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실불이 북위에 사신으로 가 황제를 알현하다 ( 504년 04월(음) )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北魏)에 가서 조공하니001001 사신을 보내 …… 조공하니 : 『위서(魏書)』 권8 세종기8 정시원년(504) 4월조,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69 외신부(外臣部)14 조공(朝貢)2 후위(後魏) 선무제(宣武帝) 정시원년 4월조에도 이때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사실이 나온다.닫기, 세종(世宗)002002 세종(世宗) : 북위의 제7대 황제이다. 483년에 효문제의 차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문소황후 고소용(高照容)이다. 497년에 황태자로 책립되었다가, 499년에 즉위하여 515년까지 16년간 재위하였다. 재위 기간에 도성인 낙양성(洛陽城)을 확장하는 등 효문제 이래의 한화정책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대외적으로는 남제·양의 교체기를 틈타 남벌을 감행하여 한중(漢中)과 사천(四川)을 점령하는 한편, 북으로는 유연을 거세게 공격하여 북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다만 재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보정대신(輔政大臣)들의 부정부패와 외척인 고조(高肇)의 전권 행사로 인해 황제권이 약화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농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세종은 그의 묘호이며, 시호는 선무황제(宣武皇帝),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이다(『위서(魏書)』 권8 본기8 세종기 참조). 이 기사에서 보듯이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닫기이 사신 예실불(芮悉弗)003003 예실불(芮悉弗) : 문자명왕 13년(504)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인데, 그 외의 다른 활동은 전하지 않는다.닫기을 동당(東堂)004004 동당(東堂) : 북위 궁궐의 정전인 태극전(太極殿)의 동쪽 상방(廂房)을 흔히 동당이라고 하였다. 남북조시기에는 태극전 서쪽의 서당(西堂)이 황제의 주거와 휴식 공간이었다면, 동당은 군신과의 정치회합이나 종실과 고관의 장례가 거행되던 정치·의례의 장소였다(『자치통감(資治通鑑)』 권101 진기23 흥녕3년(365) 2월 병신조에 대한 호삼성(胡三省) 주석; 杨宽, 1993, 「封闭式的里制和坊制」, 『中国古代都城制度史硏究』, 上海古籍出版社; 山崎道治, 1996 「漢唐間の朝堂について」, 『古代都城の儀礼空間と構造』 奈良国立文化財硏究所). 이에 북위 효무제가 고구려 사신을 동당에서 접견한 것으로 보인다.닫기에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국은 정성껏 대국[天極]과 관계를 맺어 여러 대에 걸쳐 지극한 정성으로 〔우리〕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조공하는데 허물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옥(珂玉)005005 가옥(珂玉) : 옥과 비슷한 흰 돌, 흰색 마노(瑪瑙) 등을 뜻한다.닫기은 섭라(涉羅)006006 섭라(涉羅) : 탐라(耽羅)나 탐모라(耽牟羅)의 다른 표기로 현재의 제주도로 보기도 하지만(이병도, 1977: 2012, 337쪽), 대체로 신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336-337쪽). 이어지는 “섭라가 백제에게 병합되었다(渉羅爲百濟所并).”라는 구절은 종래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신라가 백제와의 연합을 강화하며 고구려의 예속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고구려의 입장에서 북위에 설명한 것인 듯하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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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勿吉)007007 물길(勿吉) : 읍루(挹婁)의 후신이다. 중심지에 대해서는 하얼빈보다 하류의 동류 송화강 유역, 퉁허[通河]-이란[依蘭] 일대, 장광차이링[張廣才嶺]에 걸친 쑹화강[松花江] 유역, 쑹화강 지류인 라린허[拉林河] 일대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최근 고고자료를 종합하면 4세기 후반 물길의 중심지는 장광차이링[張廣才嶺]보다 동쪽의 동류 쑹화강 일대로 비정된다. 470년대부터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475년 10월에는 “고구려의 10락(落)을 격파하였다며 백제와 모의하여 수로[水道]를 통해 고구려를 공취하겠다.”라며 북위의 의향을 묻기도 하였다. 그 이후 물길은 장광차이링을 넘어 동류 쑹화강 상류로 활발하게 진출하였는데, 이통허[伊通河] 하류의 후부여가 물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문자명왕 3년(494)에 고구려에 투항하기도 하였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3년 2월조 참조). “부여가 물길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다.”라는 구절은 바로 이 사실을 일컫는다. 그 이후 물길은 동류 쑹화강 상류와 북류 쑹화강 하류 일대를 놓고 고구려와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는 한편, 북위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다. 6세기 중반 이후 물길 대신 말갈이 등장하는데, 말갈을 물길의 후신으로 상정하기도 하지만, 족속 계통은 같지만 주도 집단은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김락기, 2013, 『高句麗의 東北方 境域과 勿吉 靺鞨』, 경인문화사
