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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가계
김유신(金庾信)註 001은 왕경(王京)註 002 사람이다.註 003 〔그의〕 12세조(世祖)註 004는 수로(首露)註 005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註 006 〔수로는〕 후한(後漢)註 007 건무(建武)註 008 18년 임인(壬寅; A.D. 42년)에 구봉(龜峯)註 009에 올라가 가락(駕洛)註 010의 9촌(村)을註 011 바라보고,註 012 마침내 그곳에 나아가 나라를 새로 세우고註 013 이름을 가야(加耶)註 014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金官國)註 015으로 고쳤다.註 016 그의 자손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註 017에 이르렀는데, 〔구해는〕 혹은 구차휴(仇次休)註 018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부(曾祖父)가 된다.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註 019의 후예여서 성(姓)을 김(金)이라 한다.”라고 하였다.註 020 유신비(庾信碑)註 021에서도 또한 “헌원(軒轅)註 022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남가야(南加耶)註 023 시조(始祖)인 수로와 신라〔왕〕는 같은 성이었다.註 024
註) 001
김유신(金庾信): 생몰 595~673년. 883년(헌강왕 9)에 조성된 「중화삼년명(仲和三年銘) 금동사리기(金銅舍利記)」에 유신각간(裕神角干)이라 전한다.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친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유신의 동생이 흠순(欽純) 또는 흠춘(欽春)이고, 여동생으로 보희(寶姬)와 문희(文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문희[문명부인(文明夫人)]는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 김유신의 부인은 태종무열왕과 문희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다. 김유신은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이찬 삼광(三光), 둘째 아들이 소판(蘇判) 원술(元述), 셋째 아들이 해간(海干) 원정(元貞), 넷째 아들이 대아찬 장이(長耳), 다섯째 아들이 대아찬 원망(元望)이다. 이들 가운데 지소부인의 소생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지소부인은 성덕왕 11년(712) 8월에 부인(夫人)에 책봉되었고, 후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생애를 마쳤다. 김유신의 서자(庶子)로서 아찬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군승이 아찬의 관등까지만 승진한 것으로 보건대, 그의 어머니는 6두품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전덕재, 2013, 324~325쪽).
김유신이 673년(문무왕 13) 7월 1일에 79세로 사망하자,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냈는데, 김유신묘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7-10번지에 있다. 한편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으로부터 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김인문묘를 김유신묘로 비정하고(이병도, 1968; 1976, 719~731쪽; 이근직, 2012, 264~265쪽), 충효동에 위치한 김유신묘를 경덕왕릉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이근직, 2012, 383~384쪽).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하였다.
김유신은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함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커다란 공을 세웠기 때문에 통일신라에서 두 사람을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존경과 추앙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시대에 김부식은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조 말미의 사론에서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智略)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義勇)이 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칭송함이 지금[고려]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김유신에 대해 극찬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김유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한말·일제식민지시기에 신채호는 김유신은 지혜와 용기를 지닌 명장이 아니요, 음흉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대공은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것에 있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 한말·일제식민지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우리의 주권이 위협받거나 또는 주권이 상실된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외세를 끌어들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박찬흥, 2018; 김영하, 1983).
본서의 열전 10권 가운데 김유신열전이 무려 3권을 차지한다. 김부식을 비롯한 본서의 찬자들은 고려 중기까지 김유신에 관한 전승자료가 많이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김유신을 전범(典範)으로 삼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김유신의 전기를 3권에 걸쳐 할애하여 자세하게 기술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의 찬자는 김장청(金長淸)이 지은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또는 『흥무대왕행록(興武大王行錄)』)의 기록을 그대로 전재(轉載)하거나 또는 일부 내용을 발췌 인용하여 김유신열전의 골격을 구성하고, 본서의 신라본기(新羅本紀)와 가락국기(駕洛國記), 개황력(開皇曆)[개황록(開皇錄)], 김유신비를 참조하여 김유신의 세계(世系)에 대해 서술하는 한편, 고기(古記)로 분류할 수 있는 전승자료에 전하는 김유신 영혼과 관련된 일화를 간략하게 축약하여 김유신열전에 보입(補入)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의 둘째 아들인 원술(元述), 김유신의 적손(嫡孫)인 윤중(允中), 윤중의 서손(庶孫)인 김암(金巖)에 관한 행적을 정리한 전승자료를 활용하여 이들의 전기(傳記)를 김유신열전의 말미에 부기(附記)한 것으로 확인된다(전덕재, 2020). 본서 김유신열전에 전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김유신의 연보를 간략하게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595년(진평왕 17)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였다.
15세(609년; 진평왕 31) 화랑(花郞)에 선출되었다.
35세(629년; 진평왕 51년) 낭비성전투(娘臂城戰鬪)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48세(642년; 선덕왕 11년) 압량(주)군주에 임명되었다.
