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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권제6
최량
최량(崔亮)은 경주(慶州) 사람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글짓기[屬文]에 능하였다.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고, 성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를〉 불러 사우(師友)로 삼았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마침내 발탁하여 등용되니, 인망(人望)에 매우 합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겸 사위경(左散騎常侍 叅知政事 兼司衛卿)이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해직되었다.
얼마 뒤 왕이 좌우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최량이 100일의 병가[告]를 받게 되자 선관어사[御事選官]가 규정에 따라 해직을 요청하므로, 내가 이미 허락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최량은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충정을 다해 부족한 나[眇昧]를 바로잡아주었다. 그 공로를 생각하니 감히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하며, 곧 복직을 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임명하였으며, 내사시랑 겸 민관어사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郞 兼民官御事 同內史門下平章事 監修國史)로 승진시켰다. 성종 14년(995)에 죽으니, 왕이 슬피 추모하며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증하였고, 부의로 쌀 300석, 보리 200석, 뇌원다(腦原茶) 1,000각(角)을 보냈으며, 예법대로 그를 장사지냈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라 하였다. 뒤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고, 여러 차례 추증하여 태위 태보 태사 내사령 삼중대광(太尉 太保 太師 內史令 三重大匡)이 되었다.
아들은 최원신(崔元信)·최원좌(崔元佐)·최원억(崔元億)·최원위(崔元偉)·최원간(崔元偘)·최원보(崔元保)·최원준(崔元俊)이다. 최원신은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호부시랑 예빈경(戶部侍郞 禮賓卿)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 이수화(李守和)와 함께 송에 신년을 하례하러 갔는데, 귀국하자 사행을 받드는 데 있어서 욕보이게 했다고 하여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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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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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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