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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이 『주례』에 근거해 관직제 등에 관한 시무책을 올리다
조준(趙浚)이 또 동료들을 이끌고 시무책(時務策)을 조목별로 아뢰기를, “삼가 『주례(周禮)』의 「천관(天官)」을 살펴보건대, 총재(冢宰)는 6경(卿) 중에서 한 명으로 하여 나라의 육전(六典)을 관장하며 왕의 정치를 도우면서 나라를 다스렸고, 사도(司徒) 이하는 각자 직(職)에 따라 총재에 예속되었으며, 6경의 속관이 또 360명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60명의 관속이 6경에게 통솔(統率)되고 또 6경은 총재에게 통솔되었습니다. 관직의 증감과 명의(名義)의 연혁은 시대에 따라 같지 않았으나, 대체로는 6부(部)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넓게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여신 처음에 관직을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면서 재상(宰相)을 두어 6부를 다스리고 감(監)·시(寺)·창(倉)·고(庫)를 두어서 6부에 나누어 둔 것은 아주 훌륭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니 폐단이 생겨 인사행정[典理]을 맡은 자가 사람을 선발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유품(流品)이 남발되었고, 군사행정[軍簿]을 맡은 자가 병액(兵額)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니 무비(武備)가 해이해지게 되었습니다. 호구(戶口)의 증감, 전곡(錢穀)의 다과(多寡), 옥송(獄訟)의 무절제함, 도적의 창궐 등에 대해 판도사(版圖司)와 전법사(典法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의사(禮儀司)의 예관(禮官)과 전공사(典工司)의 공관(工官)들은 과연 각자 맡은 그 직무를 해내고 있습니까? 대개 6부는 백관의 근본이고 정사(政事)가 나오는 곳입니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진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백관(百官)과 여러 관청들이 매우 산만해져서 통제가 되지 않고, 실적을 위해 힘쓰지 않아서 이름은 남아도 실체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왕과 재상이 근심하여 부지런히 일해도 정사가 잘 다스려져서 좋은 성과를 올리기는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신(臣) 등은 6전(典)의 일은 6부에 귀속시키고 각 사(司)는 6부에 나누어 소속시킬 것을 바라옵니다. 재신(宰臣)은 시중(侍中) 이하로는 차례대로 판사사(判司事), 밀직(密直)을 두고 또 차례로 판서(判書)를 겸하게 함으로써 위로부터의 기강을 잘 잡도록 해야 합니다. 봉익(奉翊)을 6부의 판서로 삼아 여러 낭관(郎官)과 소속 관청을 다스리도록 하고 각자의 직무에 따라 아래에서는 명령을 듣게 해야 합니다. 큰일은 6부의 낭관이, 작은 일은 6색장(色掌)이 때에 따라 명령을 받들어 공문을 보내게[行移] 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면 번잡한 일들이 간단해질 것이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말을 듣게 되어 위아래가 서로 연결되고 크고 작은 일들이 서로 통일되어 그물을 들면 그물코가 늘어나고 옷깃을 당기면 옷이 펴지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 왕과 재상이 위에서 한가롭게 있어도 백관들이 아래에서 분주히 일하므로 명령이 쉽게 행해지고 정사도 쉽게 거행될 것입니다. 임금[人主]의 직무는 재상들과 논의할 뿐이고, 재상의 직무는 군자(君子)를 등용하고 소인(小人)을 물리쳐서 백관을 바로잡을 뿐입니다. 재상으로 그 〈적합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졌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정치이겠습니까? 주공(周公)·소공(召公)·태공(太公)은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재상들이고, 소하(蕭何)·조참(曹參)·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는 한(漢) 고조(高祖)와 당(唐) 태종(太宗)의 재상들입니다. 본조(本朝)의 제도에는 중서성(中書省)에는 영(令)·시중(侍中)·평장(平章)·참정(參政)·정당(政堂)이라는 것들이 있는데 이 다섯 관직은 하늘의 5성(星)을 본받은 것이고, 추밀(樞密)의 일곱 관직은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받은 것입니다. 