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조선의 재정 상태와 개혁 중단 보고
【33】 조선의 재정 상태와 개혁 중단 보고
정치국 극동과 제57호
서울,
1889년 5월 12일
조선의 재정 상태.-할인은행(Comptoir d'Escompte)으로부터 2백만 원의 차관계약을 체결하는 계획.
장관님,
데니 씨가 그의 조선에 대한 옹호 속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실이다. 이 나라가 서양의 나라들과의 접촉에 들어간 날 이후로 그 정부는 변화의 화려함과 신선함에 취하고, 탐험가들과 신중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약속들에 의해 고무되어 미래도 없는 일들에 뛰어들었고, 앞으로 오랜동안 신중함과 절약만이 없앨 수 있는 몰락은 반도가 궤도에서 벗어났고 불안정하다는 평판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모든 아시아의 나라들은 그런 동일한 경험을 하였으며, 조선은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전 고문의 호의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극동의 어떤 국가도 그런 부주의함과 경솔함으로 불필요하고 그렇게까지 증명되지 않은 계획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지출을 메우기 위한 재원의 확보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은자의 나라는 개국하자마자 연구도 하지 않은 채 가장 값비싼 개혁을 실시할 것을 생각하였고, 3곳의 항구에서 얻는 관세의 수입은 계산해보지도 않고 퍼내기만 하면 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수의 개혁들에 대해 언급해 보겠습니다.
금 조각으로 주조되는 화폐와 원화들과 동전들을 엽전으로 대치하려하였습니다. 막대한 건설에는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습니다. 독일에서 기계들을 구매하였고, 함부르크에서 선발된 사람을 3년 동안 서울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주조를 시작하려할 때에, 필요한 금속을 구입하는 돈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업은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우정국:이 업무에 할당된 건물이 꾸며졌고, 일본에서 우표가 조각되고 인쇄되었습니다. 화재로 건물을 파손시켰던 1884년의 소요는 이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다시는 재개되지 않았습니다.
뽕나무 공장:견직물 감독관이 상해에서 고용되었으며, 거의 2백만 그루의 나무들이 심어졌고, 월간 지출이 거의 3,000프랑에 가까웠으나, 일손과 충분한 시설의 부족으로, 비단 생산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으로, 1887년의 수출은 5피클(481달러)이었으며, 1888년의 공식적인 계산서에서는 생산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종이 생산을 위해 50,000달러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고 일본에서 주문한 기계들은 결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한강 둑에 부려놓았는데 2, 3년 전부터 깨지고, 습기로 녹슬어서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청국의 것을 모방한 도자기 공장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강서[江西]의 경덕진[景德鎭] 노동자들을 오게 하여, 아직도 조선에 머물고 있는 그들은 결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신문들이 창간되었습니다:활자 부품을 사서 인쇄소를 차렸으나, 구독자들의 부족으로 이런 신문들은 빨리 사라져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상선의 건립입니다:조선인들에게 부풀려진 가격으로, 사용할 수 없는 배들이거나 또는 일본의 내해를 위한 것들로, 한해의 대부분 아주 나쁜 해안의 날씨를 헤쳐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배들을 팔았습니다. 일부는 잃어버리고, 일부는 훌륭한 증기선을 구할 수 있는 가격을 훨씬 넘는 수선비가 드는 파손을 겪었습니다.
전쟁 군수품의 구입 또한 조선인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미국의 병기창에서나 찾을 수 있는 가장 낙후된 모든 모델을 사들였습니다. 서울의 병기창에는, 정부가 단 1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피바디-마티니[Peabody-Martini] 소총에 맞는 수백만의 총알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방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동시에 왕은 자신의 왕궁에 유럽식 건물의 건설을 명령하였습니다. 건축가가 없었습니다. 세관의 하급 고용인인 한 러시아인의 지식에 호소하였는데, 그는 어떠한 특별한 교육도 받지 않았으며, 개성도 없고, 품격도 없는 거대한 건물들에 손을 대었습니다. 공사비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어떤 것도 끝나지 않았는데, 벽은 붕괴되고, 지붕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왕의 방들을 위하여 독일에서 가구를 들여왔는데, 헛간에 있었던 것으로 지금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올해 초에 프랑스의 건축가 살라벨[Salabelle] 씨가 내무부[內務府]의 임무를 위해 입국하였는데, 그가 수행하는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공사비의 부족으로 연기해야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모든 공급품은 거의 모두 지불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아주 높은 이율을 규정하여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총액이 형성되어 자본화될 이자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이따금 일부 금액을 지불해주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또한 “지나상선회사[招商局]”와 그들이 계약을 맺은 210,000원(1,500,000프랑)의 빚을 갚는데 소홀히 했습니다. 국가가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당시인 1882년에서 1884년 사이에 지급해야하는 위약금의 지불을 주장하는 일본인들의 요구에 모호한 약속으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만약에 왕의 고문의 봉급(18,000달러 = 72,000프랑)과 교관의 임무를 담당한 미국인 장교들의 봉급(54,000프랑), 전신국의 고용원들, 전깃불을 위해 왕실에서 일하는 기술자들, 선박들의 선장들, 대위들과 수리공들, 미국인 의사들, 정부에 의해 창립된 학교 선생들, 등등의 봉급을 빚에 합친다면 해관에서 나오는 것으로, 1888년에 267,000달러(=약 1,060,000프랑)였으며, 일상의 비용을 지출하고 이자로 사용되거나 갚아야할 원금을 줄이기 위해 지출하는데 충족시키기에는 먼 금액이 가장 확실한 수입이므로 왕실의 재정상태의 혼란이 어떤 상태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습관적인 부주의는 그들이 말려든 위험에서 그들을 끌어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당사자들의 주장이 너무 간절해서 심사숙고가 필요할 때까지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이런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그런 순간이 왔습니다. 뒤를 돌아다보아야 했으며, 그리고 아마도 처음으로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서 판단하건대, 그로 인해 받은 충격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내무부 독판과 호조판서[戶曹判書]는 사직을 청하였고, 의미 있는 사건으로는 국가의 가장 고위직인 영의정[領議政]이 강력히 사직을 청하였고, 이희 전하가 그에게 불안한 상황을 설명하는 교서를 내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것의 요약입니다.