50세(644년; 선덕왕 13년) 소판(蘇判) 관등을 수여받고,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53세(647년; 선덕왕 16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을 진압하고, 무산성(茂山城) 등을 공격한 백제군을 무찔렀다.
54세(648년; 진덕왕 2년) 642년에 빼앗긴 대야성(大耶城)을 탈환하고, 대야성군주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골과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을 서로 교환하였다. 이 해에 상주행군총관(上州行軍摠管)에 임명되어 백제의 진례성(進禮城) 등을 공격하여 백제 군사 9천여 명을 목 베고, 600명을 사로잡았다.
55세(649년; 진덕왕 3년) 백제군과 도살성(道薩城)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61세(655년; 태종무열왕 2년)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과 혼인하였다. 도비천성(刀比川城)[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66세(660년; 태종무열왕 7년)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대장군으로서 신라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7~68세(661~662년; 문무왕 1~2년)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당군에게 식량을 수송하여 공급하였다.
69세(663년; 문무왕 3년)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전하였고, 이 해 11월에 왕경으로 돌아온 후에 토지 500결을 사여받았다.
71세(665년; 문무왕 5) 당나라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000호에 봉하였다.
74세(668년; 문무왕 8년) 고구려 정벌을 위한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에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문무왕의 만류로 고구려정벌에 직접 참전하지 못하였다. 문무왕이 이 해 10월 22일에 태대각간(太大角干) 관등과 식읍 500호, 수레와 지팡이를 사여하였다.
79세(673년; 문무왕 13년) 7월 1일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68, 「김유신묘고」,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을유문화사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이근직, 2012,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전덕재, 2013, 「신라 하대 득난 신분의 대두와 골품제의 변화」, 『신라문화』 42
전덕재, 2020,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 『사학연구』 139
박찬흥, 2018,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 『동양고전연구』 72
김영하, 1983, 「단재 신채호의 신라삼국통일론 -창강 김택영의 서술 논리와 비교하면-」, 『민족문화연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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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왕경(王京): 신라의 국도(國都)를 가리키며, 현재 경북 경주시에 해당한다. 왕도(王都), 금경(金京), 대경(大京), 동경(東京), 경성(京城), 왕성(王城)이라고도 불렀다. 종래에 학계에서 신라 왕경과 왕도의 관계, 왕경 또는 왕도의 공간 범위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기존의 견해를 크게 왕경과 왕도의 공간 범위를 다르게 이해하는 견해와 왕경과 왕도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로 대별할 수 있다.
일찍이 오늘날 경주시 일원을 망라하는 6부 전체의 범위를 왕경이라고 규정하고, 다시 왕경을 국왕을 비롯한 왕실세력들이 거주하며 왕궁과 왕성이 위치한 왕도와 그 밖의 6부지역, 즉 왕기(王畿)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견해(이종욱, 1982, 222~243쪽)가 제기되었고, 신라 초기에 왕경을 왕도와 그 이외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다가 통일 이후에 왕경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왕도와 그 밖의 지역, 즉 왕기(王畿)로 구분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강종원, 1992; 오영훈, 1992), 처음에 6부지역을 왕경이라 부르다가 8세기 전반 성덕왕대에 왕경 중심부만을 왕도로 규정하면서, 왕경은 왕도와 6부지역으로 구분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이기봉, 2007, 39~57쪽), 왕경은 도성(왕도)과 교(郊) 및 왕기 등으로 구성된 왕도 주변의 일정지역으로 구분되며, 특히 왕도는 조방제(條坊制)를 시행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이영호, 2005), 왕경은 도시구획화한 범위를 가리키고, 왕도는 도시구획화한 범위와 그 주변 산지를 포함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견해(김용성, 2006) 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 왕경과 왕도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초기에 신라는 경주시 일원을 망라하는 6부지역을 왕경이라 불렀다가 통일 이후에 오늘날 경주 시내를 망라한 범위에 조방제를 시행하고, 그곳만을 왕경이라고 불렀다고 보는 견해(田中俊明, 1992)가 제기되었고, 이후 통일 이전에 왕경은 오늘날 경주시 전역에 걸친 6부를 모두 포괄한 범위였다가 통일 이후에 왕경의 범위를 경주분지 내로 축소 조정하였으며, 그 외곽의 종래 왕경지역을 사교(四郊)와 왕기지역(대성군과 상성군지역)으로 구분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여호규, 2003),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에 왕도의 길이가 3,075보, 너비가 3,018보라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통일 이전에 오늘날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과 울산광역시 북구 일부,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 일원을 망라한 영역을 왕경이라고 불렀다가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 시내 범위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면서 도시를 계획적으로 재편하였으며, 하대에 이르러 인구가 늘어나면서 옛 왕경지역에 설치한 대성군과 상성군, 임관군지역으로 왕경의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이해한 견해(전덕재, 2009, 57~95쪽)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통일 이후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면서 6부 역시 그 범위 내에 재배치하였다고 보는 견해(전덕재, 2009, 74~82쪽)와 통일 이후 옛 왕경지역에 대성군 등을 설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6부의 분포 범위는 통일 이전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박성현, 2019; 주보돈, 2020, 39쪽)가 대립하고 있다. 한편 왕경과 왕도를 동일시하면서도 방(坊)과 리(里)를 별개 지역에 설정되었다고 상정한 다음, 중심부의 왕경=왕도에는 방(坊)이 존재하였고, 그 외곽에 리(里)라는 행정구역이 설정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김교년 2003; 신창수 2003; 이은석 2004). 이밖에 신라인들은 중고기에 지방의 주·군·촌(州·郡·村)과 대비하여 원사로국지역, 즉 6부지역을 주로 왕경(王京)이라 부르다가 통일 이후에 왕경인과 지방민을 정치적으로 차별 대우하는 관행이 약화되면서 국도(國都)를 단지 신라의 수읍(首邑) 또는 도읍(都邑)으로만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도를 금성(金城), 금경(金京), 대경(大京), 동경(東京), 경도(京都), 왕도(王都) 등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하게 되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참고문헌〉
