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의 출정을 왕이 허락하다
양강왕(陽岡王)註 265이 즉위하자, 온달(溫達)이 왕께 아뢰기를, “생각건대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註 266의 지역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으니註 267, 백성은 몹시 가슴 아파하며 지금껏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주신다면, 한 번 가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註 268
양강왕(陽岡王): 양강왕은 고구려 제24 왕 양원왕(陽原王)을 말한다.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원년 3월조에 양원왕을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문의 양강왕은 590년에 즉위한 평원왕의 아들인 제26대 영양왕(嬰陽王)의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정구복 외, 2012, 769~770쪽). 온달열전의 원전은 『구삼국사(舊三國史)』 찬자가 전혀 활용하지 않은 고기(古記)의 하나였고, 본서의 찬자가 이것을 기초로 하여 온달열전을 찬술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영양왕을 양강왕으로 기술한 것은 고기(古記)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서술에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21, 462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전덕재, 2021, 『삼국사기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전덕재, 2021, 『삼국사기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신라가 …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서는 551년(진흥왕 12)에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竹嶺) 바깥에서 고현(高峴) 안쪽에 있는 〔고구려의〕 10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 고구려 보장왕이 김춘추에게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니, 만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97 당기(唐紀)제13 태종(太宗) 정관(貞觀) 18년(644) 정월조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예전에 수나라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13년(644) 봄 정월조와 권제21 고구려본기제9 보장왕 3년 봄 정월조에도 보인다.
양강왕(陽岡王: 영양왕)이 … 허락하였다: 6세기 고구려는 북제나 돌궐과 같은 세력들과 대립관계에 있었고, 점차 성장한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달은 결정적으로 북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로 성장한 신진 무장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임기환, 1992, 39쪽). 온달은 대내적으로 왕의 사위로서 왕권을 강화시킬 의무가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해야 하는 사명도 갖고 있었다. 당시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고구려는 온달과 같은 신진 세력을 필요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정호섭, 2014, 15쪽).
〈참고문헌〉
임기환, 1992,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5
정호섭, 2014,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본 온달의 역사적 위상과 아단성」, 『한성사학』 29
〈참고문헌〉
임기환, 1992,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5
정호섭, 2014,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본 온달의 역사적 위상과 아단성」, 『한성사학』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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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65
양강왕(陽岡王): 양강왕은 고구려 제24 왕 양원왕(陽原王)을 말한다. 본서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원년 3월조에 양원왕을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문의 양강왕은 590년에 즉위한 평원왕의 아들인 제26대 영양왕(嬰陽王)의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정구복 외, 2012, 769~770쪽). 온달열전의 원전은 『구삼국사(舊三國史)』 찬자가 전혀 활용하지 않은 고기(古記)의 하나였고, 본서의 찬자가 이것을 기초로 하여 온달열전을 찬술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영양왕을 양강왕으로 기술한 것은 고기(古記)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서술에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21, 462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전덕재, 2021, 『삼국사기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전덕재, 2021, 『삼국사기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註) 267
신라가 …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본서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서는 551년(진흥왕 12)에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竹嶺) 바깥에서 고현(高峴) 안쪽에 있는 〔고구려의〕 10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 고구려 보장왕이 김춘추에게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니, 만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197 당기(唐紀)제13 태종(太宗) 정관(貞觀) 18년(644) 정월조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예전에 수나라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13년(644) 봄 정월조와 권제21 고구려본기제9 보장왕 3년 봄 정월조에도 보인다.
註) 268
양강왕(陽岡王: 영양왕)이 … 허락하였다: 6세기 고구려는 북제나 돌궐과 같은 세력들과 대립관계에 있었고, 점차 성장한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달은 결정적으로 북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로 성장한 신진 무장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임기환, 1992, 39쪽). 온달은 대내적으로 왕의 사위로서 왕권을 강화시킬 의무가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해야 하는 사명도 갖고 있었다. 당시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고구려는 온달과 같은 신진 세력을 필요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정호섭, 2014, 15쪽).
〈참고문헌〉
임기환, 1992,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5
정호섭, 2014,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본 온달의 역사적 위상과 아단성」, 『한성사학』 29
〈참고문헌〉
임기환, 1992,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5
정호섭, 2014,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본 온달의 역사적 위상과 아단성」, 『한성사학』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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