“과인은 그대의 상소문에 언급된 요청을 완전히 검토하였다. 왜 지금 그대는 간절히 그대의 임무를 버리는 허가를 구하는 것인가? 그대는 정부의 최고 대신이며 모든 신하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다. 과인은 지금 매우 불안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왕과 신하들은 상호간에 서로 좋아하며 서로를 보호하지만, 그러나 왕국을 구할 수 없을까 걱정이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대는 과인의 곁을 떠나려고 하는가? 틀림없이 과인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에 자극 받아 처신하고 있을 것이다. 과인은 그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대는 국가의 법률을 어기게 되었다고 하고, 국고는 비었다고 하며 고관들은 부패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그대에게 과해진 임무가 아니었던가? 결국 그대는 은퇴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영의정은 없을 것이며, 누구의 도움으로 과인이 국민을 통치하겠는가? 과인은 궁정에 혼자 남을 것이다! 그러한 나라가 땅위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 과인은 그대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의 의도가 확실하지 못하여 과인을 포기하는가? 과인은 정말 창피스럽다.”
“그대가 요구한 것을 수락하기를 과인이 원할 지라도, 우리 왕국이 그대 없이 왕국으로 남을 수 없는 것처럼, 과인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과인에게 하루에 열 번씩 탄원서를 제출한다할 지라도, 과인은 그대를 포기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과인이 말한 바를 다시 생각하기를 바란다.”
교서의 계속:“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이 비답을 전하도록 주서[注書] 중의 한명을 보내라.”
요즈음은 한편으로는 외국인에게 서명한 약속을 지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다 엽전과 곡물로 급여를 받는 관리들의 봉급과 사병들의 월급을 지급하기 위해 국고와 정부의 곳간을 다시 채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왕의 문의를 받은 섭정공은 즉각적으로 국고를 짧은 기간 내에 채우기 위한 방법을 제안하였습니다. 계획을 실시하는 데에 별로 거리낌이 없는 그가 제안한 것이 이것입니다. 파종기에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돈이 필요합니다. 모든 경작자들에게 갚아야 할 6냥(2프랑)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1피클의 쌀로 상환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량은 50냥(20프랑 이상)의 가치와 같아서, 정부는 좋은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의 거주자들에게 호응을 받기에는 먼 것이라 하는 것 같으며, 그리고 이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외채에 관해서는, 왕은 부과된 이자보다 싼 금리를 지불하면서, 몇 년 내에 갚아야 할 금액의 전부를 지불할 수 있는 차관을 빌리고 싶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저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할인은행이 조선 정부에 힘을 빌려줄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무부 독판이 그 일을 저에게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은행에 2백만 원(=8백만 프랑)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 제안을 상해 지점장에게 의논하기를 부탁하여 어떤 □ 주어질 것인지 알고 싶어하였으며 저의 선동으로 로버트 하트 경이 총세무사로 이끌어가는 이사회에 의해 관리되는 것으로 가장 안전한 제물포의 관세를 제공하려한 것입니다. 작년에 7~8퍼센트로 정해진 이율이 부과된 이 해관의 수입은 140,000달러였습니다. 연간 감소액은, 은행이 총액을 결정짓는 것으로, 다른 관세, 즉 부산이나 원산의 관세로 제공하며, 이 두 곳 모두 쉽게 50,000달러의 분담금을 지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건은 저에게 만족스러워 보여서 저는 즉시 부이몽[Vouillemont] 씨에게 저에게 위탁된 이 계획을 통고하였으며, 현재 제가 전하에게 통고할 공식 확인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이 작업이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조선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수립하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경구,
V. 콜랭 드 플랑시.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각하께,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