이종욱, 1982,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강종원, 1992,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3
오영훈, 1992, 「신라왕경에 대한 고찰; 성립과 발전을 중심으로」, 『경주사학』 11
이기봉, 2007, 『고대 도시 경주의 탄생』, 푸른역사
이영호, 2005, 「7세기 신라왕경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6
김용성, 2006, 「신라 왕도의 범위에 대하여」, 『신라문화』 28
田中俊明, 1992, 「新羅における王京の成立」,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0, 朝鮮史硏究會
여호규, 2003, 「신라 도성의 의례공간과 왕경제의 성립과정」, 『신라 왕경조사의 성과와 의의』(문화재연구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제12집),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전덕재, 2018,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실상-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대구사학』 132
박성현, 2019, 「신라 왕경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대구사학』 134
주보돈, 2020, 『신라 왕경의 이해』, 주류성
김교년, 2003, 「신라 왕경의 발굴조사와 성과」, 『신라왕경조사의 성과와 의의』(문화재연구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제12집),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은석, 2004, 「왕경의 성립과 발전」, 『통일신라의 고고학』(2004년 전국고고학대회 발표문)
신창수, 2003, 「신라 왕경 연구의 의의와 문제점-연구사를 중심으로」, 『신라왕경 조사의 성과와 의의』(문화재연구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제12집),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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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3
김유신(金庾信)은 왕경(王京) 사람이다: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등에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武力; 另力)이 사훼부(沙喙部) 소속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김서현과 김유신의 소속 부가 사훼부였다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진한조에서 금입택(金入宅) 가운데 하나인 재매정택(財買井宅)이 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이라고 밝혔다. 재매정택이 김유신가의 종택(宗宅)이었다고 전하는 것인데, 현재 재매정택의 유지(遺址)는 월성 근처의 경북 경주시 교동 89-7번지에 위치한다. 월성은 훼부(喙部)에 속하였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 김유신의 종택인 재매정 역시 훼부, 즉 양부(梁部)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른다면, 김유신은 훼부(양부)에 거주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고기(中古期)에 왕경 6부의 지배층들에게 이벌찬(伊伐飡)을 비롯한 17관등을 가리키는 경위(京位)를 수여하였고, 지방 출신의 지배층에게는 술간(述干)을 비롯한 외위(外位)를 별도로 수여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경위를 수여받은 왕경 6부의 지배층만을 중앙과 지방 관리로 임용하였고, 외위 수여자들을 촌주(村主),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에 임명하여 지방통치에 협조하게 하였다. 이처럼 중고기에 왕경 6부인이 신라 국가 전체의 지배구조상에서 여전히 지배자집단의 위상을 지녔기 때문에 인명 표기에서 반드시 소속 부를 기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7세기 중반 진덕왕대에 왕경 6부인을 진골과 6~4두품에 편제하여 골품제(骨品制)를 완비하고, 골품에 따라 관등과 관직의 승진에 제한을 두는 법제(法制)를 마련하면서 경위와 외위의 2원적 관위제 운영을 통하여 왕경인과 지방민을 차별하는 제도가 무력화되기에 이르자, 신라 정부는 674년(문무왕 14)에 외위를 폐지하고 지방 출신의 지배자에게도 경위, 즉 17관등을 수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더불어 신문왕대에 오늘날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과 울산광역시 북구 일부지역,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을 망라하던 왕경의 범위를 오늘날 경주 시내의 범위로 축소 조정하였다. 외위의 폐지와 왕경의 범위 축소에 따라 왕경에 사는 주민과 왕경 바깥의 주·군·현에 거주하는 주민을 차별 대우하는 관행 및 인명 표기에서 소속 부를 기재하는 관행이 소멸되었고, 이때부터 골품에 따라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차별 대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따라 일상생활까지 규제하기에 이르렀다(전덕재, 2003, 「넘을 수 없는 경계, 왕경과 지방」, 『역사비평』 65;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273~289쪽). 이에 따른다면, 통일 이후에 왕경 사람이라고 하여 지방민에 비하여 정치·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김유신의 소속 부를 밝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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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4
