력으로 작동했다. 현장에서 사태를 목격한 민의원은 곧바로 「4월혁명 완수를 위한 개헌 등 특별입법 촉진에 관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4월혁명 완수를 위한 개헌 등 특별입법 촉진에 관한 결의안」,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27호, 1960. 10. 11. 해당 결의안은 민주당의 김창수(金昌洙) 등 11인이 작성한 것으로, 헌법 개정안을 단 4일 내에 제출할 것을 요구(제1항)하였으며, 더 나아가 개헌 완수 이전에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부정축재특별처리법」 심사를 마치기로(제2항, 제3항)하였다. 사회대중당의 윤길중(尹吉重)도 본 결의안을 적극 지지하며 그러한 흐름에 힘을 보탰다. 참의원과 청와대의 정세 인식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백낙준(白樂俊) 참의원 의장이 조속히 ‘혁명입법’ 준비에 나서 민의원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자 참의원은 만장일치로 그에 동의하였다. 윤보선 대통령도 참의원과 민의원에 서한을 발송하여 국회에 개헌 완수를 당부하였다. 「특별법 제정요청의 건」,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28호, 1960. 10. 12.; 「특별법 제정요청의 건」, 『참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22호, 1960. 10. 13. 이는 제2공화국 헌법 제60조에 근거하여 대통령의 견해를 표시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례였다. 단, 윤보선 대통령은 서한을 보내어 헌법 개정을 촉구하되 그 주체를 국회로 한정하였다. 「대한민국헌법」(1960.6.15. 일부개정), 제98조 제1항: 헌법개정의 제안은 대통령, 민의원 또는 참의원의 재적의원 3분지 1이상 또는 민의원의원선거권자 50만인 이상의 찬성으로써 한다. 절차상 국회 주도의 헌법 개정이 대통령 발의의 그것보다 신속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장면 내각도 큰 틀에서는 대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혁명정신구현주력, 법질서 교란하면 용인할 수 없다”」, 『동아일보』 1960. 10. 12. 석간 1면. 그러나 주한미국대사관 대사대리 마셜 그린(Marshall Green)을 만난 자리에서는 그와 결을 달리하는 태도를 취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소급 처벌에 부정적 시선을 내비치며 제4차 헌법 개정이 본인의 지론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거듭 부각하였다. 바깥의 여론을 의식하여 소급입법 개헌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나, 그 범위는 3.15 부정선거, 4월 혁명, 부정축재로 국한하겠다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아울러 그는 장외의 반발로 무질서가 초래될 때는 조기에 물리력을 동원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이는 제4차 헌법 개정을 예의 주시하던 미국 국무부의 관점에 부응했다. 국무부는 3.15 부정선거 책임자에 한해 소급 처벌을 단행하는 데에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으나, 그 이상으로 범위를 확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필요 이상의 소급 처벌은 외적으로는 한국 정부의 국제적 평판에, 내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동력에 각각 손상을 가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에 국무부는 원조 유예를 거론하는 방식으로 장면 국무총리에 압력을 가하여 최소한의 소급 처벌을 관철할 것을 주한미국대사관 측에 지시하였다. C. Herter, 「Telegram from Herter to AmEmbassy Seoul」(1960.10.21.)(국사편찬위원회 헌정사 자료 DB, http://db.history.go.kr/id/cons_005_0020_0030_0020_0040) 그 중 전자는 민의원 역시 헌법 개정안 기초 과정에서 의식하였던 부분이었다. 1960년 10월 15일 민의원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윤형남 위원장은 앞서 「4월혁명 완수를 위한 개헌 등 특별입법 촉진에 관한 결의안」이 규정한 제출 기한에 맞추어 헌법 개정안 초안을 보고하였다. 법사위의 일원으로서 초안 작성에 참여한 민주당 주도윤(朱燾允) 의원의 설명에 따르면, 위원회는 ‘소급 처벌’의 잠재적 파급에 주의를 기울이며 헌법 개정안을 기초하였다. 소급 처벌을 금지한 세계 인권선언 제11조 제2항과 충돌할 경우 초래될 외교적 논란, “어느 누구도 행위 시에 국내법 또는 국제법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작위 또는 부작위를 이유로 유죄로 되지 아니한다. 또한 범죄 행위 시에 적용될 수 있었던 형벌보다 무거운 형벌이 부과되지 아니한다.” 같은 취지의 제2공화국 헌법 제23조를 위반할 경우 초래될 법적 논란 등이 고려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감안 혹은 감내할 지점일 뿐, 제4차 헌법 개정을 가로막을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윤형남 위원장은 범국민적 여론을 환기하며 개헌안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였다. 헌법 개정안의 핵심은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를 소급 처벌할 특별법의 근거를 부칙에 삽입하는 것이었다. 단, 특별검찰소, 특별재판소 설치에 관해서는 법사위의 중론을 받아들여 관련 조항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후 원내 각 정파의 대표들과 민의원, 참의원의 법사위원들은 이틀간 토의를 거듭한 끝에 최종안을 도출하였다. 최종안은 초안과 달리 특별검찰소, 특별재판소 설치를 명문화하였다. 이는 제4차 헌법 개정 과정에서 부상한 대표적 쟁점 중 하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특별검찰소, 특별재판소 도입을 요구한 주장에 힘이 실렸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속하고 엄격한 재판으로 여론을 수습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제한적 기소, 법원의 관대한 선고로 말미암아 제4차 헌법 개정에 착수한 이상 그에 다시 혁명 과업을 위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아울러 최종안은 반민주행위의 시간적 범주를 대폭 확대하여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행위를 한 자”까지 잠재적인 공민권 제한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원칙적으로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파동, 1958년 2·4파동은 물론, 1952년 부산 정치파동 관여자도 반민주행위의 정도 여하에 따라 공민권을 박탈당할 가능성이 부상했다. 이는 舊자유당 계열의 참의원들이 제4차 헌법 개정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배경이 되었다. 3. 헌법 개정의 발의와 의결 1960년 10월 17일 윤형남 위원장이 민의원 본회의에 헌법 개정안을 대표로 제출했다. 개헌안 발의에 동의한 의원은 윤형남을 포함하여 총 114인이었다. 「헌법 개정안 입안보고의 건」,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32호, 1960. 10. 17. 