刘晓东, 2014, 『靺鞨文化的考古学硏究』, 吉林大学 博士学位论文
이종수, 2011, 「三江平原地域 초기철기문화의 특징과 사용집단 분석」, 『高句麗渤海硏究』 41
강인욱, 2015, 「三江平原 滾兎嶺·鳳林 문화의 형성과 勿吉·豆莫婁·靺鞨의 출현」, 『高句麗渤海硏究』 52
여호규, 2018, 「5세기 후반 高句麗·勿吉의 충돌과 북방 接境空間의 변화」, 『中央史論』 47
津田左右吉, 1915, 「勿吉考」, 『滿洲地理歷史硏究報告』 1, 東京帝國大學
池內宏, 1934, 「勿吉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5
日野開三郞, 1946, 「勿吉考」, 『史淵』 35
王乐文, 2009, 「挹娄·勿吉·靺鞨三族关系的考古学观察」, 『民族硏究』 2009-4
范恩实, 2010, 「勿吉兴亡史探微」, 『北方论丛』 2010-1
程尼娜, 2014, 「汉至唐时期肃慎·挹娄·勿吉·靺鞨及其朝贡活动研究」, 『中国边疆史地研究』 24-2
王禹浪・王俊铮, 2015, 「近百年來国內外勿吉硏究综述」, 『哈尔滨学院学报』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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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008008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 : 부여가 물길에 쫓겨 494년에 고구려에 투항한 사실을 일컫는다.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에는 바로 이어서 “국왕 신 운(雲)이 멸망한 나라를 잇는 대의로 모두 〔고구려〕 경내로 옮겼습니다(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부여의 투항을 받아들인 사실을 말한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3년 2월조 참조).닫기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이 두 물품이 제왕의 부고(府庫)에 올라오지 못한 이유는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上國)의 지위[上將]에 있으면서 해외(海外)의 일을 오로지 하여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다. 작은 술병[瓶]이 비는 것은 큰 술독[罍]의 수치인데,009009 작은 술병이 비는 것은 큰 술독의 수치인데 : 『시경(詩經)』 소아(小雅) 요아편(蓼莪篇)의 “술병이 빈 것은 술독의 수치이다(瓶之罄矣, 維罍之耻.)”를 줄인 말이다. 상호의존적이어서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비유한다. 여기에서 작은 술병은 고구려, 큰 술독은 북위를 의미하는데, 부여의 황금과 섭라의 옥이 조공으로 바쳐지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잘못이지만, 북위의 수치로도 이어진다는 뜻이다.닫기 〔이는〕누구의 허물인가? 지난 공물의 잘못은 연솔(連率)010010 연솔(連率) : 본래 주대(周代)의 제도로 ‘연수(連帥)’라고도 한다. ‘연(連)’은 ‘10국의 제후’, ‘솔(率)’과 ‘수(帥)’는 이들을 거느린 우두머리를 뜻한다. 연솔은 여러 제후국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북위의 책봉을 받은 고구려가 휘하에 여러 군소 국가나 족속을 거느렸음을 일컫는다.닫기의 책임이니, 경은 마땅히 경의 임금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부여와 섭라〕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수복하도록 하여,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011011 세종이 동당에서 …… 라고 하였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에도 나오는데, 해당 내용 가운데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라는 구절만 생략하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 당시 고구려는 나제동맹의 강화로 신라가 세력권에서 이탈하고, 쑹화강[松花江] 유역에서는 새롭게 흥기하는 물길(勿吉)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품을 핑계로 북위의 의향을 타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위 세종은 고구려가 부여나 섭라 등을 거느리며 동방지역에 독자세력권을 구축한 사실을 인정하며, 이를 잘 유지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기사는 고구려와 북위가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상호 세력권을 인정하며 병존정책을 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朴漢濟, 214-216쪽; 노태돈, 336-337쪽). 다만 일반적으로는 고구려가 독자세력권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북위가 이를 인정하였다고 이해하지만(三崎良章; 朴漢濟; 노태돈), 북위가 470년 무렵까지도 고구려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다가 470년대 이후 고구려의 지속적인 무력시위로 인해 북위의 안위가 위협받자 비로소 인정했다고 보기도 한다(이성제, 121-138쪽). 또한 북위가 효문제 시기까지는 고구려에 강경책을 펴다가, 세종 선무제 시기에 내부 사정으로 고구려에 의지하여 동쪽 상황을 규제하려는 유화책을 폈다고 보기도 한다(김진한, 150-152쪽).