12세조(世祖): 본 기록에서 김유신의 증조부(曾祖父)인 구해(仇亥)가 수로(首露)의 9세손(世孫)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른다면, 김유신은 수로의 12세손이 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김해소경조에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세(世)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백성들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10세는 구해왕이 금관국의 10대왕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수로(首露)-거등왕(居登王)-마품왕(麻品王)-거질미왕(居叱彌王)-이시품왕(伊尸品王)-좌지왕(坐知王)-취희왕(吹希王)-질지왕(銍知王)-겸지왕(鉗知王)-구형왕(仇衡王; 구해왕)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졌다고 전한다. 따라서 본 기록과 지리지, 가락국기조에 전하는 김유신의 세계는 동일한 내용을 전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법민왕(法敏王; 문무왕)이 용삭(龍朔) 원년(661; 문무왕 1)에 내린 제서(制書)에서 시조 수로왕은 자신의 15대(代) 시조가 된다고 밝혔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김유신과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황후(文明皇后)의 아버지인 서운잡간(庶云匝干)이 구형왕의 맏아들 세종(世宗)의 손자이자, 솔우공(率友公)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문무왕 자신을 1대로 계산하면 문무왕으로부터 수로왕은 15대 시조가 된다. 고려시대에 비록 김유신과 구형왕(구해왕)을 연결하는 계보를 조작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그러나 수로왕으로부터 구해왕에 이르기까지의 왕계 자체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도 이설(異說)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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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5
수로(首露): 금관국(金官國; 가락국(駕洛國))의 건국 시조로서 수릉(首陵)이라고도 부른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서 수릉은 수로가 돌아가신 뒤의 시호라고 언급하였다. 가락국기조에 수로의 탄생부터 즉위, 혼인, 사망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해당하는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壬寅年)에 하늘로부터 구지봉(龜旨峯)에 내려온 여섯 개의 황금알 가운데 가장 먼저 깨어났다고 하며, 9간(干)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후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건너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158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후한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199)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고령군 건치연혁조에서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에 “가야산신인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또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금관국왕 시조인 수로를 가리킨다.”고 전한다고 하였다.
‘수로(首露)’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가락국기에서는 여섯 개의 알 가운데 가장 먼저[首] 모습을 드러냈기에[露] ‘수로’라고 하였다고 하였지만, 이는 후대인들이 한자의 의미를 빌려 윤색한 것이며, 실제로는 고유어를 음차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종래에 수로는 ‘용출(聳出, 湧出)’, ‘증고(增高)’를 뜻하는 우리 고어의 ‘수리’, ‘술’, ‘솔’에 해당하는 말로, ‘고위(高位)’, ‘수위(首位)’, ‘신성(神聖)’의 뜻을 지닌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수로왕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321~322쪽).
이외에 가락국기에는 본서에 전하지 않는 설화, 즉 탈해가 신라의 왕이 되기 전에 수로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찾아왔다가 수로와의 둔갑술 겨룸에서 패해 신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파사이사금 23년 8월조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토를 놓고 다투다가 왕(파사이사금)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청하자, 왕이 금관국(金官國)의 수로왕(首露王)이 나이가 많아 지식이 풍부하다 하여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다툼이 된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수로왕릉은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 93번길 26에, 수로왕비릉(허황후릉)은 김해시 가락로 190번길 1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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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6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원문은 ‘不知何許人也’이다. 종래에 이에 대해 해석이 다양하였다. 이 구절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해석한 견해(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1958; 이강래, 1998),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해석한 견해(신호열, 1977), ‘(근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해석한 견해(이병도, 1977),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해석한 견해(이재호, 1989; 정구복 외, 2012, 648쪽) 등이 제기되었다.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樂) 삼죽(三竹)조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문왕 때에 동해 바다 안에서 홀연히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모습이 거북이 머리를 닮았고, 그 위에 한 줄기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설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전한다. 그런데 만파식적의 유래와 관련된 설화가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만파식적조에 전한다.
두 기록을 비교하면, 악지의 기록은 이 설화의 요점만을 발췌하여 인용하였음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본서의 찬자는 고기의 기록을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이 고기의 전문(全文)을 악지(樂志)에 기술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의 찬자가 가락국기(駕洛國記)와 개황력(開皇曆) 등에 전하는 수로왕설화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만파식적설화에 대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언급한 사실을 감안하건대, 수로왕설화의 내용도 만파식적설화와 비슷하게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수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인 알 수 없다(不知何許人也)’라고 기술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2020).