국회의 발의를 확인한 정부는 당일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및 국무위원 전원의 명의로 개헌안을 공고하였으며, 그 즉시 헌법 제98조 제3항이 규정한 공고 기간에 돌입하였다. 민의원, 참의원이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기 위해서는 공고 시점으로부터 최소 30일 이상이 흘러야 했다. 1960년 11월 16일부로 공고 기간이 끝나자 민의원은 개헌안 처리를 서둘렀다. 11월 19일 윤형남 위원장이 본회의에 등단하여 제안이유서를 낭독하였으며, 그것으로 질의를 종결한 의장단은 원내 각 정파에 표결일 결정을 위임했다. 「헌법 개정안」,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45호, 1960. 11. 19. 마침내 민의원은 1960년 11월 23일 오전 본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안 표결을 개시하였고, 총원 233명 중 200명이 참여한 가운데 191:1의 압도적 표차로 그를 의결하였다. 윤형남 위원장이 표결 전날인 11월 22일 참의원 본회의에 참석하여 개헌의 취지를 설명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민의원은 헌법 개정안 가결을 이미 확신하였던 것 같다. 「헌법개정안」, 『참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36호, 1960. 11. 22. 게다가 제4차 헌법 개정안의 표결 역시 제3차 헌법 개정안의 그것과 동일하게 기명으로 진행하였기에 개헌의 대세를 거스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부표를 던진 의원은 무소속의 김시현(金始顯)이 유일하였으며, 무효표, 기권표도 각각 6표, 2표에 그쳤다. 11월 23일 오전 민의원이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자 참의원도 당일 오후부터 독회를 개시했다. 먼저 무소속의 김남중(金南中)이 등단하여 헌법 개정에 찬의를 표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개헌안 처리 일정의 확정을 요구하였다. 이는 별도의 표결 없이 구두 동의의 형태로 승인을 얻었다. 민의원의 표결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헌법 개정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양원을 감돌았다. 반론도 없지는 않았다. 무소속 안호상(安浩相)은 제4차 헌법 개정에 따른 소급 처벌을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며 헌정사에 그러한 잘못된 전례(前例)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헌안이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의 반민주 및 부정축재 행위를 잠재적 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이상, 광범위한 정치적 보복으로 귀결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논지였다. 「헌법개정안」, 『참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37호, 1960. 11. 23. 이는 제도권 내에서 제기된 거의 유일한 제4차 헌법 개정 반대론이었다.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는 舊자유당 계열의 참의원들이 내심 지닌 불만을 반영했다. 후술하듯이 본래 참의원은 11월 26일 본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안을 의결할 예정이었으나 정족수 미달로 유회하였다. 舊자유당 계열의 참의원들이 개헌안 처리 이전에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의 적용 범위를 축소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참원, 혁명과업 완수에 반기」, 『경향신문』 1960. 11. 27. 조간 1면; 「Telegram from McConaughy to SecState, Washington」, 1960년 11월 26일.(국사편찬위원회 헌정사 자료 DB, http://db.history.go.kr/id/cons_005_0020_0030_0020_0060) 제4차 헌법 개정으로 가시화될 소급 처벌이 본인들을 겨누는 이상, 이들로서는 개헌에 선뜻 동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물론 이는 반민주행위자 및 부정축재자 청산의 의의를 부인하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안호상의 주장은 소급 처벌이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쟁점을 환기한 측면에서 시사점도 남겼다. 예컨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여 이른바 ‘舊정치인’의 공민권을 박탈하였을 때, 일각에서는 그를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과 「반민주행위자공민권 제한법」의 연장선에 두며 거듭된 사후 처벌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는 舊자유당 계열의 소극적 반발도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헌법 개정에 이견이 없던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11월 24일의 참의원 본회의에서 26일 표결 방침을 관철하였다. 「헌법개정안 표결일자에 관한 건」, 『참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38호, 1960. 11. 24. 비록 26일의 본회의는 정족수 미달로 유회되었으나, 국회와 장면 내각의 적극적인 회유로 그 여진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주당 양대 파벌은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초안을 수정하여 현역 의원에 적용될 구제 조항을 삽입하였으며, 「양당수정안 점차로 접근」, 『경향신문』 1960. 11. 28. 석간 1면. 장면 국무총리, 조재천(曺在千) 법무부장관도 현역 의원의 공민권 자동 박탈은 없을 것임을 공언했다. 마침내 11월 28일 참의원은 총원 58명 중 52명이 참석한 가운데 표결을 진행하여 제4차 헌법 개정안을 가결하였다. 개헌에 동의한 참의원은 총 44명이었으며, 부표를 던진 의원은 자유당의 오범수(吳範秀), 자유당계 무소속 강경옥(康慶玉), 박철웅(朴哲雄), 기권표 혹은 무효표를 행사한 의원은 자유당의 신의식(申義湜), 한광석(韓光錫) 및 무소속 송방용(宋邦鏞), 안호상, 이교선(李敎善) 등이었다. 「헌법개정안」, 『참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41호, 1960. 11. 28. 한광석, 박철웅, 강경옥, 오범수 등은 제4차 개헌 이후 제정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의 적용 대상이 되어 공민권과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다음날인 11월 29일 정부는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및 국무위원 전원의 명의로 제4차 헌법 개정을 공포하였다. Ⅱ. 제4차 헌법 개정의 내용 1. 반민주행위자 처벌 및 공민권 제한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새롭게 삽입된 첫 번째 부칙은 “단기 4293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부통령선거에 관련하여 부정행위를 한 자”, “그 부정행위에 항의하는 국민에 대하여 살상 기타의 부정행위를 한 자”를 소급 처벌할 특별법 제정을, 그리고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할 특별법 제정을 가능케 했다. 