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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주에서의 한인 정당과 군사조직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진영은 3부통합운동에 대한 노력이 전개되는 시기인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와서는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으로 재정비된다. 그러나 정당의 초기 조직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심한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1930년 이후에는 공산주의운동이 극좌화 하여 민족문제 보다는 계급모순을 우선시하여 계급지상주의로 나아가면서 더우기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에 참여함에 따라 민족주의 진영과는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적 차원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공산주의 이론이 이제는 이데올로기화 하여 한민족의 전체적인 항일역량을 저하시키게 된 것이다.
즉 한인 공산주의운동자들이 중국공산당에 참여하고 민족주의 진영의 운동자들이 중국 국민당과 연계됨에 따라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은 통일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국제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진영을 공격하고 이에 민족주의 진영도 공산주의 진영에 대항하게 되어 상호간에 무력충돌까지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이 초기에는 공산주의자들도 포함하고 있던 만주의 민족주의 정당인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은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민족주의 정당으로 조직을 재정비하는 일이 최초로 봉착한 중요과제였다. 그러나 한편 한·중 연합전선 형성의 가능성은 계속하여 모색되어 나가다가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제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1)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조직과 활동
조선혁명당은 3부통합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직하게 된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임에도 불구하고 조직 초기에는 좌파적 경향을 상당히 많이 지니고 있었다. 창당시에 발표된 조선혁명당의 선언은 이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세계정세를 분석하면서, 세계 제국주의가 자체모순에 의한 상호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기파멸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세계 제국주의의 제2차 충돌은 제국주의의 최후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세계혁명의 전야에 이르고 있으며, 이에 조선혁명은 세계혁명과 일환적(一環的) 관계로서 전세계 약소민족 및 무산계급운동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제국주의의 아성을 향하여 맹진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국내 혁명운동에 대한 평가에서는 3·1운동이 자본제국주의에 대한 해부적 이론에 기초하여 혁명적 의식과 강고한 단결 그리고 조직적 체계를 갖지 못한 채 반봉건적 애국사상과 유림의 보수적 충절주의(忠節主義)의 영도하에 이민족(異民族) 감정의 배타적 관념이 동력이 된 기분(氣分)적, 비조직적 운동이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반동적 폭압에 의해 혁명운동이 압살당하고 있으며 일본 독점자본의 철저한 경제적 수탈에 의해 민족경제가 파탄의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에 조선혁명은 노동자·농민·도시직업자·지식인 등 혁명전위분자의 단결과 전세계 피압박민족 및 무산계급의 혁명역량과 단결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해야 하며 그 혁명의 제1목표는 사회주의혁명으로 향하는 노농민주주의혁명(勞農民主主義革命)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註 046
이와 같이 조선혁명당의 창당선언이 좌파의 논리로서 일관되고 있는 것은 당시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따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운동 내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으며 또한 만주 한인사회의 대다수는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좌파논리의 수용이 선전적 차원에서 보다 유리하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조선혁명당 내부에서도 명백한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던 인사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것은 1930년 8월에 국민부의 근거지인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汪淸門)의 남만학원(南滿學院)에서 개최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註 047
1. 국민부를 적극 유지할 것
2. 혁명군은 5대로 나누어 1대의 군인을 30명씩으로 하여 중대제(中隊制)로 할 것.
3. 인선
제1중대장 김보안
제2중대장 양서봉
제3중대장 이윤환(李允煥)
제4중대장 김문거(金文擧)
제5중대장 이종락(李鍾洛)
4. 국민부 의무금
국민부는 의무금을 매호 평균 은(銀) 6원(元), 지방비 7원, 구비(區費) 3원, 교육비 약간을 징수한다.
5. 국민부 사무원 보수
국민부의 사무원 등 월급은 1개월 1인 현은(現銀) 40원으로 한다.