〈삼국사기〉
朴漢濟, 1988,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一潮閣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이성제, 2005, 『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 국학자료원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三崎良章, 1982, 「北魏の対外政策と高句麗」, 『朝鮮学報』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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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사신을 보내 …… 조공하니 : 『위서(魏書)』 권8 세종기8 정시원년(504) 4월조,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69 외신부(外臣部)14 조공(朝貢)2 후위(後魏) 선무제(宣武帝) 정시원년 4월조에도 이때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사실이 나온다.
註 002
세종(世宗) : 북위의 제7대 황제이다. 483년에 효문제의 차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문소황후 고소용(高照容)이다. 497년에 황태자로 책립되었다가, 499년에 즉위하여 515년까지 16년간 재위하였다. 재위 기간에 도성인 낙양성(洛陽城)을 확장하는 등 효문제 이래의 한화정책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대외적으로는 남제·양의 교체기를 틈타 남벌을 감행하여 한중(漢中)과 사천(四川)을 점령하는 한편, 북으로는 유연을 거세게 공격하여 북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다만 재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보정대신(輔政大臣)들의 부정부패와 외척인 고조(高肇)의 전권 행사로 인해 황제권이 약화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농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세종은 그의 묘호이며, 시호는 선무황제(宣武皇帝),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이다(『위서(魏書)』 권8 본기8 세종기 참조). 이 기사에서 보듯이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註 003
예실불(芮悉弗) : 문자명왕 13년(504)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인데, 그 외의 다른 활동은 전하지 않는다.
註 004
동당(東堂) : 북위 궁궐의 정전인 태극전(太極殿)의 동쪽 상방(廂房)을 흔히 동당이라고 하였다. 남북조시기에는 태극전 서쪽의 서당(西堂)이 황제의 주거와 휴식 공간이었다면, 동당은 군신과의 정치회합이나 종실과 고관의 장례가 거행되던 정치·의례의 장소였다(『자치통감(資治通鑑)』 권101 진기23 흥녕3년(365) 2월 병신조에 대한 호삼성(胡三省) 주석; 杨宽, 1993, 「封闭式的里制和坊制」, 『中国古代都城制度史硏究』, 上海古籍出版社; 山崎道治, 1996 「漢唐間の朝堂について」, 『古代都城の儀礼空間と構造』 奈良国立文化財硏究所). 이에 북위 효무제가 고구려 사신을 동당에서 접견한 것으로 보인다.
註 005
가옥(珂玉) : 옥과 비슷한 흰 돌, 흰색 마노(瑪瑙) 등을 뜻한다.
註 006
섭라(涉羅) : 탐라(耽羅)나 탐모라(耽牟羅)의 다른 표기로 현재의 제주도로 보기도 하지만(이병도, 1977: 2012, 337쪽), 대체로 신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336-337쪽). 이어지는 “섭라가 백제에게 병합되었다(渉羅爲百濟所并).”라는 구절은 종래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신라가 백제와의 연합을 강화하며 고구려의 예속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고구려의 입장에서 북위에 설명한 것인 듯하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註 007
물길(勿吉) : 읍루(挹婁)의 후신이다. 중심지에 대해서는 하얼빈보다 하류의 동류 송화강 유역, 퉁허[通河]-이란[依蘭] 일대, 장광차이링[張廣才嶺]에 걸친 쑹화강[松花江] 유역, 쑹화강 지류인 라린허[拉林河] 일대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최근 고고자료를 종합하면 4세기 후반 물길의 중심지는 장광차이링[張廣才嶺]보다 동쪽의 동류 쑹화강 일대로 비정된다. 470년대부터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475년 10월에는 “고구려의 10락(落)을 격파하였다며 백제와 모의하여 수로[水道]를 통해 고구려를 공취하겠다.”라며 북위의 의향을 묻기도 하였다. 그 이후 물길은 장광차이링을 넘어 동류 쑹화강 상류로 활발하게 진출하였는데, 이통허[伊通河] 하류의 후부여가 물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문자명왕 3년(494)에 고구려에 투항하기도 하였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3년 2월조 참조). “부여가 물길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다.”라는 구절은 바로 이 사실을 일컫는다. 그 이후 물길은 동류 쑹화강 상류와 북류 쑹화강 하류 일대를 놓고 고구려와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는 한편, 북위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다. 6세기 중반 이후 물길 대신 말갈이 등장하는데, 말갈을 물길의 후신으로 상정하기도 하지만, 족속 계통은 같지만 주도 집단은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김락기, 2013, 『高句麗의 東北方 境域과 勿吉 靺鞨』, 경인문화사