이에 근거하여 제5대 국회는 제4차 헌법 개정 이후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과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을 제정하였다.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안 제3독회」,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54호, 1960. 11. 30.;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안 재의의 건」,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65호, 1960. 12. 29.;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안 제2독회」, 『민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58호, 1960. 12. 5.;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안 제2독회」, 『참의원회의록』, 제5대 국회 제37회 제61호, 1960. 12. 29. 1960년 12월 29일 제정된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은 “부정행위자”를 “주도적 부정행위자”, “기타 부정행위자” 및 “살인, 상해, 폭행 등과 이의 지휘명령 등 행위자”로 대별한 후, 각각의 처벌 수위를 규정하였다. 가장 핵심적인 처벌 대상은 단연 주도적 부정행위자(제3조)였다. 주도적 부정행위자는 3,15 부정선거를 모의, 계획한 정권의 최고위층을 가리킨 범주로, 세부적으로는 3월 15일 당시의 대통령, 국무위원,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아울렀다. 본법에서 명시한 이들의 처벌 수위는 최소 징역 7년에서 최대 사형에 이르렀다. 그 다음으로 중형을 명시한 집단은 살인, 상해, 폭행 등과 이의 지휘명령 등 행위자(제5조)였다. 4월 혁명 당시 시위 군중을 대상으로 폭행, 살상을 저지르거나 그를 명령, 지휘한 자유당, 경찰의 수뇌부가 그에 해당하였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최소 징역 1년에서 최대 징역 15년을 선고할 수 있게 하였다. 단, 피해자가 사망에 이른 경우에는 무기징역 선고도 가능했다. 그 외의 기타 부정행위자(제4조)는 3.15 부정선거에 모의, 협조하거나 관련 자금을 조달한 자 중 주도적 부정행위자는 아닌 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처벌 수위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혹은 금고였다.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이 반민주행위자의 형사 처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같은 날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은 반민주행위자의 선거권, 피선거권 및 공직에 임용될 권리를 박탈(제3조)하는 데 주력하였다.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1960.12.31. 제정). 박탈 기간은 공고일 기준 5년 혹은 7년(제12조)이었으며, 대상자는 의원직을 포함한 일체의 공직을 즉시 상실하였다. 〈표 1〉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서 명시한 공민권 제한 대상 자동 제한(제4조) 심사위원회(제5조) 제한 대상 ·자유당 정·부통령후보자, 중앙당무위원,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위원, 중앙위원회 정·부위원장·국무위원, 정부위원, 심계원장, 중앙실·청장, 대통령 비서관, 민의원의장 비서장·내무부 치안국장, 치안국 특정과장, 특정과 분실장·제2계장, 내무부 지방국장, 지방국 지도과장, 서울특별시장·부시장, 도지사(이북5도지사 제외), 서울특별시·도의 지도과장, 경찰국장, 내무국장, 경찰서장, 경찰국 분실장·분실제2계장, 사찰과장, 사찰계장, 사찰 및 형사주임·자유당 핵심당위원장, 서울특별시·도당 위원장, 부위원장, 대한반공청년단 중앙단장·부단장·중앙국책금융기관장, 국영 및 정부직할기업체의 장,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사찰계 형사, 경찰서 분실장·제2계장, 사찰계장, 사찰 및 형사주임·자유당 중앙위원, 대통령 비서, 자유당이 추천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자유당 서울특별시·도당의 부장, 핵심당부 위원장·대한반공청년단 구, 시, 군 정·부단장, 각 처·부장, 시·도단장·자유당 산하 사회단체의 장·검찰총장, 대검찰청 차장검사·검사, 각급 검사장, 차장검사, 선거 및 정보 담당 부장검사, 지청장, 형무소장, 계호과장·중앙금융기관장,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대한노동총연맹 중앙 및 서울특별시·도 정·부책임자·육·해·공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육군 특무부대장·자유당 중앙 및 서울특별시·도의 선거대책위원회 위원 처분 ·법무부장관의 공고로 공민권 제한·제한 기간: 공고일 기준 7년 ·심사위원회의 판정을 거쳐 법무부장관의 공고로 공민권 제한·제한 기간: 공고일 기준 5년 기타 ·3.15 부정선거 당시 위의 직위에 있던 자에 적용·2·4파동 당시의 민의원 상임위원장과 자유당 원내 정·부총무, 1958년 5월 제4대 총선 당시 부정선거로 선거·당선 무효가 된 선거구의 자유당 입후보자와 경찰서장, 1959년 민의원 재선거 당시의 자유당 입후보자, 내무부장관·차관, 치안국장, 치안국 특정과장 등은 제5조를 적용하여 처분. 반민주행위자로 판단하는 근거는 3.15 부정선거 당시의 지위 혹은 행위였다. 제4조는 그 중 전자에 근거한 조항으로, 1960년 3월 15일 당시 특정 지위에 있었던 자를 반민주행위자로 자동 간주하여 공민권을 박탈하였다.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 중앙당무위원, 중앙위원회 정·부위원장, 국무위원, 대통령비서관,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정·부위원장, 선거사무장 및 기획위원 등을 구체적인 혐의 여부와 무관하게 반민주행위자로 규정한 이른바 “자동 케이스” 조항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통령 후보 이승만(李承晩), 이기붕(李起鵬)을 위시한 제1공화국 당정의 수뇌부 대다수가 일거에 공민권을 상실하였다. 헌법적 견지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특정 지위 재직에 근거하여 공민권을 자동 박탈한 조처는 위헌의 소지를 내재했다. 헌법 제22조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 즉 ‘재판을 받을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헌법 제22조) 하지만 반민주행위자의 청산이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보편의 과업으로 자리매김한 이상, 법리적 논리만으로는 그러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단, 현직 민의원, 참의원의 경우에는 자동 케이스에 해당하더라도 국회 내 심사위원회의 결정 여하에 따른 구제의 가능성(부칙)을 열어두었다. 경찰도 이승만 정권의 핵심 물리력으로서 부정선거를 주도하고 대민(對民) 발포를 감행한 사실을 반영하여 자동 케이스에 대거 포함되었다.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4조는 치안국장, 지방국장 등을 비롯한 지휘부는 물론, 과장, 계장, 분실장 등의 실무자까지 공민권 박탈 대상으로 명시하였다. 특히 정치사찰을 주도해왔던 사찰계는 주임에 이르는 말단까지 전원 공민권을 정지하였다. 1961년 2월 25일 법무부에서 발표한 명단에 따르면,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4조에 따라 공민권을 자동으로 제한한 인원은 총 609명이었다. 