〈참고문헌〉
이병도, 1977, 『역주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북한 과학원 고전연구실, 1958, 『삼국사기』, 과학원
이재호, 1989, 『삼국사기』, 광신출판사
신호열, 1977, 『삼국사기』, 동서문화사
이강래, 1998, 『삼국사기Ⅱ』, 한길사
정구복 등,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전덕재, 2020,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 『사학연구』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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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7
후한(後漢):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에 의하여 한(漢)나라가 멸망한 뒤, 한 왕족이었던 유수(劉秀; 광무제(光武帝))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왕망이 멸망시킨 한나라를 전한(前漢), 유수가 부흥시킨 한나라를 후한(後漢)이라 부른다. 또한 전한의 수도가 장안(長安)이고, 후한의 수도가 장안의 동쪽에 위치한 낙양(洛陽)이어서 전자를 서한(西漢), 후자를 동한(東漢)이라 부르기도 한다. 225년에 조조(曹操)의 아들인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후한을 멸망시켰다.바로가기
註) 008
건무(建武): 건무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황제로 즉위한 서기 25년 6월에 종전의 갱시(更始)를 폐지하고 새롭게 제정한 연호로서, 광무제가 죽은 서기 56년 4월까지 31년간 사용되었다(정구복 등,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648쪽).바로가기
註) 009
구봉(龜峯):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구지(龜旨)라고 전하고, 일연(一然)은 세주(細注)로 “이것은 작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여러 마리의 거북[十朋]이 엎드린 모양과 같으므로 그렇게 불렀다.”고 부연 설명하였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죽지랑(竹旨郞)은 죽만랑(竹曼郞)이라고도 표기하였다고 전한다. ‘旨’는 ‘맛있다’, ‘맛있는 음식’을 가리키는 한자이다. 이것의 훈인 ‘맛’을 음차하여 ‘曼’으로 표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맛’은 ‘ᄆᆞᄅᆞ’, 즉 지붕이나 산 또는 고개의 꼭대기를 의미하는 ‘마루’와 통한다. 따라서 죽지(죽만)는 ‘대-마루’,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전하는 죽지령(竹旨嶺)은 ‘대-마루-고개’라고 해석할 수 있다(황패강, 1991, 「모죽지랑가 연구」, 『어문연구』 21,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어문연구회, 63쪽).
이와 같은 해석에 따른다면, 구지(龜旨)는 거북-마루, 즉 거북처럼 생긴 고개 또는 산봉우리의 꼭대기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구봉(龜峯)과 구지(龜旨)는 같은 곳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을 듯싶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가락국 수로왕조에 “임인(壬寅; 서기 42년) 3월에 알에서 태어나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다스렸다. 금알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이 김씨이다. 『개황력(開皇曆)』에 실려 있다.”고 전한다. 가락국기에 구지(龜旨)라고 전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개황력에 전하는 수로왕설화에 구봉(龜峯)이라고 기술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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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0
가락(駕洛):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수로(首露)가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김해소경조에 “김해소경(金海小京)은 옛날의 금관국(金官國)또는 가락국(伽洛國) 또는 가야(伽耶)라고도 하였다이었다.”고 전하여, 가락국, 가야의 한자 표기가 가락국기조에 전하는 것과 달랐음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본서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서 가락국을 가야(加耶), 금관국(金官國)이라 표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본서 권제46 열전제6 강수조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남가라(南加羅 또는 南迦羅), 금관(金官), 수나라(須奈羅 또는 須那羅), 소나라(素奈羅)라고, 「광개토왕릉비」에 임나가라(任那加羅),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구야국(狗邪國 또는 拘邪國)이라고 전하는데, 이들은 모두 가락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에 가야(加耶)의 다른 표기인 ‘가량(加良)’을 음차(音借)하여 ‘駕洛’ 또는 ‘伽落’이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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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1
가락(駕洛)의 9촌(村):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수로(首露)가 나타나기 이전에 김해지역에 아도간(阿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干)이 추장(酋長)으로서 무릇 100호, 7만 5천 명을 거느렸다고 전하는데, 가락의 9촌은 9간이 각기 다스리던 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아도, 여도 등이 촌명(村名)인지, 아니면 인명(人名)인지의 여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12
〔수로는〕 …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본 기록에는 수로가 구봉에 올라 가락의 9촌을 바라본다고 전하나,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아도간(我刀干)을 비롯한 9간과 백성들이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壬寅年; A.D. 42) 3월 계욕일(禊浴日)에 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무리 200~300인이 구지에 가서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를 맞이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바로가기
註) 013
그곳에 나아가 나라를 새로 세우고: 본 기록에서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A.D. 42년)에 수로(首露)가 나라를 새로 세웠다고 전하나,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수로왕조에 인용된 『개황력(開皇曆)』에서는 임인(A.D. 42년) 3월에 수로가 금알에서 나와 이 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임인년 3월 계욕일(禊浴日; 3월 3일)에 하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왔고, 그날로부터 12일이 지난 후에 수로가 황금알에서 나와 이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세웠다고 전한다.바로가기
註) 014
