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청산리독립전쟁
청산리독립전쟁의 첫 전투는 일본군 동지대가 김좌진이 영솔하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공격해 오다가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북로군정서의 반격을 받은 전투이다. 여기서 시작된 전투는 이도구 부근으로 옮겨지면서 1920년 10월 26일 새벽까지 약 6일간 10여 차례의 대소 전투들이 쉴새없이 전개되어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을 패전시키고 이도구와 삼도구에서 철수할 때까지 연속되었다.
여기서 청산리독립전쟁의 개념과 범위의 문제가 대두된다. 즉 삼도구 청산리의 백운평 전투만을 ‘청산리독립전쟁’이라고 좁은 개념을 설정하고, 나머지 전투들도 모두 그것이 일어난 낱낱의 지명에 따라 각각의 독립된 개별적 이름을 붙일 것인가, 또는 삼도구와 이도구 일대에서 벌어진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동지대 사이의 10여 차례의 일련의 전투들을 묶어서 ‘청산리독립전쟁’이라는 넓은 개념을 설정한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일 전자의 협의의 개념을 정립하면, 이것은 곧 삼도구 청산리에서 일어난 백운평전투 하나만을 의미하고 ‘청산리독립전쟁’은 백운평 전투를 수행한 북로군정서 단독의 독립전쟁이 된다. 만일 후자의 광의의 개념을 정립하면 ‘청산리독립전쟁’은 삼도구에서 전개된 백운평전투 뿐만 아니라, 이도구에서 전개된 완루구(完樓溝)전투, 천수평(泉水坪)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萬麒溝)전투, 쉬구전투, 천보산(天寶山)전투, 고동하곡(古洞河谷)전투 등을 포함하게 되고, ‘청산리 독립전쟁’은 북로군정서와 함께 이도구 일대에서 일본군을 패전시킨 대한독립군 등 다른 독립군부대들도 참전하여 공동으로 수행한 독립전쟁이 된다.註 051 여기서는 ‘청산리독립전쟁’에 대한 광의의 개념을 사용하기로 한다.
또한 여기서 광의의 개념을 사용할 때 ‘청산리독립전쟁’과 ‘청산리전투’ 중에서 어떠한 용어가 더 적합한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산리독립전쟁은 크고 작은 다수의 ‘전투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소독립전쟁으로 보아 손색이 없고, ‘청산리전투’라고만 하면 그 안에 포함된 ‘청산리 백운평전투’ 등 다른 ‘전투들’과 혼동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여기서는 ‘청산리독립전쟁’의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한국 독립군부대들을 포위한 일본군 동지대는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600명)을 토벌 섬멸하기 위해서 산전(山田:야마다)토벌 연대를 용정으로부터 삼도구 청산리 방면으로 보내어 10월 20일을 기해서 김좌진부대를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註 052 한편 이도구에 주둔하면서 홍범도의 지휘를 받고 있던 대한독립군(300명)·국민회군(250명)·의군부군(150명)·한민회군(200명)·광복단군(200명)·의민단군(100명)·신민단군(200명) 등의 홍범도연합부대에 대해서는 일본군 동지대의 지대장 동정언이 인솔하는 동지대의 주력이 19일 오전 8시를 기해서 이 도구로 출동하도록 명령하였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천 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여 그 안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를 10월 20일을 기해서 총공격하여 섬멸하려고 작전을 개시한 것이었다.註 053
독립군은 처음에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추격해 들어오면서 한국인 촌락을 통채로 불지르고 선량한 동포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것을 보고 결정을 바꾸어 일본침략군을 공격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청산리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 백운평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최초의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 이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 토벌대의 하나인 산전보병연대를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 부근에서 섬멸하여 최초의 승리를 획득한 전투였다.
