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4연나와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 ( 190년 09월(음) )

12년(190) 가을 9월에 경도(京都)001001 경도(京都) :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1년(B.C. 9)조 및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년(19) 정월조 참조.닫기에 눈이 6척이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002002 중외대부(中畏大夫)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147) 10월조 참조.닫기인 패자(沛者)003003 패자(沛者)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20년(72) 2월조 참조.닫기 어비류(於畀留),004004 어비류(於畀留) : 고구려 고국천왕 때에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지낸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인물이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于氏)의 친척으로 패자(沛者)의 관등을 지냈다. 평자(評者)인 좌가려(左可慮)와 함께 왕비의 친척임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자식들까지도 다른 사람의 자녀(子女)와 전택(田宅)을 빼앗아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고국천왕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하자, 고국천왕 8년(190)에 연나부의 네 세력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다음해 4월에 왕도를 공격하였으나 진압되었다. 고국천왕은 이들의 모반을 진압한 다음 나부(那部)와 다른 세력기반을 지닌 인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닫기 평자(評者)005005 평자(評者) : 고구려의 관명. 이 기사에서 보듯이 고국천왕 시기의 척신인 연나부의 좌가려(左可慮)가 이 관직을 지냈다. 구체적인 임무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신라전의 ‘육탁평(六𠸌評)’이 6부를 지칭하며, ‘평(評)’의 고대 일본어 훈인 ‘고호리(コホリ)’가 우리말의 고을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 ‘평(評)’이 지역집단이나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今西春秋, 6쪽; 盧泰敦, 4쪽). 실제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고려전의 “내평외평오부욕살(內評外評五部褥薩)”이라는 기사를 통해 고구려 후기에 전국을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고구려 초기의 평자를 각 나부의 부장(部長)으로 보기도 한다(金光洙, 172쪽). 한편「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쟁송(爭訟)의 평의(評議)를 담당한 쟁인(爭人) 집단에 ‘평공(評公) 사미(斯弥)’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평자를 쟁송의 평의를 담당하던 관직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내평과 외평을 내외의 관료를 규찰하는 헌관(憲官)으로 보았다.
〈참고문헌〉
今西春秋, 1971, 「高句麗の城; 溝漊と忽」, 『朝鮮学報』 59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金光洙, 1983,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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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좌가려(左可慮)006006 좌가려(左可慮) : 고구려 고국천왕 때 평자(評者)를 지낸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인물이다. 중외대부(中畏大夫)인 어비류(於畀留)와 함께 왕비의 친척임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자식들까지도 다른 사람의 자녀(子女)와 전택(田宅)을 빼앗아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고국천왕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하자, 고국천왕 8년(190)에 연나부의 네 세력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다음해 4월에는 왕도를 공격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고국천왕은 이들의 모반을 진압한 다음 나부(那部)와 다른 세력기반을 지닌 인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닫기 등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였으며,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그들을〕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椽那)007007 4연나(椽那) : 고구려 초기 5부의 하나인 연나부가 4개 집단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4개 집단의 성격에 대해 연나부 내부의 4개 소부족(孫晉泰, 66쪽), 4가(家; 이병도, 1977: 2012, 293쪽), 낙씨(絡氏)·명림씨(明臨氏)·우씨(于氏)·연씨(掾氏) 등 네 성씨집단(金賢淑, 33~36쪽) 등 혈연집단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지역적 단위정치체로 이해한다. ‘4연나’라는 표현을 통해 고구려 초기의 부[那部]가 여러 지역집단의 상호 통합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에 각 부를 구성하던 하위 단위집단을 ‘부 내부의 부’라는 의미에서 ‘부내부(部內部)’라 정의하고, 연나부의 경우에는 명림씨, 우씨, 대무신왕대에 내투한 부여계 집단 등이 부내부를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盧泰敦, 1975, 29쪽: 1999, 122~127쪽). 그리고 대무신왕 5년(22)에 고구려에 투항한 다음 연나부에 안치된 부여왕 종제의 집단이 1만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연나부를 구성한 하위 단위정치체의 규모가 1만여 명 전후로 본래 삼한의 소국에 비견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余昊奎, 1992: 2014, 196~201쪽).
〈참고문헌〉
孫晉泰, 1948, 『조선민족사개설』, 을유문화사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余昊奎, 1992, 「高句麗 初期 那部統治體制의 成立과 運營」, 『韓國史論』 27
金賢淑, 1993, 「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內 出現人名 분석을 중심으로-」, 『慶北史學』 16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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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다.