가야(加耶): 삼국시대에 백제, 신라와 함께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로서 삼한의 하나인 ‘변진(弁辰: 변한)’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일의 각종 사서에 ‘가라(加羅)’라는 명칭으로도 나온다. 애초에는 김해지역의 가락국(금관국, 금관가야)을 중심으로 연맹체(전기 가야연맹체)를 구성하였다가, 4세기 말 고구려군의 남정을 계기로 가락국(금관국)의 주도권이 붕괴되자, 5세기 후반부터는 고령지역의 대가야가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후기 가야연맹체를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김해소경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오가야조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가야(伽耶)라고 전한다. 종래에 인도 불교 성지인 부다가야(Budda Gaya)’를 ‘불타가야(佛陀伽耶)’로 표기하고, 그 북방에 있는 도시인 ‘가야(Gaya)’를 ‘가야성(伽耶城)’으로 표기한 불경의 용례를 주목하여, 고려시대에 승려들이 가야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伽耶’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수로왕에서 월광태자까지)』, 푸른역사, 42쪽).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고령군 건치연혁조에서는 대가야국(大伽倻國)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가야를 일반적으로 ‘伽倻’라고 표기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밖에 가량(加良), 가라(迦羅)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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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5
금관국(金官國):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가야의 한 나라로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수로(首露)가 42년에 9간(干)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왕(辰王)을 더 우대하여 부른 칭호 가운데 ‘구야진지렴(狗邪秦支廉)’과 ‘안야축지(安邪踧支)’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구야국이 건국된 정확한 시점을 알기 어렵지만, 이를 통해 3세기 중반에 경남 김해에 위치한 구야국이 변한을 대표하는 나라로 부상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야국을 후에 금관국이라고 불렀다.
『일본서기』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4월조에 금관촌(金官村)과 수나라(須那羅), 권22 추고천황(推古天皇) 8년(600)조에 소나라(素奈羅)라는 표현이 전한다. 수나라 또는 소나라는 ‘쇠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금관국(金官國)이란 국호 역시 철과 관련되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구야국은 낙랑, 대방과 일본 열도, 변·진한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이점과 우수하고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 변한, 즉 가야의 대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고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구야국(금관국) 중심의 가야연맹체를 전기 가야연맹체라고 부른다(김태식, 1993, 『가야연맹사』, 일조각, 58~68쪽). 금관국은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 군대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5세기에 이르러 금관국을 대신하여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여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국은 이후에도 한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532년(법흥왕 18)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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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6
나라를 새로 세우고 …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본서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1년 8월, 파사이사금 8년 7월, 15년 2월, 17년 7월, 18년 정월, 27년 8월, 지마이사금 4년 2월과 7월, 5년 8월, 나해이사금 6년 2월, 17년 3월, 소지마립간 3년 3월, 18년 2월, 법흥왕 9년 3월, 진흥왕 12년 3월, 23년 9월 기록에 가야(加耶)라는 표현이 보이고, 탈해이사금 즉위년 기록에 금관국(金官國)이 처음 나오며, 파사이사금 23년 8월 기록과 법흥왕 19년 기록에도 그것이 전한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17년 3월까지의 기록에 전하는 가야는 김해지역에 위치한 금관국을, 소지마립간 3년 3월 기록 이후에 전하는 가야는 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의 찬자는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가야(加耶)가 자주 보이고,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항복할 때에 국호(國號)를 금관국이라고 불렀음을 주목하여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야라고 불렀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고 기술한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20). 종래에 금관국으로 칭해진 때는 680년 이후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末松保和, 1956, 237쪽), 6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김해지역의 국명 및 군명은 남가라(南加羅), 수나라(須那羅), 소나라(素奈羅)가 같이 쓰이다가 7세기 중엽에 비로소 금관촌(金官村)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한 이후에 그 이전 김해지역에 존재하였던 가야 소국을 금관국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한 견해(김태식, 1996, 8~10쪽)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9(532)년 기록에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전하고, 『일본서기』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4월조에 금관촌(金官村)과 수나라(須那羅)라는 표현이 전하는 사실 등을 고려하건대, 적어도 6세기 전반에 금관국이라고 불렀음은 확실시된다고 보인다. 다만 현재 어느 시기부터 금관국이라고 불렀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적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전덕재, 2020,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 『사학연구』 139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김태식, 1996, 「대가야의 세계와 도설지」, 『진단학보』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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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7
구해(仇亥): 김해지역에 위치한 가야 소국의 하나인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이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로써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관등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구충왕(仇衝王), 같은 책,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구형왕(仇衡王)이라 전한다. 금관국(金官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9세손(世孫)이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아버지는 감지왕(鉗知王)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라 전하나, 각간은 신라의 관등이기 때문에 출충이 금관국에서 각간이었다고 전하는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김구해의 후손들은 신라에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고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김씨(金氏) 진골과 구분하여 김구해의 후손들을 ‘신김씨(新金氏)’라 불리면서 냉대를 받았다(선석열, 2001; 이문기, 2004; 이현태, 2006).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왕산 기슭에 김구해의 무덤, 즉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이 있으나, 현재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권덕영, 2007).