이상의 결의사항에 뒤이어 현익철·현정경·고할신·이웅·이진탁·이장청(李丈淸)·이성근(李成根)·김문거·양서봉·고이허·김석하·양하산(梁河山) 등이 신빈현의 삼흥공사(三興公司) 내에 집합하여 조선혁명당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앞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제문제를 다시 토의하였는데 여기서 분파가 생긴 것이다. 즉 현익철·양서봉·고이허·김문거·양하산 등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여 이상의 제결정을 실행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비하여 고할신·김석하·이진탁·이웅·현정경·이성근·이장청·이동림 등은 이를 반대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한 인사들의 주장은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은 이미 민심을 이반한 반동단체이므로 단연 이를 해체하여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계급혁명의 전위인 동시에 재만 200만의 조선 농민을 계급적으로 영도하기 위하여 만주에서의 운동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군대는 적위군(赤衛軍)으로 편성하여 농민은 농민협회(農民協會)를 조직하여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註 048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파는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의해 만주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극좌화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이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에는 이론투쟁의 범위를 넘어서 무장충돌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반대하던 인사들은 국민부 타도의 계획을 세우고 조선혁명군 중 국민부에 반대하는 군인들로 하여금 국민부 간부 암살 명령을 하는 한편, 국민부의 지반을 약화시킬 방책으로서 현지 주민들을 선동하여 국민부를 이탈하게 하였으며 ML파 공산주의자와 연합하여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국민부를 지지하던 인사들도 자파의 군인을 집결시키는 한편 중국국민당과 연합하여 공산주의자에 대한 공격에 전력하게 되었다.註 049
이러한 무력적 대립은 국민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에 의해 먼저 구체화 되었다. 그들은 1930년 8월 15일 국민부 타도의 방책을 협의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註 050
1. 흥경 및 왕청문에 주재하는 중국 군대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이진탁이 그 책임을 진다.
2. 관동(寬東)과 관서(寬西)지방 농민 및 군대를 국민부에서 이탈시킬 것. 그 임무 책임은 김석하
3. 무본(撫本)지방의 농민 및 군대를 국민부에서 이탈시킬 것.
4. 청원(淸原)지방으로 나가 중국공산당과 협의할 것. 연락자는 고할신·이웅
5. 흥경 일부 농민을 선동하여 반국민부 운동을 야기시킬 것. 책임자는 현정경·이동림
이와 같은 결의에 따라 흥경 북방의 황구(黃溝)에서 농민 100여 명을 동원하여 같은 해 8월 20일 경에는 흥경의 국민부로 진공하게 되었고, 국민부를 지지하는 인사들은 이를 중국 군경에 알려 이동림 등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민부측은 1930년 10월 초순에 중국인 왕복산(王福山:왕청문의 유력한 중국 국민당원)과 국민부의 김학규(金學奎)·장신규(張信圭) 등을 봉천성 당국에 보내 공산당 타도를 위해 중국 당국과 협의하였으며 9월 20일 경에는 조선혁명군을 통해 국민부를 반대하던 주하범(朱河範)·김창룡(金昌龍)·김이택(金利澤) 등 3명을 암살하게 되었으며, 이에 국민부를 반대하던 측에서는 10월 4일 왕청문의 국민부 근거지를 습격하여 국민부 간부 김문거를 총살하였다.註 051
이외에도 많은 파쟁들이 발생하였으나 마침내는 국민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은 당시 중국국민당과 연락하여 공동 항일전선을 폈으며 반국민부 세력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연결되면서 점차 그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혁명당은 완전한 민족주의 정당으로 재편되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1931년의 3·1운동 13주년 기념일에 즈음한 국민부의 성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註 052 여기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200만 재만한인들을 노예화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또한 주구기관을 통해 혁명운동자와 농민을 암살하고 있는 바 이들 주구배들을 통해 공산주의자동맹(共產主義者同盟)·ML·화요(火曜)·경성(京城)·상해 등의 공산당을 위조해 재만조선인 혁명진영을 분열·파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공산주의운동이 모두 일제의 주구기관에 의해 조종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일제의 사주에 의해 공산주의운동으로 위장된 것도 있었다.註 053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이 제국주의 일본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조선혁명당은 공산주의자와 일제를 동일시함으로써 중국 당국과 민족주의진영과의 협동전선을 공고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 진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파괴와 폭동이 행해지자 당시의 중국인들은 재만조선인 전체가 일제의 만몽(滿蒙) 침략의 선봉대 또는 러시아 적색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속단하였다. 따라서 한인 전체를 축출하려고 하는 등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이 좋지 않게 전개되었다. 중국인의 이러한 나쁜 감정을 오히려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배일감정으로 무마하고 한·중 연합전선을 강화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따라서 조선혁명당은 좌파적 색채를 완전히 탈피하고 민족주의 정당으로 재편되어 갔던 것이다.註 054
