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滿同胞 問題』 座談會
『在滿同胞 問題』 座談會
출석자
東亞日報 前편집국장 李光洙
朝鮮日報 편집국 차장 金炯元
(사정으로 東亞日報社長 宋鎭禹 氏는 출석치 못하엿슴니다)
本社側 金東煥
時日 1933년 8월
場所 서울에서
1. 旅程
本社側―事變 後의 滿洲事情 더구나 그곳에 사는 在滿同胞 100만의 생활상태는 갓금 신문이나 風便으로 드러오지 안은 바는 아니나 국내 인사들이 신뢰할만한 분으로써 일즉 滿洲에 나가 보고 도라온 이가 업서서 유감으로 역여오든 중, 이제 두 분이 그 該博한 준비지식과 탁월한 眼識을 가지고 南北滿洲, 蒙古, 間島 等地를 일일히 답사하고 도라오섯스니, 여러분의 말슴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滿洲의 자태를 보여주시는 것이 될 줄 암니다, 다만 여러 가지 주위의 사정이 잇서 하고 십흔 말슴을 다 할 수 업는 점이 잇슬 줄 암니다, 그러나 三千里 독자는 這間의 청탁을 다 짐작할 줄 아니, 안심하시고 하실 수 잇는 정도 안으로 滿洲同胞의 생활 진상을 말슴하여 주시요, 爲先 路程부터 듯고 십슴니다.
金炯元―滿洲를 보고 십흔 생각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잇다가 이번 大連서 박람회가 열니는 것이 기회가 되어 가지고 日本全國의 新聞協會大會가 개최되기에 社의 特派로 도라보고 왓는데 처음부터 끗까지가 團體員의 한 사람으로, 여행한 까닭에 실로 모든 것이 在滿同胞를 중심으로 볼 수가 업섯든 것이 千萬遺憾이엇슴니다, 도저히 警護 其他의 관계로 자유로운 시찰, 단독적 여행은 불가능 하엿스니까, 그저 滿洲國家의 일면을 보고 도라왓다고나 하겟슴니다. <47>
처음 서울서 떠나기는 8월 2일 春園과 함께 南大門을 떠나 육로를 取하여 安東縣을 거처 鐵으로 유명한 鞍山을 보고, 그리로 石炭의 撫順, 奉天, 大連, 旅順을 거처 다시 奉天으로 新京으로 哈爾賓, 吉林을 죄-다 본 뒤에 哈爾賓서 春園, 宋鎭禹 氏 等의 일행과 갈나저서 우리 北廻部의 일행은 吉林서 부터 위험지대라 하는, 敦化까지 敦化에서 局子街, 龍井을 거처 국경의 灰幕洞, 南陽坪을 둘너 終端港으로 유명한 極東 제1의 軍港의 稱이 잇는 「羅津」을 마즈막 보고 20여일 만에 서울에 도라왓지요, 그 사이에 朝夕으로 시시각각으로 眼界에 전개되는 자연과 인물이 모다 달너서, 너무 여러 가지를 본 까닭에 두서를 잘 차릴 수 업스나, 때가 때이니 만치 늘 긴장하여 보고는 왓슴니다.
李光洙―나도 炯元 氏 말슴과 가치 대개, 여정이 그러하엿는데 다만 나는 吉林, 敦化를 거처 間島로 하여 오지 안코, 哈爾賓서 더 蒙古와 西伯利亞 쪽이라 할 齊齊哈爾와 洮南 등지를 보고 왓슴니다. 무엇보다도 洮南等地의 風光이 참으로 아름답고 토지는 비옥하여 可謂 千里沃野라 하겟더구만, 宋鎭禹 氏도 旅程이 나와 꼭 갓하엿슴니다, 그래서 나는 열 엿새만에 서울에 왓서요. 무던히 도라다닌 셈이지요, 다만 그것이 數千里를 도라다녓다는 것이 모다 철도타고 다닌 곳뿐이기 鐵道沿線 以外는 우리는 가보지 못하엿고, 가튼 철도 속 여행이면서도 團體員이 만코, 匪賊의 위험이 잇서서 좌우에 순경의 호위 밋헤서 보앗스니까 실로 在滿同胞問題를 중심 삼고 見聞 이약이 할 거리는 적슴니다.
2. 그곳 朝鮮사람들은 果然 幸福한가?
本社側―大體 事變 前보다 오늘이 朝鮮사람 생활이 향상되어 잇습덱가, 또 生命財産의 안전성이 잇서 보입덱가.