註 001
경도(京都) :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1년(B.C. 9)조 및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년(19) 정월조 참조.
註 002
중외대부(中畏大夫)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2년(147) 10월조 참조.
註 003
패자(沛者)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20년(72) 2월조 참조.
註 004
어비류(於畀留) : 고구려 고국천왕 때에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지낸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인물이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于氏)의 친척으로 패자(沛者)의 관등을 지냈다. 평자(評者)인 좌가려(左可慮)와 함께 왕비의 친척임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자식들까지도 다른 사람의 자녀(子女)와 전택(田宅)을 빼앗아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고국천왕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하자, 고국천왕 8년(190)에 연나부의 네 세력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다음해 4월에 왕도를 공격하였으나 진압되었다. 고국천왕은 이들의 모반을 진압한 다음 나부(那部)와 다른 세력기반을 지닌 인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註 005
평자(評者) : 고구려의 관명. 이 기사에서 보듯이 고국천왕 시기의 척신인 연나부의 좌가려(左可慮)가 이 관직을 지냈다. 구체적인 임무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양서』 권54 열전48 동이 신라전의 ‘육탁평(六𠸌評)’이 6부를 지칭하며, ‘평(評)’의 고대 일본어 훈인 ‘고호리(コホリ)’가 우리말의 고을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 ‘평(評)’이 지역집단이나 행정구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今西春秋, 6쪽; 盧泰敦, 4쪽). 실제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고려전의 “내평외평오부욕살(內評外評五部褥薩)”이라는 기사를 통해 고구려 후기에 전국을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고구려 초기의 평자를 각 나부의 부장(部長)으로 보기도 한다(金光洙, 172쪽). 한편「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쟁송(爭訟)의 평의(評議)를 담당한 쟁인(爭人) 집단에 ‘평공(評公) 사미(斯弥)’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평자를 쟁송의 평의를 담당하던 관직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安鼎福)은 내평과 외평을 내외의 관료를 규찰하는 헌관(憲官)으로 보았다.
〈참고문헌〉
今西春秋, 1971, 「高句麗の城; 溝漊と忽」, 『朝鮮学報』 59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金光洙, 1983,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註 006
좌가려(左可慮) : 고구려 고국천왕 때 평자(評者)를 지낸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인물이다. 중외대부(中畏大夫)인 어비류(於畀留)와 함께 왕비의 친척임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자식들까지도 다른 사람의 자녀(子女)와 전택(田宅)을 빼앗아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고국천왕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하자, 고국천왕 8년(190)에 연나부의 네 세력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다음해 4월에는 왕도를 공격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고국천왕은 이들의 모반을 진압한 다음 나부(那部)와 다른 세력기반을 지닌 인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註 007
4연나(椽那) : 고구려 초기 5부의 하나인 연나부가 4개 집단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4개 집단의 성격에 대해 연나부 내부의 4개 소부족(孫晉泰, 66쪽), 4가(家; 이병도, 1977: 2012, 293쪽), 낙씨(絡氏)·명림씨(明臨氏)·우씨(于氏)·연씨(掾氏) 등 네 성씨집단(金賢淑, 33~36쪽) 등 혈연집단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지역적 단위정치체로 이해한다. ‘4연나’라는 표현을 통해 고구려 초기의 부[那部]가 여러 지역집단의 상호 통합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에 각 부를 구성하던 하위 단위집단을 ‘부 내부의 부’라는 의미에서 ‘부내부(部內部)’라 정의하고, 연나부의 경우에는 명림씨, 우씨, 대무신왕대에 내투한 부여계 집단 등이 부내부를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盧泰敦, 1975, 29쪽: 1999, 122~127쪽). 그리고 대무신왕 5년(22)에 고구려에 투항한 다음 연나부에 안치된 부여왕 종제의 집단이 1만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연나부를 구성한 하위 단위정치체의 규모가 1만여 명 전후로 본래 삼한의 소국에 비견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余昊奎, 1992: 2014, 196~201쪽).
〈참고문헌〉
孫晉泰, 1948, 『조선민족사개설』, 을유문화사
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余昊奎, 1992, 「高句麗 初期 那部統治體制의 成立과 運營」, 『韓國史論』 27
金賢淑, 1993, 「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內 出現人名 분석을 중심으로-」, 『慶北史學』 16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주제분류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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