재신(宰臣)과 추밀이 합좌(合坐)하는 것은 원(元)을 섬기게 된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요즘에 이르러 도당(都堂)에 앉아 국정(國政)에 참여하는 자가 60~70명이나 되니 관직이 이처럼 넘쳐나는 것은 예전에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도(道)를 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論道經邦] 음양(陰陽)을 조화시켜 자신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로잡는 자가 아니거나, 깨끗하고 충직하여 악인(惡人)을 미워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나라만을 생각하여 자기 집안을 잊는 자가 아니거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진(敵陣)을〉 쳐서 얻고 용맹함이 3군(軍)에서 으뜸이 되며 먼 곳까지 위엄을 떨친 자가 아니라면, 양부(兩府)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천하의 넓은 땅과 사해(四海)의 많은 부(富)를 가졌으면서도 관리의 정원을 줄여서 10명 중 1명만을 둠으로써 중흥(中興)의 치세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무릇 급하지 않거나 잡스럽고 쓸모없는 관리는 모두 없앰으로써 역대 왕들께서 하늘을 대신하여 관직을 설치한 성헌(成憲)을 회복하여 〈지금〉 조정에 유신(維新)의 변화를 보이도록 하시옵소서. 6시(寺)와 7감(監)에는 본래 판사(判事)가 없었고, 근래에는 또 통헌(通憲)·봉익의 품계에 있는 자들은 직접 사무를 보지도 않으면서 관직만 비워둔 채로 녹봉[天祿]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통헌·봉익의 품계에 오른 자로서 재간(才幹)이 있는 자라면 그 품계를 낮춰서 직접 사무를 보게 하고, 새로 제수(除授)하는 자에는 봉익·통헌의 품계를 주지 마시옵소서. 『춘추(春秋)』에는 ‘천왕(天王)이 잉숙(仍叔)의 아들로 하여금 내빙(來聘)하게 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공자(孔子)께서 주(周) 왕실이 그 부형(父兄)의 연고로 유약(幼弱)한 자제(子弟)에게까지 관직을 주어 녹봉을 허비하고 하늘이 내린 관직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고 아파하신 말입니다. 우리 문종(文宗)께옵서는 38년을 다스리면서 태평성대를 이루셨는데 그것은 등용된 사람들이 모두 노성(老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공경(公卿) 사대부(士大夫)의 유약한 자제를 동반(東班) 9품 이상의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만약 멋대로 관직을 받은 자가 있으면 그 부형(父兄)에게 죄를 주시옵소서.
규정(糾正)의 직무는 백관을 감찰하여 왕의 눈과 귀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祭祀)와 조회(朝會)에서 전곡의 출납(出納)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감독하고 검사해야 하니 직질(職秩)은 낮지만 책임은 중합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대간(臺諫)의 천거에 의해 그 관직을 제수하시고 그 질(秩)을 정언(正言)의 다음으로 올려서 기강을 진작하시옵소서. 수령(守令)은 백성을 가까이 하는 직무이니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제수된 수령 중에는 자못 사림(士林)이 알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높은 관직을 지내 명망이 있는 자가 아니거나, 과거를 거쳐 온 나라에 명성과 업적을 떨친 자가 아니라면 〈수령직의〉 제수를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그들이 사냥을 나가거나 연회를 여는 일도 모두 엄히 금지하여 주시옵소서. 감무(監務)·현령(縣令)의 직무 또한 백성을 가까이 하는 것인데, 요즘에는 임용되는 길이 많아져서 사람들이 〈그러한 직을〉 맡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부사(府史)·서리(胥吏)로서 배움과는 담을 쌓은 무식한 자들이 임용되어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대간·6조(曹)에서 천거한 재간이 있는 사람들을 파견하시고 참관(叅官)으로 품계를 올려서 그 직임(職任)을 중히 하시옵소서. 여러 안집별감[安集]은 일체 혁파하시고 부사·서리의 무리들은 단지 권무직(權務職)에만 제수하도록 하시옵소서. 공사노예(公私奴隷)·주리(州吏)와 역리(驛吏)·공상잡류(工商雜類)로서 관직을 함부로 받은 자는 청컨대 헌사(憲司)에서 관품(官品)을 논하지 말고 모두 그 관직을 빼앗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공역서(供驛署)는 오로지 8도(道)의 역(驛)을 관장하는 관청인데, 최근 몇 년간 〈그 관리들이〉 관청에서 근무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공문[文牒]을 보내고 있습니다. 