金炯元―鐵道沿線에 잇서서는 확실히 생명 재산에 대한 위험은 업는 드시 보입데다, 그리고 시가지마다 集團되어 사는 동포를 보아도 匪賊이나 反滿軍의 피해는 전혀 밧지 안코 안전하게 사라 갑데다, 거지반 朝鮮內地나 마천가지던걸요, 다만 山間僻地의 일은 모르겟슴니다, 關東軍의 세력이 일일히 밋치지 못하는 조고마하고도 먼-촌락에 사는 朝鮮農民의 생명 재산은 모르겟슴니다, 들녀오는 풍문에는 각금 馬賊의 습격이 잇서 퍽 위태하다고들 합데다.
李光洙―나는 저 蒙古의 洮南 等地를 가 보앗는데 대체로 朝鮮사람은 평지에 살기를 실혀하여서 작고 山間으로 山間으로 기어들어 산악의 한쪽 귀통이에 옹기종기 10戶 20戶씩 집을 짓고 모여 사드군요, 警備機關이 완비하여 잇는 都會와는 이러케 떠러저 잇스니까 馬賊이 오면 미처 군대에 알니기 전에 피해를 보고 만다고 하더구만.
本社側―그런 僻地에 잇는 朝鮮사람들이 그곳 원주민인 滿洲사람과 잘 화목하게 지내어요.
李光洙―곳 잘 어울니어 사는가 봅데다, 다만 彼此가 대개 無智하여서 無智와 無智사이에 <48> 無智 때문에 불화가 생기는 일이 잇다고 하나―오히려 이 점은 市街地가 심한가 봅데다, 奉天이나 哈爾賓 等地에서 朝鮮사람 중 일부분이 공연히 滿洲國人을 함부로 멸시하여 각금 불화를 이르켜 놋는 일이 잇나봅데다.
金炯元―北滿은 그러치만 나는 間島를 보고 놀낫슴니다. 地元住民이라하면 朝鮮사람이 다 하리만치 주민의 擧皆가 朝鮮사람이더구만요, 그래서 商權도 조선사람 속에, 토지의 耕作開墾도 거지 반 조선사람 손에 잇더구만, 뭐 間島는 朝鮮의 延長입데다.
3. 在滿同胞의 生業은
本社側―在滿同胞의 생활은 엇대요, 대체 百萬 云云하는 동포의 생업은 무엇입덱가.
李光洙―그야 농업이지요, 處女地帶를 개간하는 것도 조선사람의 손, 水田을 漑灌하는 것도 조선사람의 손, 滿洲의 농산물 그 중에도 米作은 거이 전부가 朝鮮農民의 손에서 나니까, 농민이 전체의 8, 90파센트가 되고, 도회지에 잇는 사람들의 생업은 대부분이 人肉장사와 密輸入業이고, 근래에 여관업자가 만히 생기엇다고 합데다, 참 나는 이번 거름에 朝鮮人의 人肉市場에 참으로 놀낫슴니다, 奉天, 吉林, 哈爾賓, 新京 等 곳곳에 조선인 요리업자가 업는 곳이 업서요, 料理業을 개시만 한다면 성공한다니까, 그것은 중국여자는 더럽고 그래서 모다 조선여자를 환영한다는데, 그런 까닭에 엇든 여자는 하로, 서른 다섯 명의 남자를 接하엿다고 합데다, 그러니 돈을 남지 안켓슴니까. 奉天서는 人肉장사를 하여 20만원 돈을 모은 當者도 잇고, 다른 곳에도 數3만원, 10여 만원식 모은 성공자들이 잇다고 해요, 그러고는 아편 밀매업인 모양인데, 그것은 滿洲國政府에서 이제는 阿片專賣令이 실시되어 그 장사는 업서지는 모양입데다.
그러고는 여관업, 목재업, 잡화 장사들입데다.
金炯元―그래요, 도회지에는 娼妓業이 全盛하드군요, 奉天에 朝鮮사람이 1만여명 산다는데 조선인 요리집이 4, 50집 잇서요, 新京, 吉林 等地에도 모다 1, 20戶씩 잇서요.
人肉장사 다음에 세월이 조흔 것이 아편장사엇다고 하는데 지금은 국가에서 阿片公賣를 하니까, 예컨대 哈爾賓서도 밀매업자를 다 업새고 그 대신 公賣者 30여명을 認可하엿는데 그 중에 조선사람이 셋이 끼엇다든가요, 그러기에 아편업자의 세월은 이제는 다 업서진 세음이지요.