일본군이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1920년 10월 20일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피전책을 버리고 일본군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부대를 2개 제대(弟隊)로 나누었다. 제1제대는 ‘본대’로서 비교적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로 편성하여 직접 사령관 김좌진이 지휘해서 제2제대가 잠복한 지점의 건너편 사방정자(四方頂子)의 산기슭에 배치하였다. 제2제대는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의 지휘 하에 사관연성소 학도들을 중심으로 한 300명의 여행대(旅行隊)로서 이를 후위대(後衛隊)로 하여 일본군의 추격에 대항하는 최전면을 담당하되 지리를 이용하여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 골짜기의 목에 잠복케 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이와 같이 병력을 배치한 길목은 청산리 계곡에서도 폭이 2~3리로 가장 좁고 양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으며 그 골짜기의 중앙에는 공지(空地)가 되어, 단 하나의 오솔길이 이 공지를 통과하는 지점이었다. 이 곳은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지형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온 일본군을 이 지점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백운평과 송림평(松林坪) 등 이 근방 마을에 남은 한국인 노인들에게, 독립군이 보잘 것 없는 병력으로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본군의 토벌에 낭패하여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져서 허둥지둥 계곡 끝으로 도망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이를 일본군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 제2제대가 매복한 지형은 공지를 바로 내려다 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였다. 예컨대 이민화(李敏華) 중대가 매복한 우측 지구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金勳)중대가 매복한 중앙정면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깎아지른 절벽이었다.註 054 이러한 절벽 위의 산에 밀림이 울창하여 아름드리의 쓸어진 나무등지가 널려 있으며, 그 위에 담요처럼 두껍게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서 천연적 엄폐물을 만들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제2제대는 이범석의 명령에 따라 소나무 가지와 잣나무 가지로 위장을 하고 앞에 널려진 나무등지를 엄폐물로 하여 두껍게 쌓인 낙엽 속에 전신을 파묻어서 완전히 매복하였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적들도 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김좌진이 거느린 제 1제대도 동일한 전투 준비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완전히 엄폐된 상태에서 매복하여 기습작전을 전개하려고 절벽 아래의 공지를 향해서 총구를 모으고 있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은 바로 하루 전에 독립군부대가 행군해 온 길을 따라 백운평 위의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절벽 밑의 공지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전위부대는 안천소좌가 지휘하는 선발 보병 1개 중대였다. 일본군 전위부대는 백운평을 점령하여 주민들로부터, 독립군이 패색이 짙어 하루 전에 도망했다는 정보를 수집한 다음, 절벽 밑의 꼬불꼬불한 단 하나의 소로를 따라 말똥을 채집하여 온도를 측정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말똥은 하루 전의 것으로 완전히 식고 많이 말라 있어서 독립군이 적어도 하루 전에 이 길을 지나갔음을 분명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일본군 전위중대는 독립군이 일전을 결의하여 돌아서서 매복한 채 대기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공지 안으로 들어섰다.
일본군 전위중대의 전 병력이 공지 안에 모두 들어서고 전면은 북로군정서 독립군 제2제대의 매복 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 10월 21일 오전 9시 독립군은 일시에 기습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 군정서 독립군의 600여 정의 소총과 4정의 기관총과 2문의 박격포의 화력이 일시에 일본군 전위부대의 머리 위에 불을 토하며 쏟아져 내렸다.註 055
일본군 전위부대는 응사를 시도했으나 독립군이 어디에 은폐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으므로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한 응사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20여 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전멸하였다.註 056 이것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획득한 청산리독립전쟁의 최초의 완전한 승전이었다.
전위부대에 뒤이어 도착한 산전토벌연대 본대는 전위중대가 전멸한 것에 크게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해 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준과 목표가 명확치 않아서 화력만 허비하였다. 반면에, 나라를 빼앗기고 설욕의 날을 기다리던 독립군은 사기충천하여 정확하게 조준해서 화력을 퍼부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의 시체는 쌓여 갔다.註 057
일본군은 이번에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하여 독립군을 포위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절벽 위에서 정확하게 조준하여 사격하는 독립군의 공격에 막대한 희생만 내고 패주하였다.註 058
일본군은 이번에는 다시 부대를 정돈해 가지고 매복한 북로군정서 독립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반격해 왔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에서 완전히 은폐되어 있었으므로 일본군이 아무리 중화기로 반격을 해도 효과가 없었다. 반면에 독립군은 조준 사격을 정확히 했으므로 일본군은 여기에서도 계속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일본군 산전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들고 필사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1200~300명의 전사자만 낸 채 더 견디지 못하고 숙영지(宿營地)로 패주하였다.註 059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백운평전투인 것이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백운평전투에서 크게 승전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 갑산촌으로 철수하였다.
(2) 완루구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두번째 전투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그 연합부대들(국민회군·한민회군·신민단·의민단·광복단)이 이도구 완루구에서 1920년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과 대전해서 기계(奇計)를 발휘하여, 다른 일본군 한 토벌대를 끌어 넣어서 일본군 동지대의 한 부대를 섬멸한 대전투였다. 이 전투는 이도구 어랑촌 서북방 북완루구와 남완루구 사이의 삼림지대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완루구전투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발표 하였다.