권세(權勢)가 있거나 호강(豪强)한 자들의 청탁이나 친척과 벗들의 요청을 받고 역마(驛馬)를 마음대로 이용하면서 역리[郵吏]를 부리는 자가 끊임없이 오가니 역졸(驛卒)이 피로에 지쳐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공역서를 군부사(軍簿司)에 속하게 하여 모든 마필(馬匹)과 역졸은 도당의 문자(文字)에 의해서만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복시(司僕寺)는 전하의 수레와 말을 관장하므로, 주의 백경(伯冏)과 같은 임무이옵니다. 〈전하의〉 좌우에서 친근(親近)하므로 그 선발이 가장 중요한데 요즈음 따로 내승(內乘)을 설치하여 내수(內竪)의 무리들이 그 직무를 제멋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횡포가 더욱 심해져 〈말이 먹을〉 꼴[蒭槀]을 거둠에 온갖 방법으로 협박하는 형편입니다. 〈그것을〉 도성(都城) 안으로 운반하느라 농우(農牛)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니 기내(畿內) 고을들은 매우 피폐해졌고, 그 해독이 여러 고을로 퍼지고 있습니다. 한 주(州)에서 바쳐야 할 〈말 먹이용〉 곡식과 풀의 가격이 베[布]로 따져서 거의 9백 필(匹)에 이릅니다. 주군(州郡)이 모두 이러한 형편인데, 또 공호(貢戶)를 부려먹으면서 구사(驅史)라 이름 붙인 이들이 1,000명, 100명에 이릅니다. 공적(公籍)에 등록하지 않고 사사로이 농장(農莊)에 두어 사역(使役)하기를 노예처럼 하고 있으니 민(民)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므로 참으로 애통합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상승(尙乘)을 사복시에 소속시켜서 내수의 제수를 허락하지 마시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자를 신중하게 골라서 일을 맡기시고 날을 번갈아 입직(入直)하게 하시옵소서. 〈말 먹이로 쓸〉 꼴과 콩은 자신이 직접 양을 재어 공급하고 기내(畿內)에서 나는 꼴은 말의 정수(定數)를 계산하여 매달 나누어 바치게 하고 또한 규정(規定)을 시켜서 감독하고 검사하게 하시옵소서. 〈입직하는〉 번(番) 하나마다 수의(獸醫) 5명과 구사 30명을 두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부병(府兵)에 소속시키도록 하시옵소서. 무릇 도감(都監)이란 일이 있으면 두고 일이 없으면 없애는 것이 예(例)입니다. 조성도감(造成都監)은 처음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것인데 나중에는 선공(繕工)의 직무까지 귀속시켜서 나라 전체의 목재와 철의 쓰임새를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파견한 관리들이 역마를 번다하게 사용하며 민들의 재물과 힘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나무 1개를 끄는 데 소 10마리를 죽이기까지 하고, 1개의 용광로에서 쇠를 제련하는데 10집의 농사를 못 짓게까지 하며, 1속(束)의 삼[麻]과 1파(把)의 거친 베[葛]를 마련하느라 10필의 베를 쓰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백성들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때에는 거죽을 벗기고 뼈를 두드려 골수(骨髓)를 빼듯이[剝膚槌髓] 혹독히 하지만 사사로이 쓸 때는 진흙이나 모래처럼 〈허투루〉 여깁니다. 바라옵건대 〈조성〉도감을 없애서 선공시(繕工寺)에 소속시키고 방어(防禦)·화통도감(火桶都監)도 아울러 없애서 군기시(軍器寺)에 소속시킨 후에 청렴하고 정직한 자를 신중히 가려서 관직을 주고 또한 규정을 시켜 감독하고 검사하도록 하시옵소서. 호곶[壺串]에 궁궐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와 기와는 죄를 지어 적몰(籍沒)된 집과 양강(兩江)의 목재, 여러 가마의 기와로 영조(營造)에 공급하시옵소서. 무릇 나무를 벌채하고 기와를 굽는 일도 3년 동안 그만두어 민들을 쉬게 하시옵소서. 도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 교화가 먼저 이루어지는 곳이고, 그 곳의 백성들은 왕실을 지킬 따름입니다. 근래에 〈도성의 백성들을〉 교양(敎養)하는 일에 법도가 없어 간악하게 속이는 것을 서로 익히게 되었고 역역(力役)이 번잡하고 과중해서 날이 갈수록 삶이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도총도감(都摠都監)을 혁파하고 5부를 개성부(開城府)에 소속시키옵소서. 1리(里)마다 기로(耆老) 중에 학식 있는 자를 택하여 사장(社長)으로 삼아 지방에 학교를 세우는 법식[黨序之法]에 의하여 자제를 가르치게 하시옵소서. 