나는 撫順附近을 보앗는데, 거기 참 잘 만든 水田이 잇서요, 그것이 조선사람 손으로 경작되는 것이라는 말을 듯고 참으로 유쾌하엿서요, 水田은 吉林附近에도 만터구만.
本社側―滿洲에는 광산, 임업, 축산 등 業도 無盡藏의 富源을 가지고 잇다는데 그런 방면에 활약하는 조선사람은 업서요.
金炯元―잇기야 만치만, 조선사람 차레에까지 와야지.
李光洙―권리도 잘 차레에 오지 안치만 조선사람은 <49> 자본이 잇서야 무얼 하여보지요, 滿洲 드러갈 때 다만 얼마라도 자본 가지고, 드러간 사람은 거기 相應하게 다 돈을 모으고 지반을 닥고 안젓섯지만 赤手空拳으로 드러간 사람은 밤낫 건달로 도라 다니는 것이 滿洲더구만.
本社側―北大營을 점령한 뒤 風說로는 거기 잇는 목재 등을 조선사람들이 갓다가 팔아서 事變當時에 巨富된 사람이 잇다든데요.
金炯元―모를 말이예요, 그걸 조선사람들이 갓다가 팔나고 그냥 내버려 두엇겟서요? 나도 北大營을 구경하엿슴니다 만은―.
4. 朝鮮人의 機關으로
本社側―滿洲國政府안에 조선인 관리가, 몃치나 되는지요.
金炯元―몃 명 업다고 합데다, 그것도 奏任官 以下로.
本社側―協和會에는 조선사람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잇는가요.
金炯元―말로는 5族協和니까, 조선사람도 크게 한목 끼어잇섬즉 한데 잘 조사하여 보지 못하엿서요.
本社側―그러면 조선사람의 실제의 기관이라고 가르칠 것이 무에임니까.
金炯元―民會입데다, 各處마다 朝鮮人民會가 잇는데, 아히 나면 출생신고를 밧고 사람이 죽으면 사망신고를 밧고, 꼭 行政機關이더구만요, 실상 民會天地인 듯 합데다.
本社側―滿洲에는 엇던 화폐가 유통되어요?
金炯元―여러가집데다, 滿洲國家의 國弊라고 하는 새로 난 것도 도라다니고 朝鮮銀行券도 유통되고, 또 哈爾賓가튼 데로 가면 大洋도 잇고, 露西亞貨幣도 도라다녀요.
5. 滿洲移住民의 覺悟
本社側―압흐로 朝鮮內地의 빈농들이 만히 滿洲로 건너갈 줄 아는데, 두 분은 여기 대하야 엇더한 결론을 엇고 도라오섯서요, 즉 가는 것이 행복할가요.
李光洙―여러 가지 정세로 보아 不可避的으로 多數한 농민이 이주 할 줄 아는데, 이제는 商租權도 해결되어, 토지소유에 대한 朝鮮人의 恒久的 權利도 確認밧게 되엇스니까, 이제부터는 가서 살맛이 잇슬 줄 아러요, 그런데, 형편이 그러키야 하겟지만 이주농민들이 단돈 100원이라도 자금을 만들어 가지고 드러가서 토지를 사서 농사짓기를 하엿스면 조켓습데다, 나는 哈爾賓서 10리 되는 곳을 가보앗는데 거기 하로가리 조흔 水田이 50원이면 살 수 잇다는데 하로가리라는 것이 2,000坪이지요, 그 하로가리에 열석섬 내지 스물 한섬까지 난다는데 한섬 쌀갑이 최저 12원이라 하니까 벌서 첫해에 1,000원 수입이 아녀요, 이러케 자작농 중심으로 농사지어야 하겟더구만. 소작농을 지어서야 언제 생활에 여유가 잇겟서요, 아무리 비옥한 滿洲땅이라 할지라도―
金炯元―그러치요, 비단 농사뿐 아니라, 무슨 某事하고 滿洲로 가서 일하겟다는 사람은 자본을 가지고 가야 하겟습데다, 정말 奉天이나, <50> 哈爾賓 等地에 朝鮮人 無職業者가 엇더케도 만흔지 놀나워요, 그것이 모다 尺分업시 드러가서 생활의 근거를 엇지 못한 이들이지요, 밤낫 無職業으로 도라 다니는 이가 8割이나 된다든가요.