다음으로 제5조에서는 구체적 행위 여부에 근거하여 공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할 대상자를 열거하였는데,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중앙위원, 핵심당부위원장, 경찰서분실장, 검찰총장, 각급 검사장, 대한반공청년단 간부, 중앙금융기관의 장 등을 폭넓게 아울렀다. 대체로 제4조의 적용 대상자에 비해 부정선거에 관여한 개연성 혹은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그러나 관련 혐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위치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조사와 심사는 조사위원회(제6조)와 심사위원회(제8조)에서 각각 담당하였다. 〈표 2〉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 조사위원회 및 심사위원회 조사위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 ·특별검찰부장이 위촉 ·특별재판소장이 위촉 위원 구성 ·법관 2인·변호사 2인·대학교수 2인·4월혁명단체대표 2인·종교, 언론 기타 사회유지 7인·위원은 정당에 소속되지 않아야 함 ·법관 1인·변호사 1인·대학교수 1인·4월혁명단체대표 1인·종교, 언론 기타 사회유지 3인·위원은 정당에 소속되지 않아야 함 역할 ·반민주행위유무의 조사·조사 결과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판단한 경우, 심사위원회에 심사 청구 ·조사위원회에 심사를 청구한 자에 한하여 공민권 제한 여부를 판정·판정에 대한 이의 제기 금지 기타 ·서울특별시와 각도에 설치·「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시행 후 2개월 이내에 심사 청구 ·서울특별시와 각도에 설치·심사 청구 후 2개월 이내에 판정 아울러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5조는 3.15 부정선거 이전의 반민주행위 역시 심사대상으로 명시하여 총체적인 청산의 토대를 마련했다. 단적으로 1958년 12월 2.4파동에 관여한 국회 의장단, 운영위원장, 사무총장, 각 상임위원장, 자유당 원내총무단 등을 일괄 거론(제10항, 제16항)하였으며, 같은 해 치러진 1958년 제4대 총선과 그 재선거 당시 부정선거에 관여한 자유당 입후보자, 경찰서장 및 내무부장관, 차관 등도 심사 대상(제12항, 제13항)에 올렸다. 3.15 부정선거 및 4월 혁명 국면에서의 ‘반민주행위’를 넘어, 이승만 정권 말기의 위헌적 행위까지 청산의 대상으로 겨냥한 대목이었다. 단, 본래 제4차 헌법 개정 당시 함께 거론되었던 1952년 부산 정치파동 관여자 및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파동 관여자는 공민권 제한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1961년 5월 법무부에서 종합하여 발표한 바에 따르면,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5조에 따라 공민권 제한 여부를 심사한 대상 인원은 1,220명, 그 중 제한 판정을 받은 인원은 654명이었다. 「654명에 5년간 공권제한」, 『경향신문』 1961. 5. 27. 조간 2면. 아울러 국회 공민권제한심사위원회는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4조, 제5조에 해당한 현직 의원 31명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하여 그 중 민의원 8명, 참의원 8명의 공민권을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한 대상자는 참의원 한광석(제4조), 박철웅(제4조), 김장섭(金長涉, 제4조), 오범수(제4조), 김대식(金大植, 제5조), 황성수(黃聖秀, 제5조), 송관수(宋寬洙, 제5조), 강경옥(제5조), 민의원 이재학(李在鶴, 제4조), 최하영(崔夏永, 제4조), 전형산(全亨山, 제4조), 최치환(崔致煥, 제4조), 박종길(朴鍾吉, 제4조), 이정석(李丁錫, 제5조), 안동준(安東濬, 제5조), 송능운(宋能云, 제5조) 등이었다. 「공권제한된 의원들」, 『동아일보』 1961. 4. 25. 석간 1면.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따른 공민권 제한 조치는 1962년 3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당 법률을 폐지함으로써 효력을 잃었다. 단, 같은 날 제정된 「정치활동정화법」은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4조, 제5조 해당자가 정치활동을 희망할 경우에는 정치정화위원회에 적격심판을 청구하게 하였다. 「정치활동정화법」(1962.3.16. 제정), 제3조. 결론적으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거하여 공민권을 박탈당한 반민주행위자들은 「정치활동정화법」에 근거하여 설치된 정치정화위원회의 판정 여하에 따라 그 회복 여부가 최종 결정되었다. 2. 부정축재자 처벌 및 부정축재액 환수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제정의 근거가 된 헌법 부칙은 부정축재자 처리를 위한 특별법의 입법도 함께 명시하였다. 여기서 “행정상 또는 형사상의 처리” 대상으로 규정한 부정축재자는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로, 그 시간적 범주는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이었다. 이는 1961년 4월 제5대 국회 민의원·참의원이 「부정축재특별처리법」을 제정하는 대원칙으로 작동했다.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경제적 이득을 취한 행위를 가리키는 이른바 ‘부정축재’의 청산은 이미 4월 혁명 직후부터 한국 사회의 정치적 과업으로 부상한 바 있었다. 「시국선언문」, 『조선일보』 1960. 4. 26. 조간 3면. 정치 부문을 넘어 경제, 사회 각 부문으로 4월 혁명의 의의를 확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고 관련 재산을 몰수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떠올랐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 이철승, 조일재 등은 4월 혁명의 경제적 완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헌법 개정안에 부정축재 처벌 특별법의 근거를 삽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시효 만료 및 불소급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처벌이 무산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헌법 개정안」, 『국회임시회의속기록』, 제4대 국회 제35회 제35호, 1960. 6. 13. 그러나 제4대 국회는 부정축재자 처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관련 근거를 마련하지 않은 채로 제2공화국 헌법을 확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제1공화국의 부정축재를 청산할 법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헌법 개정을 경과하여야 했다. 마침내 제5대 국회는 해를 넘긴 1961년 4월 17일에 이르러 비로소 「부정축재특별처리법」을 제정하였다. 해를 넘겨 제정된 사실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부정축재특별처리법」은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과 달리 여러 굴곡을 겪어야 했다. 처벌 당사자인 경제계의 반발이 거셌으며,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장면 내각도 기업인 처벌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부정축재특별처리법」이 여러 지점에서 구제의 여지를 남겨둔 점도 그러한 맥락에 맞닿아 있었다. 