그 가운데 천인(賤人) 및 공장(工匠)과 상인의 자제는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게 하여 무리 지어 다니면서 거리에서 장난질함으로써 천박한 풍습을 조장하지 말도록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사장과 부형에게 죄를 주시옵소서. 도관(都官)·궁사(宮司)·창고(倉庫)의 노비(奴婢) 및 최근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된 자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가 새로 몰수된 노비의 경우, 변정도감(辨正都監)에 명령하여 사람[口] 수를 모두 계산하여 문서를 만들어 누락되는 일이 없게 하고, 토목(土木) 영선(營繕)의 역이 있거나 빈객(賓客)이나 불신(佛神)의 접대가 있을 때마다 모두 그들에게 일을 시키시옵소서. 방리(坊里)의 잡역(雜役)은 일체 없애서 그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여 왕실을 잘 호위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이인임(李仁任)이 제멋대로 위복을 휘두르기를 20년 넘게 하면서 온갖 죄악을 저질렀는데 다행히도 하늘이 그를 죽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시호(諡號)와 뇌사(誄辭)를 내리지 않음으로써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징계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은 청렴결백함을 스스로 지키다가 이인임 등에게 쫓겨나 유배지[貶所]에서 죽었습니다. 바라옵건대 교서(敎書)를 내려 그 무덤에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주시옵소서. 시중 이자송(李子松)은 청렴하고 매사에 삼가며 충절을 지켰으나 죄가 없는데도 죽었기에 나라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바라옵건대 시호와 뇌사를 내리시어 그의 집안을 후하게 보살펴 주시옵소서.
조종(祖宗)의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은 모두 당제(唐制)를 따랐는데, 원조(元朝)에 이르러 시왕지제(時王之制)에 압박을 받아서 중화(中華)〈의 제도〉를 바꿔 오랑캐를 따르게 되었으니 상하(上下)가 분별되지 않아 민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께서는 상하의 등급이 없는 것을 분하게 여기시어 중화로써 오랑캐를 변화시키고[用夏變夷] 조종의 성대한 제도를 다시 회복하려는 큰 뜻을 세웠습니다. 명(明)[天朝]에 표문을 올려 호복(胡服)을 혁파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공민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상왕(上王, 우왕)께서 그 뜻을 계승하여 요청할 수 있었지만 중간에 집정(執政)이 바꿔 버렸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셔서 친히 중화의 제도를 따라 온 나라의 신민(臣民)과 더불어 환연히 다시 출발하였으나, 여전히 그 품제(品制)를 따르지 않으면서 유신(惟新)의 정치를 가로막는 자가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헌사에 명령하셔서 날을 정하여 입법(立法)하게 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가려내어 처리하도록 하시옵소서. 근년에 간악하여 흉악한 자들이 번갈이 정권(政權)을 잡고서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높거나 낮은 관직을 주었고, 자신에게 빌붙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거나 살렸습니다. 사풍(士風)이 한순간에 변하여 아침저녁으로 권문(權門)을 분주하게 쫓아다니면서 자기 직무[天工]를 비워놓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해당 관청[攸司]에 분부하셔서 각각 옥송(獄訟)의 일을 결단하는 것을 양아일(兩衙日)에 〈전하께〉 올리도록 하시고, 각 사(司)의 관리들은 날마다 본사(本司)에서 일을 보게 하고, 그 중 권문을 분주히 쫓아다니느라 자신의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직을 정지시키고 녹봉을 거두게 하시옵소서. 형벌에 정해진 법이 없어서 안팎의 관사(官司)에서는 마음대로 처리하는 형편입니다. 지금 전교(典校)의 관리들은 모두 문학(文學)을 하는 신하들인데 달리 맡은 바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형서(刑書)를 정리하여 다듬는 일을 맡겨서 만세(萬世)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또한 중앙과 지방의 관사가 서로 접하는 절차와 문서를 주고받는 격식도 또한 정리하여 정하여 반포 시행하도록 하시옵소서.