本社側―滿洲가 安住의 땅이라고 西伯利亞 갓든 朝鮮사람들이 이주하여 온다는 말이 잇는데 사실이여요.
金炯元―그건 것 갓지 안어요.
本社側―압흐로 모여드지 안을가요.
金炯元―滿洲國家의 성장여하에 달렷겟지요. 엇잿든 인구의 밀도가 朝鮮內地보다 절반이나 되게 희박하고 지역은 朝鮮의 5배나 되게 광대하고 토지는 50년 동안 비료를 아니 주고도 一等田으로 가라먹겟다 하리만치 비옥하니 이제 치안만 유지된다면 몃 千萬名의 농민들이 모아들것만은 不避의 사실이겟스니 아마 朝鮮農民도 압흐로 만히 흘너드러갈 것이을시다.
6. 其他雜感
本社側―滿洲國에 갓스니 溥儀執政을 맛나 보섯슴니까.
李光洙―新京서 新聞協會大會의 우리 일행들 환영회가 잇섯는데 그때 執政도 나오고 鄭孝胥도 나오고 謝介石이도 나온 것을 먼-발충에서 보앗지요. 執政이 中國말로 歡迎辭하는것까지 드럿슴니다.
本社側―滿洲旅行에 逢變한 이약이는 업슴니까.
金炯元―吉敦線의 警備가 제일 엄중하드군요, 열차마다, 警乘이라 하야 滿洲國 巡警이 다수히 탄 우에 또 무장한 步兵 1小隊(平時編成은 30명이나 戰時니까 얼마인지 모른다)가 올나타고 기차의 전후에 장갑차를 달고―정말 무시무시하여요, 그러치만 이러한 警備도 대소롭지 안케 알고, 馬賊이나 反滿軍의 습격이 잇서 갓금 비극이 이러난다고 합데다, 나도 現에 當하엿스니까.
本社側―그 외의 雜感은?
李光洙―滿洲各地를 도라다니며 가장 크게 늣긴 것은 滿洲에 버들이 만흔 점이더이다. 버들은 조선사람들이 즐기어 오든 나무입니다, 그리든 老柳가 滿洲벌판 여기저기 군데군데 선 것을 보매 우리 조상의 足跡이 여기까지 미첫구나 하는 생각에 과연 가슴이 뻐근합데다, 버들이란 말에 생각인 남은 엇든 언어학자의 말을 드르면 「平壤」이란 일홈이 버들이란 말이라고 합데다. 해석은 이젓슴니다 만은―그리고 高麗城趾가 處處에 잇고―先民의 유적이, 눈에 발필 때마다 그야말로 감개무량 합데다.
나는 松花江流域에 잇는 吉林을 보앗는데 꼭 平壤갓다고 생각하엿슴니다, 大同江을 끼고 아즌 능수버들에 싸인 平壤城은 松花江의 洋洋한 물결을 끼고 역시 버들나무를 만히 가진 吉林과 엇더케나 그러케 彷佛함니까, 더구나 關西의 富源이 大同江의 기름진 江岸左右에 잇드시 北滿의 沃野가 松花江 流域의 좌우에 모듸어 잇는 점, 松花江에 대이면 遼河는 아모것도 아니더이다.
그리고 逃南을 가보니, 멀니 지평선 우으로 參差한 밀림이 보이고 끗업시 널버진 평야며, 羊떼며, 유목민들이며―이런 것을 볼 때, 아모 근심도 잇고 그저 그 속으로 정처업시 방랑하고 십흔 생각이 불길가치 이러납데다, 漂泊! 그는 땅이 좁은 半島에서 할 것이 아니라 滿洲벌판 가튼 데서 맛볼 말인 듯 합데다.
金炯元―그래요, 참 滿洲平原의 원시적 정조! 이것은 半島가치 산과 물과 人家가 도닥도닥 부튼 곳에선 맛보지 못할 것이지요, 가슴이 툭-터지지요, 朔風이 그야말로 萬里를 부러오지요.
아무튼 이번 滿洲行의 인상은 일생을 두고 잘 살어지지 안을 것 갓슴니다.
記者―夜深한데 대단히 감사하엿슴니다. (사진은 大連市街)
記者附記―이번 좌담회에선 정치적 시사적 사실은 전부 빼엇고 또 數字的 통계를 드는 일도 빼엇고, 또 두 분이 각각 東亞와 朝鮮日報에 기행문을 쓰고 잇슴으로 여기엔 중복을 일체 피하여 그런 까닭에 省略된 곳이 만하엿슴니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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