당시 적의 지대(步兵一大隊, 機關銃三中隊)는 양로(兩路)로 나뉘어서 하나는 남완루구로, 또 하나는 북완루구 서편으로 향하여 아군 제1연대(洪範圖聯合部隊……필자)를 포위공격하려는 중 아군의 동 연대는 정찰척후의 찰보(察報)를 듣고 이미 배치하였던 저항선이 전투를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 예비대는 삼림 중간로를 우회하여 적의 좌우를 돌연히 사격하던 중 북완루로 진격하던 적의 일대는 오히려 아군이 중앙고지에서 자기의 우군(友軍)과 싸우는 줄 오인하고 적이 적군을 맹사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일대는 전멸하였는데 그 수는 400여 명이더라.註 060
이 기록을 주의 깊게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갑산촌으로 철수하는 그 시간에 다른 곳인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일본군 동지대 본대의 대부대가 2개 부대로 나누어 홍범도가 인솔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포위하여 남완루구와 북완루구의 양로로 좁혀들어 오고 있었다.註 061
② 홍범도의 독립군연합부대는 정찰병으로부터 이 보고를 받고 이미 배치한 저항선에서 전투를 시작하는 한편, 예비대로 하여금 삼림의 중간로를 돌아서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③ 북완루구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다른 한 부대는 홍범도 연합부대의 예비대가 이미 삼림의 중간로를 빠져 나와서 측면에 위치하게 된 것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중앙고지의 위치에 있는 것은 일본군의 한 부대임을 알지 못하고, 중앙고지에 있는 것이 여전히 독립군인 줄 알고 중앙고지에 있는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④ 이에 중앙고지에 위치하게 된 일본군은 한쪽 측면에서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군 다른 부대의 공격을 받아 양면의 협공을 받은 결과 전멸 상태에 빠졌는데, 그 일본군 부대의 전사자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
⑤ 일본군이 이 완루구전투에서 한 부대 400여 명이 전멸한 것은 일본군 부대들끼리의 ‘자상(自傷)’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서, 독립군과 다른 일본군 부대의 협공을 받은 결과였다. 또한 일본군끼리의 자상도 독립군의 능동적 유인작전에 빠져 들어 위치를 오인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당시의『진단(震檀)』은 완루구전투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은 요지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즉 ① 일본군이 삼림의 중심지대에 있는 홍범도연합부대를 포위하고 기관총대를 매복시킨 다음 삼림에 불을 놓아 홍범도부대가 탈출할 경우 이를 섬멸하려고 했으며, ② 홍범도연합부대는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어 탈출해 버리고 다른 일본군부대가 홍범도부대를 추격하여 중심지대에 진출한 결과,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기관총대는 이를 홍범도의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기관총으로 섬멸했으며 ③ 홍범도부대는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일본군을 추격하여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註 062 상해 임시정부도 위와 유사한 내용을 등사인쇄물로써 보고하였다.註 063
청산리독립전쟁의 두번째 전투인 완루구전투는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한민회군, 광복단군, 신민단군, 의민단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기계를 써서 이룩한 대승전이었다.