옛날에는 풍속(風俗)이 순후(淳厚)하여 속이거나 위조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백관의 사첩(謝牒)에 당후관(堂後官)이 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리가 점점 나빠지고 간악한 속임수들이 나날이 늘어나자 근래에는 상장군(上將軍) 이하에 대해서는 군부사에 명하여 도장을 찍게 하고 봉익 이하는 전리사(典理司)에서 도장을 찍게 했으니, 이는 속임수와 위조를 막으려는 것입니다. 지금 도평의사(都評議使)가 중앙과 지방의 관사에 보내는 문서들은 모두 전곡의 출납, 인명의 살생과 상벌(賞罰), 명령을 시행하는 등에 대한 일이므로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합니다만, 일개 녹사(錄事)로 하여금 서명하게 하니 융통성 있게 간악한 짓을 막는 방법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조사(朝謝)에 도장을 찍는 예에 의거하여 모든 도당의 문첩(文牒)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게 하시옵소서. 옛 제도에서는 왕패(王牌)를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에 내릴 때에 반드시 행보(行寶)와 신보(信寶)를 찍게 하였는데, 지금은 내수가 홀로 서명하게 하니 이 또한 간사한 짓을 막는 방법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궁궐 안에서 쓰는 모든 것은 도평의사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고 왕패를 내리지 말아서 내수들이 도둑질을 하는 근원을 아예 막으시옵소서. 사대부(士大夫)들이 소송을 결단하는 관리와 전곡을 출납하는 관사에 사사로운 서신(書信)을 주고받으면서 옳고 그름을 뒤바꾸어 관물(官物)을 함부로 훔쳐내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하므로, 바라옵건대 일체 금지시켜 주시옵소서.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청탁한 자와 들어준 자 모두를 청렴하지 못한 죄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각 사(司) 및 성중애마(成衆愛馬)가 물품을 요구하는 행위나 외관(外官)들이 물건을 주는 일을 일체 금지시키고,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또한 청렴하지 못한 죄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옛날에는 민의 나이가 16세이면 정(丁)이 되어 비로소 국역(國役)에 복무하였고, 60세면 늙었다 하여 역을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주군에서 매 해 인구를 조사하고 호적(戶籍)을 작성하여 안렴사(按廉使)에게 올리고 안렴사는 호부(戶部)에 올려서 조정(朝廷)이 군사를 징발하고 역에 복무하게 하는 일이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매우 분명했습니다. 근래에는 이 법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니 수령이 자기 주의 호구를 알지 못하고 안렴사도 자기 도의 호구를 알지 못하니, 군사를 뽑고 역을 징발하는 때가 되면 향리(鄕吏)가 속이고 은폐하면서 뇌물을 받아들입니다. 부유하고 건장한 자는 면제받는 반면 가난하고 약한 자만 뽑히게 되므로, 가난하고 약한 집에서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달아나게 되고, 부유하고 건장한 집에서 대신 그 고통을 받게 되어 또한 가난하고 약해져서 달아나게 됩니다. 징발을 맡은 자는 향리의 기만과 은폐를 분하게 여겨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는데 귀를 베고 코를 깎는 등 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향리도 또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달아나 버립니다. 향리와 백성(百姓)이 사방으로 유망(流亡)하고 주군이 텅텅 비는 것은 호구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데서 온 재앙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 양전(量田)하고 그 중 경작지를 조사하여 많고 적음에 따라 호적을 상·중·하로 만들고, 또한 양호(良戶)와 천호(賤戶)를 분류해서 수령이 안렴사에게 올리고 안렴사가 판도(版圖)에게 올리도록 하시옵소서. 조정에서 군사를 징집하고 역을 징발할 경우 근거할 것이 있으므로 때맞추어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령과 안렴사 가운데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바로 법으로 다스리옵소서.