예컨대 「부정축재특별처리법」은 ‘부정축재’를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에 3천만 환 이상을 자진하여 제공, 조달하거나 부정선거에 현저하게 관여한 공무원 혹은 정당인‘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로 규정(제2조)했다. 바꾸어 말하면, 선거자금을 자진하여 제공하지 않은 기업인, 부정선거에 현저하게 관여하지는 않은 공무원 혹은 정당인은 처벌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박진희, 2010, 앞의 글, 450~456쪽. 부정축재를 조사, 처리할 주체는 부정축재처리위원회였다. 위원회는 총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민의원·참의원의 각 교섭단체에서 1인씩 지명한 6명 및 해당 6명이 법조계, 학계, 언론계, 실업계에서 선출한 5명으로 대별(제7조)되었다. 위원회는 검사와 동일한 직권을 행사(제11조)하여 국·공유재산, 외환, 대부, 국세 등의 부문에서 부정축재를 조사(제2조)한 후, 부정축재액으로 최종 확정한 차액, 포탈액, 대부액 등을 추징(제12조~제24조)할 예정이었다. 해당 법률을 소급 적용하는 기점은 1955년 4월 26일(제5조)이었으며, 재산 도피, 은닉, 집행 방해, 허위 신고 등 조사를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명시(제32조~재39조)하였다. 그러나 앞선 정의와 마찬가지로 부정축재 조사는 부정축재자의 자진 신고(제6조)에 적지 않게 의존하였다. 자진하여 부정축재를 신고한 인원은 신고 기간 만료를 이틀 앞둔 5월 15일까지 전무하였으며, 「부정축재자적발키로」, 『경향신문』 1961. 5. 16. 조간 1면.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가 발발함에 따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본 조사에 돌입하지도 못한 채로 기능을 정지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6월 14일 「부정축재특별처리법」을 폐지하고 그를 「부정축재처리법」으로 대체했다. 「부정축재처리법」에 따른 조사에 의거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 부정축재자는 기업인 30명, 공무원·정당인 33명이었다. 박진희, 2010, 앞의 글, 461~463쪽. 3. 특별검찰부·특별재판소 설치 제4차 헌법 개정으로 추가 삽입된 두 번째 부칙은 반민주행위자, 부정축재자의 형사 처리를 전담할 기관으로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를 설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정축재특별처리법」 제정은 지체를 거듭했다. 이에 1960년 12월 제5대 국회는 수사, 심판 대상을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관련자로 한정한 「특별재판소및특별검찰부조직법」을 먼저 제정(제1조)하였다. 해당 법률은 특별재판소, 특별검찰부의 구성, 권한 등을 상세히 규정하였다. 「특별재판소및특별검찰부조직법」(1960.12.30. 제정). 특별재판소는 특별재판소장과 총 5부의 심판부로 조직되었다. 특별재판소장은 민의원이 선출하는 직위로서 특별재판소의 사무를 통할(제2조)하였으며, 각 심판부를 구성하는 5인의 심판관에 대해서도 위촉 권한을 행사했다. 심판관 5인은 법관, 4월 혁명 관련 단체대표, 변호사, 대학 교수 및 언론인으로 구성(제3조)하였는데, 심판에 있어 비(非)법조인의 참여를 보장한 점이 특징적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사법부의 독립과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한 규정으로 간주하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예컨대 무소속 참의원 이인(李仁)은 사실상 별도의 사법부를 조직하여 기존 법원의 권한을 침해한 점, 그리고 법관의 자격을 지니지 않은 대학 교수, 언론인 등을 심판부에 포함한 점 등을 거론하며 특별재판소 설치의 위헌성을 부각하였다. 그러나 민의원 법사위는 심판관에 국회의원 1인을 포함하였던 원안을 역으로 수정하여 그를 4월 혁명 관련 단체대표로 변경, 확정하였다. 「특재에는 3개 심판부」, 『조선일보』 1960. 10. 31. 석간 1면; 「법사위서 본회의에 정식제출」, 『조선일보』 1960. 11. 16. 조간 1면. 특별검찰부를 통할할 특별검찰부장 역시 민의원에서 선출(제4조)하였다. 특별검찰부의 중추를 담당할 30인 이내의 검찰관도 특별검찰부장의 위촉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심판관과 달리 검찰관은 자격을 검사 혹은 변호사로 한정하였는데, 이는 공소 업무의 기술적 성격을 감안한 조처였다. 본래 원안에서는 공소 유지의 불가피성을 고려하여 검찰관을 전원 검사로 명시하고자 하였으나, 적격자 부족을 내세운 검찰 측의 반론을 받아들여 변호사의 위촉도 가능케 하였다. 특별검찰부의 기소로부터 특별재판소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신속한 처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소시효는 「특별재판소및특별검찰부조직법」 시행일 기준 후 2개월로 촉박하게 설정(제8조)하였으며, 선고 역시 기소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내려져야(제9조) 했다. 제4차 헌법 개정이 조속한 혁명 과업의 완수를 열망한 장외 여론의 소산인 이상, 부수 법률도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단심제를 규정한 제7조도 같은 맥락에서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특별재판부의 심판은 3심제의 원칙을 폐기하고 단심제를 채택하였다.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한 경우에는 한 차례의 재심을 허용하였으나, 그마저도 원심 종료 후 3개월 이내에 다시 판결을 내려야(제9조) 했다. 요컨대 특별재판은 원칙적으로 법률 시행 후 5개월 이내에, 재심의 경우에도 8개월 이내에 모든 과정을 마무리하도록 설계되었다.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는 각각 김용식(金龍式)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문기선(文虁善) 변호사를 특별검찰부장, 특별재판소장으로 선임하여 1961년 1월 16일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용식씨를 선출」, 『조선일보』 1961. 1. 13. 석간 1면; 「문특별재판소장 첫 회견」, 『동아일보』 1961. 1. 3. 3면; 「특재특검 본격시무단계」, 『경향신문』 1961. 1. 15. 석간 3면. 그러나 1961년 5월 16일까지 특별검찰부는 43명의 부정선거 관여 혐의자를 새롭게 기소하는데 그쳤다. 특별재판소는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피고 및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 이후 일반법원으로부터 이관된 피고를 합하여 총 221명을 심리하였으며, 그 중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 사형),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 징역 15년), 내무부차관 이성우(李成雨, 징역 7년),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崔炳煥, 징역 5년)을 비롯한 30명에 판결을 선고하였다. 「원흉에 역사적 단죄」, 『조선일보』 1961. 4. 17. 1면. 이후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는 5.16 쿠데타를 맞이하여 활동을 정지하였다.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검찰부, 혁명재판소를 신설하며 제2공화국 특별검찰부, 특별재판소를 폐지하였다. 