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935) 겨울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소유가 되어 국력이 약해지고 세력이 고립되어 스스로 편안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국토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혹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혹자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天命)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직 충성스러운 신하, 의로운 선비와 합심하여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1,000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세력이 온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이 간장(肝臟)과 뇌수가 땅에 널리는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肝腦塗地] 하는데 이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하여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왕자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기대어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