刘晓东, 2014, 『靺鞨文化的考古学硏究』, 吉林大学 博士学位论文
이종수, 2011, 「三江平原地域 초기철기문화의 특징과 사용집단 분석」, 『高句麗渤海硏究』 41
강인욱, 2015, 「三江平原 滾兎嶺·鳳林 문화의 형성과 勿吉·豆莫婁·靺鞨의 출현」, 『高句麗渤海硏究』 52
여호규, 2018, 「5세기 후반 高句麗·勿吉의 충돌과 북방 接境空間의 변화」, 『中央史論』 47
津田左右吉, 1915, 「勿吉考」, 『滿洲地理歷史硏究報告』 1, 東京帝國大學
池內宏, 1934, 「勿吉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5
日野開三郞, 1946, 「勿吉考」, 『史淵』 35
王乐文, 2009, 「挹娄·勿吉·靺鞨三族关系的考古学观察」, 『民族硏究』 2009-4
范恩实, 2010, 「勿吉兴亡史探微」, 『北方论丛』 2010-1
程尼娜, 2014, 「汉至唐时期肃慎·挹娄·勿吉·靺鞨及其朝贡活动研究」, 『中国边疆史地研究』 24-2
王禹浪・王俊铮, 2015, 「近百年來国內外勿吉硏究综述」, 『哈尔滨学院学报』 2015-11
註 008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 : 부여가 물길에 쫓겨 494년에 고구려에 투항한 사실을 일컫는다.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에는 바로 이어서 “국왕 신 운(雲)이 멸망한 나라를 잇는 대의로 모두 〔고구려〕 경내로 옮겼습니다(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부여의 투항을 받아들인 사실을 말한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3년 2월조 참조).
註 009
작은 술병이 비는 것은 큰 술독의 수치인데 : 『시경(詩經)』 소아(小雅) 요아편(蓼莪篇)의 “술병이 빈 것은 술독의 수치이다(瓶之罄矣, 維罍之耻.)”를 줄인 말이다. 상호의존적이어서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비유한다. 여기에서 작은 술병은 고구려, 큰 술독은 북위를 의미하는데, 부여의 황금과 섭라의 옥이 조공으로 바쳐지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잘못이지만, 북위의 수치로도 이어진다는 뜻이다.
註 010
연솔(連率) : 본래 주대(周代)의 제도로 ‘연수(連帥)’라고도 한다. ‘연(連)’은 ‘10국의 제후’, ‘솔(率)’과 ‘수(帥)’는 이들을 거느린 우두머리를 뜻한다. 연솔은 여러 제후국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북위의 책봉을 받은 고구려가 휘하에 여러 군소 국가나 족속을 거느렸음을 일컫는다.
註 011
세종이 동당에서 …… 라고 하였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에도 나오는데, 해당 내용 가운데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라는 구절만 생략하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 당시 고구려는 나제동맹의 강화로 신라가 세력권에서 이탈하고, 쑹화강[松花江] 유역에서는 새롭게 흥기하는 물길(勿吉)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품을 핑계로 북위의 의향을 타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위 세종은 고구려가 부여나 섭라 등을 거느리며 동방지역에 독자세력권을 구축한 사실을 인정하며, 이를 잘 유지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기사는 고구려와 북위가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상호 세력권을 인정하며 병존정책을 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朴漢濟, 214-216쪽; 노태돈, 336-337쪽). 다만 일반적으로는 고구려가 독자세력권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북위가 이를 인정하였다고 이해하지만(三崎良章; 朴漢濟; 노태돈), 북위가 470년 무렵까지도 고구려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다가 470년대 이후 고구려의 지속적인 무력시위로 인해 북위의 안위가 위협받자 비로소 인정했다고 보기도 한다(이성제, 121-138쪽). 또한 북위가 효문제 시기까지는 고구려에 강경책을 펴다가, 세종 선무제 시기에 내부 사정으로 고구려에 의지하여 동쪽 상황을 규제하려는 유화책을 폈다고 보기도 한다(김진한, 150-152쪽).
〈삼국사기〉
朴漢濟, 1988,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一潮閣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이성제, 2005, 『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 국학자료원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三崎良章, 1982, 「北魏の対外政策と高句麗」, 『朝鮮学報』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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