(3) 천수평전투
한편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도구 갑산촌에 도착하여 동포들이 제공하는 차조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을 때, 촌락민 동포로부터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샘물골) 마을에 들어가서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작전회의를 연 결과 천수평의 일본기병대를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이 때 치열한 전투와 허기와 100리의 강행군으로 극도로 피곤해 있었으나 그들은 선제공격이 아니고서는 적을 섬멸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북로군정서는 병사들을 한 시간 정도 잠을 재우고는 다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북로군정서는 10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연성대가 선두에 서고 본대가 뒤에 서서 천수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약 1시간의 행군 뒤에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천수평의 외곽지대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은 도전(島田:시마다) 중대장의 지휘 하에 있던 기병중대 120기로서 독립군이 아직도 100리 밖 청산리 부근에 있다고 착각했음인지 소수외 기병 순찰만 세워 놓고 병력을 촌락 안에 모아 놓았으며 토성 안에 말을 매어 놓은 채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김훈중대로 하여금 북쪽 산을 타고 나아가 민속 한 행동으로 만기구를 점령해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이민화중대로 하여금 천수평 남방 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범석은 2개 중대를 이끌고 천수평 북쪽 냇물 한 복판을 전진하여 냇물 언덕의 사각(死角)을 끼고 천수평 동쪽에 이르면 즉각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려 정면공격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작전대로 이민화·김훈 중대가 지정된 지점에 도달하고 이범석이 이끄는 2개 중대가 냇물을 타고 천수평 동쪽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기병중대의 순찰 보초는 독립군을 발견하고 신호 총성을 울렸다.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이에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10월 22일 새벽 5시 30분경에 일본군 기병중대가 잠자고 있는 촌락과 말을 매어 놓은 토성 안으로 총탄을 퍼부으며 돌격해 들어갔다註 064
일본군은 잠을 자다가 놀라 깨어서 허둥지둥 뛰어나와 응사하면서 말 을 찾았으나, 말은 이미 사살되거나 달아나 버린 후였으며,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독립군의 날카로운 공격에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한 차례의 혼전이 있은 다음에 일본군은 4명이 용케도 말을 찾아 타고 탈출한 이외에는 116명이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 때 전멸당한 일본군은 기병 제27연대 소속의 전초기병중대였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과 부상 17명의 경미한 것이었다.註 065 이것이 천수평전투이다.
(4) 어랑촌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네번째 전투는 10월 22일 오전 9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이도구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고지 남측에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연합부대가 공동으로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한 어랑촌전투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 수색기병중대를 섬멸한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다음 전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천수평에서 도망쳐 간 4명의 일본군 기병이 어랑촌에 설치한 그들의 기병연대 사령부에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에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기선을 제압 하여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서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어랑촌의 서남단 고지’註 066를 선점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서남단의 고지를 선점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을 때 일본군도 얼마 후에 이 고지를 선점하려고 달려 왔다. 그러나 이 때는 이 고지가 이미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선점하에 들어간 후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고지 밑에서 고지 위에 있는 독립군을 공격하게 되고 독립군은 고지 위에서 일본군을 내려다 보며 응전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유리한 점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와 화력의 우세였으나, 불리한 점은 지형이었다. 반면에 독립군의 유리한 점은 선점한 지형 뿐이었고 불리한 점은 화력과 병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였을 뿐 아니라 병사들이 연 이은 격전과 강행군으로 매우 지쳐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본군 동지대의 주력은 어랑촌에 진을 치고 이 근방의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고 있었으므로 어랑촌 부근의 일본군 병력은 무려 5천 명이나 되었으며, 기병연대나 포병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동지대 예비대까지 가담하였다. 반면에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그 동안의 전사자·실종자·낙오자로 말미암아 어랑촌전투 때에는 600명을 하회하였다.
일본군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기병 연대장 가납(加納:가노) 대좌의 지휘 하에 연대 병력으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포위하여 22일 오 전 9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유리한 지형에서 기어올라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부근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부대들을 모두 불러 모았으므로 일본군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 수록 증가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를 전사할 자리라고 각오하고 혈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연대병력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한 포위 공격은 그 들의 뜻과 같이 전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완루구전투를 치루고 서방으로 이동하던 홍범도연합부대가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혈전을 전개하고 있는 지구로 이동해 왔기 때문이었다.註 067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 부대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일본군 연대병력에 포위되어 혈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 이를 지원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홍범도가 거느린 독립군연합부대의 병력은 1천 400명에 달하는 막강한 것이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선점하고 있는 고지 바로 옆의 최고표고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맹공격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포위했던 대병력을 나누어 홍범도연합부대의 독립군과도 전투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나 홍범도연합부대 독립군이나 모두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독립군과의 한 차례의 전투에서만도 격전 후에 300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공격이 둔화되었다.