신창훈, 〈2023년도 헌정사 자료집 DB 구축을 위한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 02 2. 주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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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 해제: 5차 헌법 개정 1. 헌법 개정의 배경 1948년 7월 17일부터 시행된 제헌헌법 이후 1952년, 1954년, 그리고 1960년에 있었던 두 번의 헌법 개정까지 합하여 4회의 개정을 거친 우리 헌법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또 한 차례의 개정을 예고하였다.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를 해산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곧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하였다. 관보 제2876호(1961. 6. 6.). 1961년 6월 6일 공포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다시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새로 수립될 때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최고 통치기관의 지위를 갖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또 대통령 궐위 시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무엇보다도 헌법 규정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내용이 상충한다면, 후자에 의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헌법을 대신하여 법체계에서 최고법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에 이미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기로 천명한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국가재건비상조치법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통치할 수는 없었다. 1961년 8월 12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는 ‘정권이양시기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의 내용은 정권을 민간에 언제 어떻게 이양할 것인지에 관한 구상이 주를 이루었다. 이 성명의 내용에 따르면 사회질서와 법질서를 정돈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1년차 계획을 추진하는 등 어느 정도의 목표를 달성하고, 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공포한 다음 같은 해 5월에는 총선을 실시하는 방식으로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정에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차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책임제로 하며, 국회는 정원 100∼120명 사이의 단원제로 하고, 선거관리는 철저한 공영제를 실시하며 구정치인의 정계진출에 관한 입법조치를 취한다는 것 등 신헌법에 들어갈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1961년 8월 12일의 성명은 5차 개정 헌법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헌법 개정 절차 1960년 헌법 제98조에 의하면 대통령, 민의원 혹은 참의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민의원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이 헌법개정안을 제안할 수 있었다. 헌법개정안이 제의되면 대통령이 이를 30일 이상 공고하고, 민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이 의결되면 대통령이 이를 공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1962년 당시에는 국회가 해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에 의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이것은 당시 초헌법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몫이 되었다. 1962년 10월 8일 개정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제9조를 변경하여 헌법 개정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결을 거친 후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서 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 국민투표에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 수권 조항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1962년 10월 12일 공포된 국민투표법이다. 이 법 제1조는 “본법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9조의 규정에 의한 국민투표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어,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절차를 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률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법을 통하여 투표권, 투표구, 투표인 명부, 투표 방법 등 개헌 국민투표에 필요한 제반 절차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의 내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7월 최고회의의원과 전문가로 구성된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헌법, 정치학, 경제학 등 전문가로 구성된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는 1962년 7월 16일부터 개헌안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였다. 대한민국 국회, 1967, 『헌법개정심의록』 제1집 참조. 전문위원회에서는 헌법의 제정인가 개정인가, 국회의 형태, 정부형태, 경제조항과 경제심의위원회 설치 여부, 헌법재판소 설치 여부 등을 두고 여러 가지 토론이 있었다. 1962년 8월에는 심의위원회에서 어느 정도 간추려진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공청회가 이루어졌다. 공청회 후에는 본격적인 헌법개정안 조문화 작업이 이루어져서, 1962년 11월 5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의 찬성으로 제안된 헌법개정안이 공고되었다. 관보 제3287호(1962. 11. 5.) 12월 6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본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이 의결되어 마지막 관문인 국민투표에 부의되었다. 12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서 제5차 개헌 헌법이 확정되었다. 관보 제3330호(1962. 12. 26.) 다만 이 헌법이 시행되기까지는 다시 우여곡절이 있었다. 