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다 ( 934년 01월(음) )

청태(淸泰)001001 청태(淸泰): 중국 후당 말제〔末帝. 폐제(廢帝)라고도 함〕의 연호로 934~936년 동안 사용되었다.닫기 원년(934) 봄 정월002002 봄 정월: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7년(934) 9월 정사조에는 이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닫기에 태조가 운주(運州)003003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이다. 『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홍주조에는 “성종 14년(995)에 운주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다. 현종 3년(1012)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실록』 10년(927)에 3월 기사 중 ‘왕이 운주에 들어갔다. ’라는 글의 주에 ‘지금의 홍주이다. ’라고 하였다. 】. ”라고 되어 있다.닫기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견훤이 듣고, 드디어 군사[甲士] 5,000명을 선발하여 이르렀다. 장군 금필(黔弼)004004 금필(黔弼): 유금필(庾黔弼)이다. 생몰년 ?~941년.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의 호족 출신으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주지하다시피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은 김유신이었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은 유금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전기는 『고려사』 권92 열전5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김갑동, 2008,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유금필」, 『軍史』 69
신성재, 2017, 「고려 태조대 명장 충절공(忠節公) 유금필(庾黔弼)」, 『軍史』 102; 2018, 『후삼국 통일전쟁사 연구』,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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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가〔견훤이〕 미처 진을 치지 않았는데 굳센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여 3천여 명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웅진(熊津)005005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이다. 본래 백제의 수도였으며, 신라 신문왕이 웅천주(熊川州)로 삼았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웅주(熊州)로 고쳤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웅주].닫기 이북의 30여 성006006 웅진 이북 30여 성: 본서 권제12 신라본기제12 경순왕 8년(934) 9월조에는 운주 부근[運州界] 30여 군현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고 나온다.닫기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007007 술사(術士) 종훈(宗訓): 술사(術士)는 음양, 복서, 점술 등에 능통한 사람을 가키는데, 여기에서는 풍수지리에 밝은 자로서 전술(戰術)을 담당한 듯하다[姜仁求 외, 2002, 『譯註 三國遺事』 Ⅱ, 以會文化社, 230~231쪽의 주 175)]. 종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닫기 의자(醫者) 훈겸(訓謙),008008 의자(醫者) 훈겸(訓謙): 의자(醫者)는 종군한 의원일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지겸(之謙)으로 되어 있다. 훈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닫기 용감한 장수 상달(尙達)과 최필(崔弼)009009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상봉(尙逢)과 작필(雀弼)로 되어 있다. 상달과 최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닫기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010010 청태(淸泰) 원년(934) … 항복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7년(934) 9월 정사조『고려사』 권92 열전5 제신 유금필전에 같은 사건을 전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운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웅진 이북 30여 성이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전세는 완연히 왕건 쪽으로 기울었다.
〈참고문헌〉
김명진, 2015, 「고려 태조 왕건의 운주전투와 긍준의 역할」, 『軍史』 96
신성재, 2019, 「후삼국 통일전쟁과 운주전투」 『軍史』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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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청태(淸泰): 중국 후당 말제〔末帝. 폐제(廢帝)라고도 함〕의 연호로 934~936년 동안 사용되었다.
註 002
봄 정월: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7년(934) 9월 정사조에는 이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註 003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이다. 『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홍주조에는 “성종 14년(995)에 운주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다. 현종 3년(1012)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실록』 10년(927)에 3월 기사 중 ‘왕이 운주에 들어갔다. ’라는 글의 주에 ‘지금의 홍주이다. ’라고 하였다. 】. ”라고 되어 있다.
註 004
금필(黔弼): 유금필(庾黔弼)이다. 생몰년 ?~941년.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의 호족 출신으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주지하다시피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은 김유신이었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은 유금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전기는 『고려사』 권92 열전5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김갑동, 2008,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유금필」, 『軍史』 69
신성재, 2017, 「고려 태조대 명장 충절공(忠節公) 유금필(庾黔弼)」, 『軍史』 102; 2018, 『후삼국 통일전쟁사 연구』, 혜안
註 005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이다. 본래 백제의 수도였으며, 신라 신문왕이 웅천주(熊川州)로 삼았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웅주(熊州)로 고쳤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신라 웅주].
註 006
웅진 이북 30여 성: 본서 권제12 신라본기제12 경순왕 8년(934) 9월조에는 운주 부근[運州界] 30여 군현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고 나온다.
註 007
술사(術士) 종훈(宗訓): 술사(術士)는 음양, 복서, 점술 등에 능통한 사람을 가키는데, 여기에서는 풍수지리에 밝은 자로서 전술(戰術)을 담당한 듯하다[姜仁求 외, 2002, 『譯註 三國遺事』 Ⅱ, 以會文化社, 230~231쪽의 주 175)]. 종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8
의자(醫者) 훈겸(訓謙): 의자(醫者)는 종군한 의원일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지겸(之謙)으로 되어 있다. 훈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9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상봉(尙逢)과 작필(雀弼)로 되어 있다. 상달과 최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10
청태(淸泰) 원년(934) … 항복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17년(934) 9월 정사조『고려사』 권92 열전5 제신 유금필전에 같은 사건을 전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운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웅진 이북 30여 성이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전세는 완연히 왕건 쪽으로 기울었다.
〈참고문헌〉
김명진, 2015, 「고려 태조 왕건의 운주전투와 긍준의 역할」, 『軍史』 96
신성재, 2019, 「후삼국 통일전쟁과 운주전투」 『軍史』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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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