註 068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일본군은 기병대로 천수평 서북방 고지를 따라 독립군부대들의 측면을 공격하고, 정 면에는 포병과 보병으로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전투는 치열해졌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전투가 해가 기울 때까지 그칠 줄을 돌랐다. 독립군 병사들은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에 부근 촌락의 동포들이 주먹밥을 지어 가지고 왔다. 독립군 병사들은 밥먹을 틈도 내지 못하여 동포들이 전투 중에 있는 병사들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 주는 형편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치열했으나,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부대들은 동포들의 성원에 한층 더 사기충천하여 더욱 용감하게 응전하였다. 독립군의 투지가 얼마나 충천했는지 하나의 사례를 들면, 북로군정서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崔麟杰)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스스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고 몰려 올라오는 일본군을 집중 사격하여 패주시킨 후에 기관총 탄환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註 069
만주의 초겨울 짧은 해가 져서 고지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일본군의 공격은 약화되었으며, 독립군은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홍범도연합부대가 있는 고지의 최고표고로 집합시켜서 추격하려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어둠을 타 다시 부대를 나누어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어랑촌전투는 일단 종결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어랑촌전투에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다 함께 참가했음을 확인하여 공표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① 김좌진부대(북로군정서)는 어랑촌 후방 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홍범도부대(독립군 연합부대)는 같은 고지의 최고표고에 위치하여 지원대의 임무를 하였고, ② 일본군과의 전투에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각각 좌고지와 우고지에서 맹렬한 사격을 하여 모두 참가했으며, ③ 독립군은 지형이 유리하여 승리했고, ④ 철수할 때에는 홍범도부대가 이미 점유한 그 고지의 최고표고에 김좌진부대가 합류하여 일단 공동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부대를 나누었다고 하였다.註 070
또한 일본군측의 비밀자료도 어랑촌전투에서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다같이 참가하여 자기들 군대와 전투를 했다고 보고하였다.註 071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랑촌전투를 비롯한 청산리독립전쟁의 전투들에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구조적으로 매우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지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홍범도부대가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 사이에 완루구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에, 김좌진부대가 10월 22일 새벽 5시 30분경에 천수평 부근의 일본군 수색기병중대를 기습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부대 이동을 가져와 홍범도부대의 포위망 탈출과 부대 이동을 용이하게 하여 완루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지원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어랑촌의 서남단 고지에서 김좌진부대가 5배 이상 병력의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을 때에 ‘완루구전투’를 치르고 나온 홍범도부대가 바로 김좌진부대(복로군정서)가 선점하고 있는 고지의 최고표고를 점령하여 일본군과 싸워 주었기 때문에 북로군정서도 포위망이 풀리고 패전을 면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승전했으며, 홍범도부대도 승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랑촌전투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다 같이 참전했기 때문에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였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일본군은 어랑촌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비롯해서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는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600명으로 발표했으며, 중국 관변(官邊)은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300여명이라고 추산하였다. 박은식(朴殷植)에 의하면,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에도 이도구전투에서 가노 연대장을 비롯하여 대대장 1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병사의 사상자가 800여 명에 달했다고 보고하였다고 한다.註 072
상해 임시정부는 어랑촌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전사자를 300여 명이라고 발표했으며, 부상자의 추계는 내지 않았다.註 073 이범석은 이 전투에서의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가노 연대장을 포함하여 약 1천명이라고 하였다.註 074
한편, 독립군측도 그 동안의 전투 중에서는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註 075 이범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만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註 076
일본군은 그들의 모든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배시켰다고 하면서도 어 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註 077
청산리독립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는 결국 독립군의 대승리로 귀결된 것이었다.
(5) 맹개골전투
1920년 10월 22일의 어랑촌전투를 끝내고 이튿날인 23일 아침부터는 독립군부대들은 안도현 황구령(黃口嶺) 방면을 향하여 소부대를 편성해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한 그날 밤에는 만록구(萬鹿溝 ; 별칭 完樓溝)의 삼림 속에서 노영을 하고 다음날인 10월 23일 아침 ○령 방면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작은 보대들로 병력을 나누고 길을 나누어서 하오 3시경 ‘맹개골’ 삼림 속을 통과할 때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곧 삼림의 변두리에 매복했다가 일본군이 접근해 오자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일본군 기병 10여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전리품으로 군마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장구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註 078
(6) 만기구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맹개골전투를 거친 후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만기구 후방 삼림 속에서 휴식 중일 때 전방 약 100미터의 지점에서 일본군 보병 약 50명이 밀집하여 서서히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당시 소부대들로 나누어 행군하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것이 뒤따라 오는 독립군인지 일본군인지 판별하지 못하고 사령관 김좌진이 큰 소리로 “아군인가?” 하고 소리쳐 물었다. 일본군은 이 소리를 듣고 즉각 산개하여 전투 태세를 취하므로 독립군은 그제야 그것이 일본군인 줄 알고 일제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30여 명을 즉각 사살하고 나머지 적을 패주시켰다.註 079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얼마 후에 일본군 200여명이 패주한 자기 부대를 찾아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했으나, 독립군 자신의 행군 예정을 지키기 위하여 전투를 피하고 후방 삼림 속으로 들어가서 숙영하였다.