한편, 공산주의에 인사들이 탈당할 당시의 조선혁명당의 조직상황을 보면 우선 중앙당부를 국민부의 소재지인 요녕성 신빈현에 두었고 이종락·김광렬(金光烈) 등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혁명당 길강성지휘부(吉江省指揮部)에 대항하기 위하여 길림성과 흑룡강성(黑龍江省)을 통할하는 길흑특별위원회(吉黑特別委員會)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지방조직으로는 동삼성 각 지방에 각 성당부(省黨部)와 현당부(縣黨部)를 두어 100여 개소의 지당부(支黨部)를 가졌으며 국내에까지 조직을 확장하여 평안·황해·강원·충청·전라·경상도 등의 각 도에도 지당부를 설치하였다.註 055
그러나 조선혁명당의 실질적인 항일독립 운동의 전개는 조선혁명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혁명군은 국민부 창립시에 정의부의 소속부대 6개대를 흡수하여 새로 20개대로 증가된 것으로 국민부 산하에 있었다. 이때의 조선혁명군은 원래 국민부의 지반이었던 흥경·유하(柳河)·무본·관전 외에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의 지반이었던 통남(通南)·환인(桓仁)·즙안 등지에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 조직과 활동구역을 표로 나타내면 〈표 1〉과 같다.註 056
이렇게 조직된 조선혁명군은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1930년 9월 20일)를 통해 그 지휘권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으로 이전되었으며 1930년 12월에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그 소속혁명군이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혁명군은 그 체제가 재정비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註 057
1. 조선혁명군은 독립하여 혁명사업에 종사하고 무기는 혁명군인만이 휴대하기로 한다.
2. 혁명군의 지도기관으로서 각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군사위원으로 선임하여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수는 14명으로 한다.
3. 군사위원회에서는 책임자 3명을 선정하여 그 명칭을 혁명군 총사령·부사령·참모장이라 한다. 인선한 결과 총사령 이진탁, 부사령 양서봉, 참모장 이웅이 선임됨.
4. 군대는 종전의 10개 대를 7개 대로 편성하며 그 주둔지는 다음과 같다.
제1대 관동·관서지방
제2대 환인·즙안지방
제3대 통화·임강지방
제4대 유하·홍경지방
제5대 해원(海原)·무순(撫順)지방
제6대 개동(開東)·반석·길림지방
제7대 동만(東滿)지방
5. 혁명군인은 군규(軍規)를 엄수하고 군대 책임자의 성명은 물론, 군대행동에 대하여는 절대 비밀을 엄수한다.
〈표 1〉 조선혁명군의 조직과 활동
〈표 1〉 조선혁명군의 조직과 활동
 대명(隊名)대장명부하수활동구역
제1반제1대이동훈(李東勳)9관동·관전
제2대장호(張浩)10무본·흥경
제3대이윤환12환인현 이차구
제4대안홍10즙안현 화전자
제5대양서봉12흥경현 왕청문
제6대백운반(白雲班)9유하현 삼원포
제2반제10대김경근(金敬根)10장백(長白)·임강(臨江)
편의대(便衣隊)권용익(權用益)17즙안현마의하횡로(磨蟻河橫路)
장도백(張道白)15통화현강전자(江甸子)두도구(頭道溝)
양유식(梁有植)17즙안현협피(夾皮)장강(長崗)
별동대(別動隊)박대호(朴大浩)15환인현노흑산(老黑山)횡도천(橫道川)즙안현신개하(新開河)
한편 조선혁명군은 창군선언서를 통해 “종래의 조선혁명군이 혁명과 자치를 혼합 병행하는 정치권력적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혁명적 역할을 전일적(專一的)으로 수행할 수 없었고, 또 혁명군 자체가 자격구비를 하지 않아 군중과의 접촉이나 감정상의 소격(疏隔)을 가져온 바가 있었음을 반성하면서, 국민부는 순전한 주민 자치단체로 변체하고 조선혁명군은 군사적 임무만 전담한다”註 058고 전념할 임무를 작성하였다. 이와 함께 현단계에서의 조선혁명군의 임무로서 첫째 재만조선인 대중에게 혁명의식을 주입하고 군사·기술을 보급시켜 혁명전선의 기본 진영을 확립하고, 둘째 정치학식과 군사기능이 실제 단체의 정치운동에 적임될 수 있는 기간에 인재를 양성하고, 세째 국내외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건설을 파괴하고, 그 주구배의 기관을 청소하며 기타 일체의 반동적 악세력을 박멸하여 대중의 당면 이익을 옹호하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직된 조선혁명군은 먼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930년 1월에는 파벌광으로서 주구화한 반혁명집단 재만 ML파를 철저히 박멸하기 위하여 「전조선 피압박 대중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ML파 공산당의 악행을 열거하는 선전인쇄물을 배포하고 다시 1930년 2월 15일자의 「신형 주구 ML 잔당의 죄악을 들어 재만 피압박 대중에게 격함」이라는 유인물을 통해 “ML파라는 자들은 선민부(鮮民府) 잔당 김영제(金永濟) 등 수 명과 통모하여 조선총독부 복도(福島:후꾸시마) 통역관으로부터 무기 40정을 받아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하며 반혁명 음모를 하고 있으므로, 이를 박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註 059 이와 함께 1930년 3월 14일에는 유하현 삼원보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습격하여 ML파 요인 한청옥(韓靑玉)·최중희(崔重熙)를 사살하기도 하였다.註 060 또 6월 11일에는 유하현 납자구(拉子溝) 지방에 있는 공산계의 표현단체인 한인청년총동맹(韓人靑年總同盟)·주중청년총동맹(住中靑年總同盟)을 공격하였다.註 061 1930년 8월에는 국민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되자 이를 축출하고 이전에 세력권 내에 있었던 길림 이북지방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수복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은 조선혁명길흑별동대를 배치하였다.註 062