〈참고문헌〉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김해김씨와 경주김씨-」, 『한국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이문기, 2004, 「금관가야계의 시조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이현태, 2006, 「新羅 中代 新金氏의 登場과 그 背景」, 『한국고대사연구』 42
권덕영, 2007, 「금관가야 “구형왕릉” 전승과 역사화 과정」, 『대구사학』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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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8
구차휴(仇次休):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구해(仇亥)의 다른 표기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 구해를 구차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본서의 찬자가 가락국기 이외의 또 다른 전승자료에 전하는 사실을 인용한 것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註) 019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소호금천씨는 중국의 전설시대 황제(皇帝) 중의 한 사람이다.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이름은 지(摯)이다. 소호(少昊)를 소호(少皞)라고도 적는다. 중국 상고시대 전설상의 황제로, 금덕(金德)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여 금천씨(金天氏)라고도 한다. 한편 태호(太昊)로 칭해지던 황제(黃帝)의 아들 포희씨(包犧氏)의 법을 이어받아 닦았다고 하여 소호씨라 이름하였고, 궁상(窮桑)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궁상씨, 청양(靑陽)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청양씨, 운양(雲陽)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운양씨라고도 하며, 곡부(曲阜)에 도읍하여 84년 동안 재위하였다고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867~868쪽; 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650쪽).바로가기
註) 020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여서 성(姓)을 김(金)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말미에 실린 김부식(金富軾)이 찬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론(史論)에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姓)을 김씨라 하였고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비(金庾信碑) 및 박거물(朴居勿)이 짓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라 하였다.’고 한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김유신비뿐만 아니라 9세기 후반에 건립된 삼랑사비에서도 신라인이 소호금천씨의 후예였다고 인식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95년(효소왕 4) 10월 무렵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되는 「김인문 묘비(金仁問 墓碑)」에 김씨의 기원을 소호금천씨(少皥金天氏)와 연결시켰음을 알려주는 기록[少皥☐墟分星于而超碧海金天命☐太祖漢王啓天齡之]이 전하고, 함통(咸通) 5년(864; 경문왕 4)에 작성된 「(당고)김씨부인 묘지명((唐故)金氏夫人 墓誌銘)」에 부인 김씨 가문이 김씨 성을 가지게 된 연원을 소호금천(少昊金天)에서 찾았다는 내용이 전한다(권덕영, 2009).
한편 681년(신문왕 1) 무렵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되는 「경주 문무왕릉비(慶州 文武王陵碑)」에 신라의 유래를 화관(火官), 즉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에서 찾았고, 나아가 김씨의 연원을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받은 김일제(金日磾;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한나라에 항복하자, 무제가 투후(秺侯) 또는 투정후(秺亭侯)로 봉하였음)와 연결시켜 인식하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전하고[我新☐☐君靈源 自夐繼昌基於火官之后 峻構方隆 由是克☐☐枝載生英異 秺侯祭天之胤 傳七葉以焉 十五代祖星漢王 降質圓穹 誕降靈仙岳 肇臨☐☐], 「(당고)김씨부인 묘지명」에서는 요동지방으로 피난해 번성해진 김일제의 후손 중의 한 부류가 바로 김씨부인의 선조였다고 밝혔다.
종래에 태종무열왕이 중대 왕실을 개창함과 더불어 자신의 왕실이 기존 왕실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알지 출자설’을 부정하고 새로운 소호금천씨 출자설을 만들었고, 이후 혜공왕대를 거치면서 소호금천씨 출자설이 퇴조하였다가 9세기 후반에 경문왕가가 기존의 왕실 내지 여타 김씨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다시 그것을 강조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문기, 1999, 649~682쪽). 또한 7세기 후반에서 하대까지 계속해서 김씨 왕실이 관념적으로 소호금천씨와 김일제에서 기원을 구하는 인식이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다분히 관념적인 시조인식의 소산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권덕영, 2009).
이밖에 신라가 7세기 중반 진덕여왕대부터 중국의 정삭(正朔)과 복장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신라의 문물제도를 당풍(唐風)으로 개편하며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와 천하관을 수용하였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 왕실이 소호금천씨 또는 김일제와 같은 중국인에게서 기원하였다고 주장하여 중국과 신라의 일체감을 강조하려 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전덕재, 2004).