헌법 부칙 조항에서 헌법 효력 발생일을 이 헌법으로써 국회를 구성한 뒤 국회가 처음 집회한 날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의원 선거 실시라는 과정을 거쳐야 헌법은 비로소 효력을 발생하고 민정이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3년 3월에는 본래 헌법 개정 공포일(1962. 12. 26.)로부터 1년 이내에 국회 집회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던 부칙 조항을 변경하여, “이 헌법에 의한 최초의 국회의 집회는 1967년 8월 15일 이내에 한다”는 내용을 넣기로 하는 1962년 개정헌법에 대한 개정안이 공고되었다. 이 개정안의 의미는 민정이양 시기를 늦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과 미국의 부정적인 입장 등 요인으로 인하여 이러한 개정안의 내용은 번복되었다. 그 결과 1963년 10월 15일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1963년 12월 17일 마침내 국회가 소집됨에 따라 5차 개정 헌법도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제6대 국회 제39회 국회회의록 제1호 (1963. 12. 17.). 이 헌법은 제정으로 할 것인지 개정으로 할 것인지가 문제되었을 만큼 1960년 헌법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정당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의원내각제로부터 다시 대통령제로 회귀하면서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종전의 양원제에서 변경을 가하여 단원제를 택하였으며, 경제 부분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라고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김영수, 2000, 『한국헌법사』, 학문사, 515-525쪽. 3. 개헌 관련 자료 1962년 헌법은 5·16쿠데타로 인한 비상상황에서 마련되었다. 1962년 헌법 개정 과정에 대한 가장 자세한 자료로는 1967년 국회도서관에서 출판한 헌법개정심의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당시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의 기록과 공청회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헌법 개정 절차와 관련해서는 개헌 논의의 시작을 알린 1961년 8월 12일의‘정권이양시기에 관한 성명’, 헌법 개정안 공고 및 헌법개정안 국민투표 부의 공고 등『관보』가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헌법안 심의 과정을 담고 있는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 회의록과 공청회 기록, 그밖에 헌법안 심의 절차에 대한 소식을 보도한 신문자료 등도 개헌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국민투표법 등 관련 법률도 헌법 개정과정에 대한 자료에 해당한다. 그밖에 5·16 쿠데타에 대한 미국 문서 등도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정사 자료집 편찬 연구용역 보고서: 제3, 4공화국 헌법 개정에 대한 자료조사〉
- 02 2. 주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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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1. 해제: 6차 개헌헌법 1. 헌법 개정의 배경 1967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다시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1963년 헌법 제69조 제3항에 의할 때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임기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적어도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이상 집권을 하고자 한다면 헌법에 존재하는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1962년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개헌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당시 헌법 제119조부터 제121조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헌법 개정 제안에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고, 다시 이것이 국회 의결을 거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국회에서의 개헌선 확보는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당인 민주공화당으로서는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결과 6·8선거는 여당의 자금력과 행정조직 동원력에 의하여 치르게 되었다.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은 개헌선 117석을 초과하는 129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야당은 신민당이 45석, 대중당 1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야당은 이를 부정선거로 규탄하기도 하였다. 선거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정부와 여당에서는 장관 중 일부를 교체하고 부정선거에 개입한 일부 당원을 제명하는 등 조치를 취해야 했다. 김영수, 2000, 『한국헌법사』, 학문사, 532-533쪽; 허종, 2015, 「1969년 대전지역 3선 개헌 반대운동의 양상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제75집(한국근현대사학회), 200-201쪽. 국회 내에서 여당이 개헌선을 확보하였으나 김종필 등 당내 개헌 반대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비서실장 이후락 등 당내 개헌 세력은 1968년에는 당내 개헌 반대 여론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어느 정도 이러한 작업이 완성된 후 1968년 12월부터는 대외적으로도 조금씩 개헌 논의를 양성화하기 위한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9년 1월부터는 보다 적극적으로 당 인사들이 조국근대화를 위한 개헌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개헌 반대파였던 김종필도 입장을 바꾸었다.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하자 신민당 등 개헌을 반대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신민당이 일찍이 개헌 저지 의사를 밝혔으며, 6월에는 정치활동정화법 해금인사 등과 함께 오랜 기간 논의하던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가 발족하기도 하였다. 6월부터는 서울대·고려대·경북대 등 전국 대학의 3선 반대 운동도 활발해졌다. 허종, 위의 글, 202쪽. 당시 개헌을 찬성하던 입장에서 내세우던 논거로는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구축해야 하고 경제 발전 작업을 단절 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점에서 개헌이 필요하고, 헌법의 내용도 필요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있었다. 