한편 항일운동의 면에서는, 1929년 11월 이래 국내에서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전개되자 조선혁명군 명의로 1930년 1월에 “학교에서 공장에서 성촌도비(城村都鄙)에서 분화와 같이 폭발한 전조선 피압박 민중의 혁명적 동원! 궐기! 자유인이 되느냐 죽느냐의 분기점이므로, 거국일치 혁명전선에 용감하게 진출하여 싸우자!”라고 하는 제목의 유인물을 작성하여 동참을 호소하였다.註 063 또한, 1929년 여름 이래로 소정의 군복·군모·부속품 일체를 새로 만들고, 또 종래에 가졌던 무기 이외에 신식무기를 새로 다량 구입하여 항일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주구기관화된 통화·환인 등지의 한교동향회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민중대표 4명을 압송하려 하자 농민 600여 명과 함께 300여 명(일제측 기록)의 조선혁명군이 그 호송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註 064
이와 같이 항일의식을 키워온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만주사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항일전선에 임하게 되었다.
(2)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조직과 활동
만주에서의 한국독립당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적다. 당의 강령이나 선언문도 아직까지 발견된 바가 적으며 특히 만주사변 이전의 당이나 군의 활동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일본측의 기록들은 한국독립당 자체를 부인할 정도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북만주에서의 한국독립당이 비밀결사적 조직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자인 김좌진이 무정부주의 세력을 포용하고 여기에 공산주의자들과의 파쟁이 발생함에 따라 그 활동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김좌진과 무정부주의 세력과의 연결은 한족총연합회에서 나타난다. 만주에서 조직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의 책임비서 김종진(金宗鎭)이 김좌진의 재종제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겠으나 독립운동 중의 많은 파쟁이 그를 무정부주의에로 주목하게 하였다고 보여진다. 김종진은 김좌진에게 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에 깊은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하여 농촌 자치조직의 계획안을 제시한 바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농민의 조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자신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단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창의적 조직이야 말로 공고한 투쟁체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니, 종래의 교포들의 조직이란 것은 일부 식자간(識者間)에 결속된 것이어서 대중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력있는 저항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농촌조직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도자들 중심의 것으로 실생활과 직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칭은 어떠했든지 사실에 있어서는 농민자신들의 조직은 아니었다.註 065
라고 자치조직을 강조하였다. 김좌진은 이 계획안을 기초로 하여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하였는데, 조직 자체의 안전보장과 항일무력투쟁은 종래의 신민부 세력이 담당하고 재만동포의 사회적 조직과 대내외의 정신적 무장은 무정부주의연맹이 담당하게 하였다.註 066
이때의 한족총연합회의 조직 대강은 한족총연합회로 하여금 재만한족의 정치적·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항일 구국 완수를 위해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안으로 ① 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및 유랑방지와 집단부락 촉성, ② 영농지도와 개량·공동구판매·상조금고설치를 목적으로 하는 협동조합사업, ③ 교육·문화사업·소·중학의 설립운영·각 부락 자치제의 연락·생활개선 및 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기관지 간행·순회강좌·순회문고·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 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 군사훈련, ⑤ 중학 출신자로서 군사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 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 항일 게릴라 부대의 교육·훈련·계획·지휘와 지방 치안을 위한 지방자치단체 소속의 치안대 편성·지도를 위한 통솔부의 설치 등을 정하였다.註 067