〈참고문헌〉
권덕영, 2009, 「대당고김씨부인묘명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한국고대사연구』 54
이문기, 1999, 「신라 김씨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론집』 23·24
전덕재, 2004, 「신라의 대외인식과 천하관」, 『역사문화연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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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1
유신비(庾信碑):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조에는 문무왕 13년(673) 7월 1일에 김유신이 사제(私第)의 정침(正寢)에서 향년 79세로 사망하자, 문무왕이 크게 슬퍼하여 부의(賻儀)로 채백(綵帛) 1천 필(匹)과 조(租) 2천 석(石)을 주어 장례에 쓰게 하였으며, 군악(軍樂)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내게 한 다음,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碑)를 세워 김유신의 공명(功名)을 기록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말미에 실린 김부식(金富軾)이 찬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론(史論)의 세주(細注)에서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김유신비(金庾信碑)를 찬술하였다고 전한다. 673년 무렵에 문무왕이 설인선에게 명하여 유신비를 찬술하게 하였다고 짐작된다. 이에 반해 673년 김유신 사망 이후에 찬술된 김유신비와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비는 별개이고, 후자는 9세기 후반에 건립되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이문기, 1999, 663~664쪽).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김유신비(金庾信碑)’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고,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제김각간유신묘비후(題金角干庾信墓碑後)」에서 “이서구(李書九)는 널리 알고 옛 것을 좋아하는 선비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집에 『동방금석첩(東方金石帖)』 산질(散帙)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두어 권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빨리 가져오라고 하여 신라의 옛 필적을 뒤져보니, 김각간의 비 두어 폭이 있는데, 격지가 떨어졌으니 희미하게는 볼 수 있고, 또 그 글을 살펴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참조하면, 조선 중기까지 김유신비가 존재하였고, 조선 후기까지 김유신비의 탁본 일부가 전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김상현, 2004). 김유신비는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단지 신라 사람들이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라고 인식하였다는 사실, ‘〔김유신의〕 아버지는 소판(蘇判) 김소연(金逍衍)이다.’라는 기록이 전하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이문기, 1999, 「신라 김씨왕실의 소호금천씨 출자관념의 표방과 변화」, 『역사교육론집』 23·24
김상현, 2004, 「문헌으로 본 한국고대 금석문」, 『문화사학』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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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2
헌원(軒轅): 헌원은 황제(黃帝)의 이름이며, 중국 상고시대의 전설적인 제왕(帝王)이다. 그가 헌원에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으로 삼았고, 치우(蚩尤) 등 포악한 제후(諸侯)를 정벌하고 신농씨(神農氏)의 뒤를 이어 제위(帝位)에 올랐다고 알려졌다(이기동, 1987, 363쪽; 정구복 외, 2012, 650쪽; 이강래, 1998, 749쪽).
〈참고문헌〉
이기동, 1987,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이강래, 1998, 『삼국사기Ⅱ』,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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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3
남가야(南加耶): 김해지역에 위치한 가야 소국의 하나인 금관국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39년 3월,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21년 6월과 23년 3월,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2년 4월과 7월 기록에 금관국(金官國)을 남가라(南加羅), 권22 추고천황(推古天皇) 8년 기록에 남가라(南迦羅)라고 전한다. 이들 기록을 통해 가야인들이 고령의 대가야(大加耶)에 대비하여, 금관국을 남가라(남가야)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본서에서 본 기록에만 남가야라는 표현이 보이는 점을 감안하건대, 본서의 찬자는 가야인들이 금관국을 남가야(남가라)라고 부른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다분히 대가야와 차별하려는 의도에서 수로왕이 세운 가야를 남가야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註) 024
시조(始祖)인 수로와 신라〔왕〕는 같은 성이었다: 532년(법흥왕 19)에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자식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자, 법흥왕은 그에게 상등(上等)의 관위를 수여하여 대우하였다. 현재 유신의 아버지인 서현(舒玄) 때에 김씨 성을 사여받았다고 보는 견해(이순근, 1990, 21쪽)와 태종무열왕의 즉위 이후에 유신에게 비로소 김씨 성을 사여하였다고 보는 견해(三品彰英, 1963, 185~186쪽 및 196쪽; 이현태, 2006, 242~243쪽)가 제기되었다. 924년(경명왕 8)에 건립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에 진경대사의 속성(俗姓)은 신김씨(新金氏)로서 그 선조는 임나왕족(任那王族)이며, 원조(遠祖)는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이라고 전하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에서 김유신의 후손들을 전통적인 김씨 왕족과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늦어도 759년(경덕왕 18) 이전에 건립된 「황복사비(皇福寺碑)」의 비편(碑片)에 ‘나마(奈麻) 신김계□(新金季□)’란 관리가 보인다(윤선태, 2002, 14~15쪽). 872년(경문왕 12)에 작성된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에 목탑을 중수(重修)할 때에 성전(成典)의 적위(赤位)에 대나마(大奈麻) 신김현웅(新金賢雄)이, 청위(靑位)에 나마(奈麻) 신김평금(新金平衿)이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위의 자료들을 통해 늦어도 경덕왕대부터 전통적인 김씨 왕족이 김유신의 후손들을 신김씨라고 불러 차별 대우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이순근, 1990,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 『한국사론』 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三品彰英, 1963, 「骨品制社會」, 『古代史講座 7』, 學生社
이현태, 2006, 「신라 중대 신김씨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42
윤선태, 2002, 「신라의 寺院成典과 衿荷臣」, 『한국사연구』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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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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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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