(7) 쉬구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10월 23일 밤을 삼림 속에서 숙영한 다음 24일 아침 ‘쉬’구로 향하였다. 이 때 일본군 기포 6문과 보병 100여 명이 방심한 채 촌락의 전방을 통과하여 독립군 50명이 행군하고 있는 삼림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 50명은 즉각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군 포병을 모 두 섬멸하고, 동시에 뒤따라오는 보병을 다수 살상하여 패주시켰다.
또한 마침 이 때 삼림의 좌편으로부터 일본군 기병 1개 소대가 나타나서, 말은 촌락에 매어 두고 산개하여 삼림 쪽으로 올라왔다. 독립군은 이를 발견하여 약 20분 동안 공격을 가해서 이를 대부분 섬멸하고, 기갈이 심하므로 전투를 중지한 채 삼림 속으로 돌아갔다.註 080
(8) 천보산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의 독립군연합부대는 10월 24일과 25일에 천보산 남쪽 부근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였다.
이범석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한 부대는 10월 24일 8시와 9시 두차례에 걸쳐 천보산 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를 두 차례 습격하였다.註 081 일본군이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대 1개 소대의 긴급 증원을 요청하고 있는 곳에서도 그들이 패전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홍범도연합부대에 속한 한 독립군부대는 10월 25일 새벽 식량 조달을 위하여 천보산 부근에 나갔다가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註 082 독립군의 천보산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경악하여 이에 대비하도록 부근에 있는 일본군 보병 1개 대대를 긴급히 천보산에 증파하였다.註 083
일본군이 천보산에 긴급히 1개 대대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에서, 천보산전투에서의 일본군의 큰 피해를 알 수 있으나, 일본군측에서는 정확한 전사자와 부상자의 통계는 발표하지 않았다.
(9) 고동하곡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고동하의 골짜기에서 1920년 10월 25일 한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일본군이 홍범도부대를 야습했다가 도리어 반격당해 쫓겨서 패주한 전투였다.註 084
당시 일본군의 보고를 정리해 보면, ① 일본군은 홍범도부대를 찾아 밀림 속에 들어가 헤매다가 10월 25일 밤 10시경에 고동하 골짜기에서 천신만고 끝에 홍범도부대의 연기를 발견하고 정각 12시에 일본군 150명 이 먼저 반야(飯野 ; 이이노) 소좌가 이끄는 2개 소대를 앞세워 야습을 돌격전으로 감행하였다. ② 그러나 홍범도부대는 대비가 되어 있어서 가까운 지점에서 여러 곳에 산개하여 매복해 있다가 응전과 반격을 단행하였다. ③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여 부근의 최고봉인 1743고지에 쫓겨 올라가게 되었다. ④ 일본군이 홍범도부대에게 쫓길 때에는 제2선에 있던 예비대가 홍범도부대의 공격을 막는 제1선을 담당하였다. ⑤ 1743고지에 쫓겨 올라온 일본군장교와 병사들은 패잔으로 전전긍긍하다가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아오자(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얼굴에 희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註 085
일본군은 독립군을 얕보고, 150명의 소부대로서 낮에도 일본군은 생소하여 들어가기 어려운 밀림 속에 밤중에 겁없이 들어가서 먼저 야습을 감행했다가 일본군보다 2배나 병력이 많으며 밀림전에 숙달된 홍범도부대의 매복작전에 걸려 45분간의 격전 끝에 제1선을 맡았던 2개소대가 거의 전멸되고 패잔병들이 홍범도부대에게 쫓기어 1743고지로 도망해 올라왔다가 날이 새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청산리독립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고동하곡전투는 밀림유격전에 능숙한 홍범도부대가 제발로 밀림 속으로 찾아 들어온 일본군 150명의 토벌대 중에서 2개소대(약 100명)를 섬멸해버린 전투였다.
고동하곡전투를 마지막으로 하여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의 독립군은 10월 26일 낮부터는 안도현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단 멈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에 걸쳐 숨가쁘게 전개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청산리독립전쟁은 한국 독립군의 대승리로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註 055
註 071
註 082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