그러나 김좌진장군 피살사건註 068에서 나타나듯이 이 시기에는 국내외에서 아나키즘운동자들과 공산주의운동자들 간에는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세력확장 과정에서 무력충돌까지 나타나게 되었다.註 069 당시의 중국 신문註 070에 의하면 만주에는 200만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친일파·안분(安分)파·독립당·공산당으로 분류되었으며 이들 간에는 상쟁이 계속되었다. 이 때 소련은 한인공산당을 이용하여 북만 적화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백력(伯力)에서 원동공산당대회(遠東共產黨大會)를 개최하고 치타〔赤塔〕에 원동적화정책실시위원회(遠東赤化政策實施委員會)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김로포(金魯布)에게 20만원을 추진경비로 주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련이 만주의 한인을 이용한 이유는 첫째, 한교들은 모두 일본의 압박에 의해 만주에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중국인들보다 혁명정신과 반항정서가 많았고, 단결만 한다면 20만의 장정은 족히 소집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둘째로는 한인들이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유랑생활을 하며 경제가 곤궁하나 은혜와 의리로써 단결하고 금전으로 준비한다면 생명을 걸고 계획을 추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한국독립당을 파괴하고 그 권위를 실각시키며 단체를 해산시키고, 이와 병행하여 독립당의 수령을 암살하기로 하였다. 1930년 7월 중순에는 180여 명의 한인 공산당이 합수선(哈綏線) 해림참(海林站)의 한국독립당 본부를 습격하였다. 이를 영안현의 중국군이 알고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는데 이후 독립당과 공산당의 알력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측의 자료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파쟁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관헌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한인민족주의자들을 이용하였으며 이에 민족주의자들은 무고한 한인을 체포하고 많은 액수를 수뢰(收賂)하였다는 것이다.註 071 그러나 일제측의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바도 적지 않다. 우선 일제측은 한국독립당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한국독립당의 표현기관인 한족농무연합회의 결성 연도에 대해, 김좌진 사후 한족연합회 군사부 별동대원들이 1930년 4월 하순에 산시참(山市站)에서 결성했다註 072고도 하며, 1930년 말까지 한족총연합회는 해림에 근거를 두었으나 간부들의 무능 주민반감 등에 의해 1931년 1월에 해체되고, 박래춘(朴來春)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이것이 3월에는 농민당(農民黨)으로 이후에는 테러단으로 조직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註 073고 보고 있다. 즉 일제의 정보망으로 제대로 추적이 곤란할 정도로 한국독립당은 비밀을 유지했다고 생각되며 이에 따라 일제측은 한인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에서 조직적 연계성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한족총연합회의 간부인 남대관과 권수정(본명은 李宗寧) 등은 중국측과 협력하여 공비토벌에 나선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나 그 이외의 활동들에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권수정은 1930년 4월에 길림 우마행에서 민생의원(民生醫院)을 개업하였으며 여기에 남대관도 참여하여 민족운동 기관을 준비하기 위해 우마행에 길림신보주비처(吉林新報籌備處)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무장대오를 유지하면서 친일 주구배들에 대한 응징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한국독립당 계열의 인사들이 중심적 활동으로 삼은 바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이후의 한·중관계로 이 사건이 일본인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중국의 배일사상을 고양시키는 한편 한·중연합전선의 토대를 형성하였다.註 074 만보산사건 이후 발표된 만주 한인단체의 「중한 민중에게 고하는 글」〔告中韓民衆書〕註 075에서는 일제의 음모를 잘 폭로하고 있다. 일제는 ①중·한 양민족의 친선결합을 파괴하고 ②만주 한교의 혁명세력을 파괴하며 ③한교로 하여금 만몽침략의 선구가 되게 하는 등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출동의 구실을 찾기 위해 중국인의 만철(滿鐵) 회수운동을 방지하고 중국내에 영사재판권을 연장할것·일화(日貨)의 수입면세권 획득·상조권(商租權)의 실현·이간선(二幹線) 실시·동북 철도정책 파괴·동북 질서유지권 탈취 등의 구체적 정책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중·한 양민족의 혁명역량을 단결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한·중 양민족을 이간시키려던 일제의 음모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에 의해 여실히 폭로되고 오히려 한·중 양민족의 대일 공동전선을 형성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註 046
姜德相編, 『現代史資料』제29권(東京 : みすず書房, 1972), pp.669~672.바로가기
註 04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83.바로가기
註 0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84.바로가기
註 04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76.바로가기
