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北魏)에 가서 조공하니,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에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국은 정성껏 대국[天極]과 관계를 맺어 여러 대에 걸쳐 지극한 정성으로 〔우리〕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조공하는데 허물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옥(珂玉)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 두 물품이 제왕의 부고(府庫)에 올라오지 못한 이유는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上國)의 지위[上將]에 있으면서 해외(海外)의 일을 오로지 하여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다. 작은 술병[瓶]이 비는 것은 큰 술독[罍]의 수치인데, 〔이는〕누구의 허물인가? 지난 공물의 잘못은 연솔(連率)의 책임이니, 경은 마땅히 경의 임금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부여와 섭라〕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수복하도록 하여,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