여러 도의 어염(魚鹽)·목축(牧畜)의 생산을 늘리는 것은 국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 태조[神聖]께서 아직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평정하지 못하였을 때 먼저 수군(水軍)을 정비한 후 친히 누선(樓船)을 타고 금성(錦城)을 함락시켜 그곳을 차지하였습니다. 여러 섬의 이권(利權)이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고 그 재력을 의지하여 드디어 삼한(三韓)을 하나로 하시었습니다. 압록강(鴨綠江) 이남은 대저 모두 산인데, 비옥한 밭은 바닷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비옥한 평야 수천 리(里)가 왜구(倭寇)에게 함락되어 갈대만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국가는 이미 어염·목축의 이익을 잃었고 또한 비옥한 들과 좋은 밭에서 나는 수입도 잃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한(漢)에서 백성을 모아 변방을 채워 흉노(凶奴)를 막은 고사(故事)를 이용하여, 망한 고을의 황지(荒地)를 개간하는 자에게 20년 동안 그 밭에 세금을 매기지 말고 〈그 땅을 개간한〉 민들을 역에도 동원하지 마시옵소서. 오로지 수군만호부(水軍萬戶府)에 소속시켜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거나 세우게 하고, 노약자들을 모아 살게 하시옵소서. 척후(斥候)들을 멀리 보내고 봉화(烽火)를 잘 살피도록 하시옵소서. 별다른 일이 없을 때에는 농사·어염·대장간 일로 먹고 살게 하고, 때로는 배를 만들어 두었다가 왜구가 오면 들판의 곡식을 태우고 성에 숨게 하고[淸野入堡], 수군이 왜구를 공격하게 해야 합니다. 합포(合浦)에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유망한 민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와서 변경의 주군들이 채워지게 될 것이고 여러 섬에도 점차 사람들이 차게 될 것입니다. 전함(戰艦)이 많아지고 수군이 전술을 익히게 되면 해구(海寇)들이 달아나서 변방 고을은 평안해질 것이고, 조운(漕運)이 쉬워지면 창고[倉廩]가 넉넉해질 것입니다. 수군만호(水軍萬戶)와 여러 도의 원수(元帥)로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전함을 수리하며 인심(人心)을 결집하고 군령(軍令)을 시행함으로써 적을 무찔러서 변방을 안정시킨 사람에게는 섬에 있는 밭을 하사해 대대로 그 수입으로 먹고 살게 하고 자손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그 가운데 하나의 성보를 잃거나 하나의 주군이라도 망하게 한 자는 군법(軍法)으로 처리하도록 하고 가벼이 용서하지 말도록 하여 잘한 것은 권장하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는 뜻[勸懲]을 보이시옵소서.
전라(全羅)·경상(慶尙)·양광(楊廣)의 3도는 공부(貢賦)가 나오므로 국가의 복심(腹心)입니다. 지금 왜구가 횡행(橫行)하여 우리의 주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우리의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우리의 노약자들을 살육하고 우리의 장정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지휘하는 자들[擁旌節者]이 성문을 닫은 채 숨어 엎드려서 싸우려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적의 기세가 나날이 세지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군사를〉 대거 동원하여 때맞춰 소탕하여 없애버리옵소서. 서북(西北) 방면은 국가의 번병(藩屛)입니다. 요즈음 간흉(奸兇)들이 나라를 제멋대로 하여 곳곳에 사인(私人)을 배치하니 원수·만호가 예전 정원보다 더 늘었습니다. 주군에서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물자가 많아져서 민들이 감당하지 못하니 모두 유망하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고[文武兼備] 위엄과 명망을 일찍이 드러낸 자를 뽑아서 1도마다 원수 1명, 상만호(上萬戶)와 부만호(副萬戶) 각각 2명씩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주시옵소서. 장사꾼 무리들이 다투어 권문에 의탁하여 천호(千戶)에 임명되는 것을 구하여 갖은 수단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이[侵漁]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각 도의 원수에 위엄과 은혜가 있어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자를 가려 뽑아서 제수하시되 자주 바꾸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권세지가(權勢之家)들이 다투어 무역[互市]을 하느라 초피(貂皮)·송자(松子)·인삼(人蔘)·봉밀(蜂蜜)·황랍(黃蠟)·미두(米豆) 같은 것들을 거두어들이지 않음이 없습니다. 민들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노인과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고 있으니, 참으로 통곡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민에게서〉 억지로 구매하는 일[抑買]은 일체 금지하고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엄격히 법에 따라 처벌해 주시옵소서. 이전에 죄를 지은 간악하고 흉포한 무리가 억지로 사들인 재화(財貨) 중에서 민간에 둔 채 아직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마땅히 다 쓸어 모아서 관용(官用)으로 충당해야 하옵니다. 특히 매와 새매·초피를 사사로이 바치는 일을 모두 엄격히 금지하여 주시옵소서. 화척(禾尺)·재인(才人)은 농사를 짓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민의 조(租)로 먹고 사는 자들로서, 일정한 생업[恒産]이 없으니 항심(恒心)도 없어서 산골짜기에 모여 살면서 왜적(倭賊)이라 거짓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 세력은 두려워할 만하니,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부터는 거주하는 주군에서 그 〈화척과 재인들의〉 인구[生口]를 헤아려 호적을 작성하게 하시옵소서. 〈그들을〉 유이(流移)하지 않게 하고 빈 땅을 주어 농사에 힘쓰게 해서 평민(平民)과 같게 하시옵소서. 그 가운데 어기는 자가 있으면 소재지의 관사에서 엄히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니, 창왕(昌王)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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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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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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