註 05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84.바로가기
註 05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85.바로가기
註 05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625~628.바로가기
註 053
「韓國黨人在東北暴動」, 『中央日報』(南京, 1930. 8. 11), 秋憲樹編, 앞 책, pp.1586~1588.바로가기
註 054
그러나 조선혁명당이 만주지방의 민족유일당이라는 위치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에도 조선혁명당은 ①전민족의 각 계층·계급을 망라하여 민족적 대당을 결성한다. ②전민족의 투쟁중 계급적 사회적 투쟁을 포함시킨다. ③反일본제국주의적 요소를 지닌 각 계급의 개별적 요소들을 파악하여 연대를 공고히 하며 이로써 공동의 협동전선을 공고히 한다. ④민족적 대당에서(사회주의 운동에 반대하여) 민족운동의 영도권을 유지한다. ⑤조선의 민족운동으로 하여금 세계의 피압박 군중의 해방운동을 철저히 수행하게 하여 피압박 민족해방운동동맹을 이루게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민족주의적 색채를 더욱 강화하면서도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운동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민족유일당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印維廉, 「朝鮮抗日史」,『日本評論』第三卷 第二期(南京 : 日本硏究會, 1933. 11. 1), 秋憲樹編, 『資料韓國獨立運動』제1권, pp.54~55.바로가기
註 055
蔡根植, 앞 책, p.153.
조선혁명당 길강성 지휘부는 조선혁명군 제9대장 이종락이 군을 이탈하여 前동아혁명군 수령인 金光烈과 제휴하고 1930년 8월 중에 조직된 것으로 哈長線陶賴昭를 근거로 하여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中共黨 측과 연락을 취하면서 국민부 및 기타 민족주의 단체에 대항하였다. 11월에는 공산주의 단체임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혁명군 사령부로 개칭하였으며, 간부들이 체포당한 후인 1931년 3월에는 世火軍을 조직하였고 5월에는 이를 東方革命軍이라 개칭하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601~603). 김광렬과 이종락은 1931년 1월 말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中央日報』 1931년 2월 7일자, 秋憲樹編, 앞 책, p.1589).바로가기
註 05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23~425. 여기서 조선혁명군 제2반의 제7대·8대·9대는 길림성 내에 있는 것으로서 생략되어 있다.바로가기
註 05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78~479.바로가기
註 0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59~460.바로가기
註 05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80~481.바로가기
註 06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82.바로가기
註 06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620~621.바로가기
註 062
별동대장은 文學彬, 제1소대장 文時鉉, 제2소대장 金玄宇, 제3소대장은 玄智根 등이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599).바로가기
註 06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81.바로가기
註 0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35~443.바로가기
註 065
李乙奎, 『是也, 金宗鎭傳』(1967), p.56.바로가기
註 066
金昌順, 「한국獨立軍 결성 前夜 : 滿洲·露領에서의 鬪爭」, 『한국일보』, 1987년 4월 29일자.바로가기
註 067
韓國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韓國 아나키즘運動史』(螢雪出版社, 1980), p.325.바로가기
註 068
사건 초기 중국 측의 신문은 이를 日本人에 고용된 韓人의 소행이라고 전하고 있다. 『時報』(1930년 2월 8일자), 秋憲樹編, 앞 책, p.1583.바로가기
註 069
韓國無政府主義運動史編纂委員會, 앞 책, pp.328~330.바로가기
註 070
여기서 한국독립당이란 명칭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독립당은 신민부로써 대본영을 이루었다. 이들은 東鐵, 哈綏線을 활동구역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독립당이란 신민부 군정파에 의한 한국독립당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北滿韓黨互相呑併」『中央日報』(南京, 1930년 8월 4일자), 秋憲樹編, 앞 책, pp.1585~1586).바로가기
註 0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00.바로가기
註 072
주 71)과 같음.바로가기
註 07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609.바로가기
註 0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593.바로가기
註 075
「滿洲 韓僑團體의〈告中韓民衆書〉」, 『中央日報』(南京, 1931년 8월 1일자), 秋憲樹編, 앞 책, p.1590.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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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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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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