반면 개헌에 반대하던 측에서는 특정 정당이나 특정 지도자만이 반공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민주공화당 정부의 경제 건설 정책이 부실했으며 3선 개헌은 장기집권에 의한 독재정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헌법의 개정이 아니라 헌법의 파괴에 해당한다고 맞섰다. 한편 박정희 본인은 1969년 1월만 하더라도 공개적으로는 개헌에 관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청와대 기자회견에서 개헌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개헌보다 반공과 국가 발전이 더 급한 사안이므로, 개헌 문제를 논의한다 하더라도 이는 연말이나 다음해 초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답한 것이다.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1969, 『각 당 총재의 연두회견 및 정책기조』(입법참고자료 제99호), 31-32쪽. 개헌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자 2월 4일에는 개헌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7월 25일 마침내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개헌 문제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고 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공식적인 3선 개헌 절차에 돌입하게 되었다. 1969년 7월 17일 정식으로 발기대회를 개최한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와 신민당 등 개헌반대 세력도 개헌 저지를 위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민당 소속 의원 3명이 3선 개헌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기도 하였다. 신민당은 이들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하여 세 사람 외의 모든 의원을 제명한 다음 당을 해산하여 이들의 소속 정당을 없애고, 다른 의원들은 신민회라는 별도의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법률상 당 해산 전에 제명되지 않은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김영수, 앞의 책, 535-536쪽; 이기훈, 앞의 글, 190-193쪽). 전국 각지의 학생들도 반대운동을 계속하였고, 그 때문에 대학에서 휴교를 결정하는 경우 학생들은 학내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3선 개헌은 개헌 절차를 둘러싼 대립이 매우 격렬한 가운데 추진된 것이다. 2. 헌법 개정 절차 당시 헌법 제119조와 제120조, 제121조에서 정하는 바에 의하면 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또는 국회의원선거권자 50만인 이상의 찬성에 의한 헌법개정안 제안, ② 헌법개정안 제안을 30일 이상 공고, ③ 공고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한 국회에서의 의결, ④ 국회 의결 60일 이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 투표 및 투표자 과반수 찬성으로 개헌 확정, ⑤ 대통령의 개헌 공포의 절차를 거쳐야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69년 7월 25일 대통령 특별담화 후 민주공화당은 먼저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조항을 포함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제헌헌법 이후 1960년 헌법까지는 대통령에게도 헌법 개정 제안권이 있었으나 1963년 헌법에는 이것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에서 이를 제안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3선 개헌 과정에서 행정부의 결단은 큰 영향을 미쳤다. 신우철,2018, 「대한민국헌법의 성립과 변경: 세기에 걸친 경험의 종합과 새로운 개혁의 모색」, 『법학논문집』 제42집 제3호(중앙대학교 법학연구원), 32쪽. 제안된 개헌안은 곧바로 관보에 공고되었다. 국회 내에서는 개헌안을 둘러싸고 많은 진통이 있었다. 야당 의원들은 개헌안 심의 과정에서 연일 개헌을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결국 이 개헌안은 1969년 9월 14일 새벽에 민주공화당 의원만 참석한 가운데 기습적으로 의결되었다. 마지막으로 1969년 10월 17일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 개정이 확정되었다. 국회에서의 표결 뿐 아니라 국민투표 과정에서도 정부와 여당의 선전 및 선동, 공무원의 투표 개입 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다. 김영수, 앞의 책, 537쪽. 제6차 헌법 개정을 통해서 국회의원의 수는 “150인 이상 250인 이하”의 범위 내에서 법률로 정하게 되었고(제36조 제2항), 국회의원의 겸직은“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지방의회의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공사의 직”의 겸직 금지에서 “법률이 정하는 공사의 직”의 겸직 금지로 변경되었다(제39조). 그리고 대통령의 탄핵소추 요건이 강화되어 국회의원 50인 이상의 발의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제61조 제2항). 마지막으로 제69조 제3항을 통하여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하는 것으로 개정되어, 3선 금지의 제한이 철폐되었다. 개헌된 조문의 분량만 보면 6차 개헌은 1962년의 5차 개헌과 달리 부분적 개헌에 그친 것이지만 박정희의 장기집권의 길을 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찬반 양론의 대립이 매우 격렬하였으며, 야당 의원들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반대운동을 벌였고 그 후유증도 매우 컸다. 3. 관련 자료 관보는 새로운 법의 공표나 정부의 정책 결정을 고시하는 공식적인 문서로 6차 개헌 관련해서도 헌법 개정의 형식적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제7대 국회 제70회에서 제72회 국회회의록은 헌법개정안 제안 전후의 국회 내 논의과정을 보여준다. 헌법 개정안이 정식으로 제안되기 전에는 3선 개헌을 둘러싼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1969년 9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이 정식 안건으로 상정된 이후에는 이에 대한 토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통령 발언과 관련한 자료들은 개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각 시점마다 대통령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대통령이 발표하는 성명은 개헌 논의의 전환점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개헌안 발의권이 없는 대통령의 의사가 개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밖에 국민투표법 등 헌법 개정 관련 법률은 개헌 절차의 법적 근거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 헌정사 자료집 편찬 연구용역 보고서: 제3, 4공화국 헌법 개정에 대한 자료조사〉
- 02 2. 주요자료
중요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